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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고 기다렸더니 주께서 들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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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7월호>
시편 40편은 표제가 『악장에게, 다윗의 시.』로 되어 있다. 총 17절로 이뤄진 이 시는 ① 주를 기다리며 주를 의지한 성도의 구원과 복(1-4절), ②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생각들(5절), ③ 순종하는 귀를 가진 종(6-8절), ④ 그 종이 회중 가운데서 의를 전파함(9,10절), ⑤ 말씀을 전파하는 종이 인생의 재앙에서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11-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내가 오래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 그가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절). 주께서 주실 응답을 긴 세월 참고 기다리는 일은 실로 믿음의 시험이요 연단이다.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을까' 하며 하늘을 우러러봐도 주의 얼굴빛은 비치지 않고, 주님이 내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 같은 아픔을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은가? 다윗은 『내가 오래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라고 말한다. 그가 "무서운 구덩이"와 "진흙 수렁" 같은 고난 속에서 결국 바라던 것을 얻을 때까지, 그 기다림은 얼마나 질기고 힘겨운 것이었을까. 모든 인생에는 그 사람만의 "구덩이"와 "수렁"이 있다(욥 5:7). 당신은 주께서 어서 당신을 그곳에서 끌어내어 안전한 반석 위에 세워 주시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가 나를 무서운 구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끌어내셔서 내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고, 내 걸음을 견고히 세우셨도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2,3절). 주께서는 다윗의 오랜 참음과 기다림에 마침내 응답하셨다. 맨 무릎으로 아주 먼 땅을 기어 온 듯한 기도가 응답되면, 슬픔과 기쁨과 안도가 함께 얼싸안고, 마침내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심금이 울리는 간증이 태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 훌륭한 간증은 많은 이들에게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며 그들도 주를 의지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간증 없는 성도의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가! 주께서 나의 이런 아픔을 해결해 주셨노라고, 내게 이런 기쁨을 주셨노라고 찬양할 수 없는 삶이라면 황량함 그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심은 당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성도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으시기 위함일 수 있다. 당신의 오랜 기다림은 당신 자신에게는 보상을, 주변 성도들에게는 도전을 주는 하나님의 복합처방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후 1:3,4).
『주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를 존경하지 않으며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4절). 찰스 스펄전은 말했다. "사람은 나사로처럼 가난할 수 있고, 모르드캐처럼 미움받을 수 있고, 히스키야처럼 아플 수 있고, 엘리야처럼 외로울 수 있지만,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도 있다. 그 어떤 외적 고난도 그가 복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계수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오히려 가장 부유하고 가장 번성하는 사람이 그가 누가 되었든지 믿음이 없다면 저주를 받은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붙드는 믿음이 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교만한 자를 존경하지 않으며 거짓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필경 사람의 용모를 두려워 않는(겔 3:9, 마 10:28)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말씀하신다(벧전 2:17). 그러나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필요치 않을 때가 있으니, 바로 "교만한 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때이다. 바른 성경을 거부하는 자들(시 12:6,7, 고후 2:17),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를 광신(狂信)이라 하는 자들(딤후 2:15),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갈 1:8), 동성연애자들(고전 6:9), 교황들, 성경을 배격하는 모든 인본주의자들을 우리는 존경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그들은(요 8:43,44) 모든 교만한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을 자기들의 아비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욥 41:34). 교만한 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거짓에 치우침 없이 바른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주께 복을 받는 길이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주님만을 의지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빼어난 증표인 것이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주의 경이로운 일들이 많으며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나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언하고 말하려 하나 주께 정연하게 헤아려 드릴 수도 없고 많아서 셀 수도 없나이다』(5절). 하나님의 생각은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분의 보좌에서 나온다. 그분의 생각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은 것이다(사 55:8,9).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며 너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닦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며 또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가득 차기를 구하노라.』(엡 3:17-19)라고 말했다.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는 우주의 크기에 관한 『지식』이며, 이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이셨다(막 6:3). 목수는 자신이 다듬을 목재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재어서 깎는다. 주님은 이 우주를 지으시되 그 치수, 곧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재어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셋째 하늘의 낙원에 다녀온(고후 12:2) 이후, 이 "우주의 크기"에(엡 3:18, 롬 8:39) 압도당했고 그 측량할 수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그만 감복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측량 불가한 우주의 규모를 초월한다는 것을 알면 그 위대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사랑은 끊임없이 발산되는 태양의 빛과 같은 것인데, 이 눈부시도록 영원한 사랑을 거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또 다른 생각"에 직면해야 한다. 곧 지옥은 스스로 확장하고 한없이 입을 벌렸으며(사 5:14) 그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진리이다(막 9:44). 하나님의 이 높고 영광스러운 생각은 그것을 거부한 죄인들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생각이며(롬 3:23), 그들이 어두움 속에서 홀로, 은밀히, 애써 부정하려 해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생각이다. 그들이 믿지 아니한다 해서 어찌하겠는가?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결코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롬 3:3).
