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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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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5월호>
야고보는『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서, 인간의 생명은『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한다(약 4:14). 바울도 서신서에서 구원받은 죄인의 인생을 다루고 있는데, 거듭난 성도는 바울처럼『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다(빌 1:21).죽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유익』이 될 수 없다.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톨릭교도든, 힌두교도든, 모슬렘이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그리스도의 교회 회원이든, 안식교인이든 그들은 사후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한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는 것이 왜 바울에게 유익한 것이었는지 아는가? 왜냐하면 바울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고, 또한 그것이 훨씬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빌 1:23). 바울은 "몸에서 떠나는 일"이 곧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후 5:8). 보리스 베커라는 독일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가 있다. 혹자가 그에게 "테니스와 인생의 닮은 점"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베커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그는 힘주어 말하기를 "테니스가 곧 인생이죠!"라고 했던 것이다. 바울도 "사는 것"(인생)이 그리스도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에게는 "사는 것"이 바울 자신이 아니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위대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하시다! 독자들에게 한 가지 묻겠다. 당신의 삶은 "엉망진창"(Mess)인가, 아니면 삶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Message)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은 곧 "종교"이다. 혹자는 내게 "럭크만 목사, 당신이야말로 종교적인 광신자 아닌가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 나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무용한 것이라 생각하며, 구원의 방법으로 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 "종교"란 사람이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아는 죄인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구원받기 전에도 종교를 연구했다. 자신의 종교에 아주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교황 자신도 고백했듯이, 로마카톨릭은 "마리아를 섬기는 이단"(Marian Cult)이다. 교황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단이란, 기록된 성경 말씀에 반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무엇 또는 다른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로마카톨릭이다. 그들은 마리아를 섬기는데, 이것은 전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만 있다면, 인생이란 곧 "일"이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신분 상승"을 꾀하는 남녀들은 그렇게 산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그 일에 모든 시간을 쓰는 것이다. 나도 열심히 일하는 것에 찬성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 독일인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주당 40시간 일하는 직업을 제안 받았는데, 그는 "그런 아르바이트 정도의 일은 원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바울은『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노라.』라고 했고(살후 3:10),『일에는 게으르지 말고』라고 권면했다(롬 12:11). 또한 열심히 일을 하여 각종 청구서를 제때에 지불하는 것이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영적 필요"를 공급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연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이 기도하는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을 읽는 당신의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이런 영적인 활동도 물리적으로 돈을 벌고 청구서를 지불하는 것만큼이나 가족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쾌락"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도 있다. 즉 쾌락주의자들인 것인데, 그들의 신조는 "먹고 마시며 즐기자!"이다.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고 그 대가는 나중에 치르자는 것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의 방탕한 삶은 노년에 어음으로 돌아온다." 젊은이들은 쓸모없는 야생 귀리를 심어 놓고도 나중에 가서 그 소산을 거두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실상은 다음 성경 구절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4).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찾아가 법대에 입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글래드스턴은 그에게 법대를 졸업하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물었다. "그야 법조인이 되어야죠!" 그러자 글래드스턴이 물었다. "그다음에는?" "법조인으로서 돈을 좀 벌어야겠죠." "그다음에는?" "할 수 있는 만큼 일하다가 늙으면 은퇴해서 여가를 즐기겠죠." 이에 글래드스턴은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그 다음에는?" "뭐... 죽겠죠!"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마지막 질문에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때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충고했다. "자네는 지금 법대에 들어갈 때가 아니야. 돌아가서 처음부터 자네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나!"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 다가올 일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생각해 보라. 따라서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상 삶 이후에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살이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며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프랭크 시나트라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난 내 방식대로 살았어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가? 허구한 날 파티장에나 가서 혼자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며 술을 홀짝거렸고, 결국 그렇게 술을 마시며 살다가 죽어 버렸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젊은 시절의 방탕에 대해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시거니와, 나 역시 20대에 즐겼던 방탕한 삶의 대가를 70대가 되어 거두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스포츠"가 인생의 전부이다. 종교에 미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스포츠에 미친 자들도 있는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비용으로 10만 원 이상을 쓰기도 한다. 게다가 옷을 거의 벗다시피 하면서 자기 팀을 응원하는 자들도 있는데, 맨살에 페인팅을 하고 앉아 열광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 중에는 미식축구가 인생인 미치광이들도 있다. 오해하지는 말라. 나도 스포츠를 좋아한다. 나는 60세가 될 때까지 "터치 풋볼"을 했고, 특별한 규칙 없이 경기하는 수구인 "블러드볼"도 65세까지 했으며, 72세까지 합기도를 했고, 하키는 82세까지 했다. 스포츠를 좋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과 스포츠에 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육"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교회의 종탑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박쥐들이 살기 마련이다." 나 역시 기본적인 교육을 반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읽고 쓰고 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반대하는 교육은 너무 잡다한 지식을 머리에 많이 집어넣어서 사실상 전혀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교육이다. 성경은『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라고 말씀한다(고전 8:1).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의 세상은 "교육"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파괴하고 있다.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전 1:21).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에 대학에 입학한 그리스도인들 중 59%가 믿음을 저버린다고 한다. 고등학교나 대학의 교육은 그리스도인에게서 성경을 믿는 믿음을 강탈하고 있는데, 내가 반대하는 교육은 바로 이런 교육이다. 나는 내가 쓴 책들에서 "모든 복제된 로봇들은 똑같은 멍청이가 프로그래밍 한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할 때 이 말을 자주 쓰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킹제임스성경>을 비평하는 방식을 보면 그들이 누구로부터 배워서 누구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이 똑같이 참조하고 베끼고 있는 그 책들을 쓴 저자들이 누구인지도 나는 죄다 알고 있다. "모든 복제된 로봇들은 똑같은 멍청이가 프로그래밍 한 것이다."