『주께서는 희생제와 예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주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며 번제와 속죄제도 요구하지 아니하셨나이다』(6절). 출애굽기 21장에는 "귀가 열린" 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내 주인과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을 사랑하여 자유로이 나가지 않겠노라.' 하면 그때 그의 주인은 그를 재판관들에게 데리고 갈 것이며 그는 또한 그를 문이나 문설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주인이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으리니 그가 영원히 그 주인을 섬기리라』(출 21:5,6). 한 히브리인이 빚 때문에 종이 되어 주인을 6년 동안 섬기고 7년째 되는 해에 풀려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주인과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여 자유롭게 되기를 원치 않으면 주인은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자신의 영원한 종으로 삼을 수 있었다. 주인을 향한 의무를 다했고 빚진 것도 다 갚았으나, 주인을 사랑하고 그 베풂에 감사하여 그에게 영원한 종이 되어 순종하고자 했다면, 그 다짐은 우리를 위해 그려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닌가. 이제는 빚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주인에게 영원히 순종하고자 하는 것인즉, 이것은 "귀를 열고"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의 종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귀감이다.
본문 6절은 주께서 희생제와 예물도 바라지 않으시고 번제와 속죄제도 요구치 않으시며 오직 『내 귀를 열어 주셨』다고 말씀한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순종하는 귀"인 것이다. 우리의 두 귀가 늘 열려 있는 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귀 기울여 순종하라는 창조주의 뜻이 담겨 있다. 귀를 열어 놓고서도 듣지 않는 것은 죄이다(사 42: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열어 주신 두 귀로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 하나님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셨기에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아니하였도다』(사 50:5).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만이 치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순종에 "기쁨"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내가 왔나이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책에 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정녕, 주의 법이 나의 마음속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나이다』(7,8절). 주의 법을 마음속에 둔다면 고난 속에서도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게 된다. "순종"과 "기쁨"은 십자가의 길에서 한 멍에를 진다. 순종의 표본인 사도 바울을 보라!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고후 6:9,10).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는 이 악한 현 세상으로 인해 슬퍼할 수밖에 없다(딤후 3:12). 그러나 그 슬픔은 이내 기쁨의 옷을 걸친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미소가 함께 흐르는데, 이는 자기 앞에 놓인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히 12:2). 또한 "이 믿음의 시련"이 불로써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더 귀하게 되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해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1:7)
『내가 큰 회중 가운데서 의를 전파하였나이다. 보소서, 내가 내 입술을 억제하지 아니하였나니 오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마음속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신실하심과 주의 구원을 선언하였나이다. 주의 자애와 주의 진리를 내가 그 큰 회중 가운데서 숨기지 않았나이다』(9,1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주의 의와 신실하심과 구원과 자애와 진리를 큰 회중 가운데서 숨김없이 선언하셨다. 진리는 숨겨 두는 것이 아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담대히 전파하는 것이다(딤후 4:2). 성도는 죄의 세상에서 이처럼 말씀을 전파할 때 『주의 온유한 자비들』과 『주의 자애와 진리』로 계속 보호받아야 한다(11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에워싸고, 쳐다보기도 싫은 죄악들이 머리털보다도 많아 우리를 붙들어 낙심시킬 때 주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은 더욱 간절해진다(12,13절).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에게 파멸과 재앙이 있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고, "아하, 아하." 하며 비웃는 자들도 있지만, 수치를 당하며 망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14,15절). 주를 찾는 사람은 주 안에서 즐거워하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끊임없이 돌리게 될 것이다(16절).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궁핍해도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아시며 우리의 도움과 구원이 되신다. 주님은 그 일을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17절). 다만 천 년이 하루 같은 분 앞에서(벧후 3:8) 우리의 오랜 기다림이 절실히 필요할 뿐이다. 『내가 오래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 그가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절).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