한번은 어떤 배우가 다음과 같은 장난 섞인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학원 교육을 받은 200명 정도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강의에 대해 점수를 매기도록 했는데, 사실 아무 내용도 없는 그런 강의를 "전문 용어들"을 써 가면서 한 시간 동안 떠들어 댔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헛소리를 들은 청중은 모두 후한 점수를 주었다. 최저 90점에서 최고 95점까지, 상당히 수준이 높은 강의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때 이 배우가 자신은 연기로 먹고사는 사람이며, 고로 그 강연은 모두 헛소리였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청중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강연을 하든지, 그 내용을 아는 것처럼 보여야 해. 전문 용어를 많이 쓰고 있으니까 분명 똑똑한 사람일 거야.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하게 되면, 나를 무식하다고 생각하겠지!" 자, 밥 존스 시니어는 "구원 없는 교육은 저주다!"라고 말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에 전 국민의 98%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일본도 태평양 전쟁 당시 "죽음의 바탄 행진"을 통해 사람들을 학살하기 전에 이미 99%의 국민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교육은 결코 인간의 죄성을 바꿀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재산"을 모으는 데만 쓴다. 예수님께서는『주의하고, 탐심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가 소유한 것의 풍부함에 있지 않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2:15). 어떤 기자가 록펠러의 딸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요, 행복하지 않아요. 부탁인데, 저를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말 좀 해 주세요. 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이에요."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가난한 농장에 살면서 록펠러의 딸이 지녔던 반지 하나조차 살 수 없는 여인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을 만끽하며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인가? 언젠가는 그런 것들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가족인가? 언젠가 가족들도 남겨 놓고 갈 날이 올 것이다. 손자 손녀인가, 아니면 배우자인가? 바울은 이런 것들 중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다만『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했을 뿐이다.
우리보다 앞서 간 성도들은 "인생의 가치"를 현대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게 헤아렸다. 그들은 주일을 거룩하고 풍성하게 보내는 일이나, 교회에서 맘껏 소리를 높여 찬양하는 것 혹은 성도들을 위해 어떤 선한 일들을 했는지 등으로 그 가치를 매겼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대통령이나 왕, 영화배우,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자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진리들을 듣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양과 사막과 산들을 건너다녔고, 순교자들의 무덤에 묻혔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의 쇠사슬을 깨뜨렸는지, 얼마나 많은 성도들에게 복이 되었는지, 또한 주님께로 인도한 혼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그런 것들로 인생을 평가했다. 바로 아프리카 선교사 C.T. 스터드가 쓴 시와 같이 살았던 것이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은 이제 곧 지나갈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했던 일들만 영속할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탐심에 대해 경고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부자에 관한 비유" 하나를 드셨다.『어떤 부자의 땅이 수확을 많이 내는지라. 그가 속으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할까?』(눅 12:16,17) 이 부자의 질문에 내가 한번 답해 보겠다. "나누어 주라! 하나님의 사역과 그것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눠 주면 된다." 그러나 이 부자는 창고를 더 크게 지어서 "경기가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재산을 축적해 두기로 결정했다. 그런 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내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눅 12:19).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해 무엇이라고 부르셨는가?『너 어리석은 자야』(눅 12:20).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생애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몇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혼이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전능하신 분을 만날 날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죽음은 사람을 봐주는 법이 없다.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다. 문을 부수듯 들이닥쳐서 당신의 심장과 폐를 한 번 만지더니 "이제 당신은 끝났어. 이제 당신도 무덤에 누워야 할 시간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가진 모든 계획도 그 시간부로 끝인 것이다. 계획했던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다. 그 부자가 어리석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모든 부가 지상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 우리는 저 하늘에 있는 보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마 6:20).『너희 생명이 무엇이냐?』(약 4:14) "인생은 짧고 죽음은 확실하다. 죄가 그 원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