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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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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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3월호>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쫓아갈 뿐이라. < 빌립보서 3:13,14 >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것을 권면한다. 즉 "미래"는 마음에 두었던 반면, 지난 "과거"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던 것이다. 시간 개념으로 따져 봐도 과거에서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미래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지금 현재에서만 살 수 있다. 밥 존스 시니어는 "내일을 위한 최상의 준비는 바로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 세상을 직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악을 위해 대비하고 최상을 기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께서는 "하루하루를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고로 인생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과거에 연연하고 지나간 일을 파헤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옛날"을 들먹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라든지 "내가 이 일을 했었더라면..." 또는 "이미 저질러 버렸는데 어쩌나..."라는 식의 말들을 하는 것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이미 지나가 버렸다.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으니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현재라는 "선물"(present)을 망치기만 할 뿐이다.

과거에 머물기 좋아하는 몇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① 먼저 노인들이 그렇다 . 그럴 법도 한 것이 인생의 종점을 향해 다가갈수록 남은 인생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옛날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이 말하는 그 "옛날"이란 것도 썩 좋지만은 않다.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벌써 50회 동창회였고,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동창회에서 한 사람이 자기 동창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빌 스미스 아닌가! 많이 변했는걸! 금발이었는데 이제는 갈색이고, 키도 작았는데 부쩍 컸고 말이야. 이 친구 눈도 파란색이더니 이제 갈색이네!" 그 동창(?)이 "제 이름은 빌 스미스가 아니라, 해롤드 윌슨인데요."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름도 바꿨단 말이지!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옛날 친구들을 알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인생을 뒤돌아보며 자서전을 쓰기도 한다. 수년 전 필자도 숨이 붙어 있는 동안 마무리하고 싶어 자서전을 썼다(<썩지 않을 면류관>, 말씀보존학회, 2011년). 그런데 필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쓴 자서전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저 친구는 이제 자기 인생에서 더 이상의 승리도, 정복도 없다고 여기는구나!"

B.R. 라킨은 죽기 10년 전부터 자기가 어렸을 때 농장에서 자랐던 일을 계속 설교에서 말했다. 그가 설교했던 회중 대부분이 그런 농장에서 자란 적도 없고, 농기구나 버터를 젖는 법 또는 양털 손질법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아직도 그는 50,60년 전의 사람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과의 "교감"이 멀어져 버린다.

당신도 과거에서 살고 있진 않는가? 마흔 살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서 살 권리조차 없다. 옛말에 "인생은 사십부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30대 젊은이들이 자기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자랑삼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옛날을 많이 생각하고 과거에 머무는 것은 인생을 막 시작한 청년이 아니라 노인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② 패배한 사람들이 주로 과거에 연연한다 . 사람은 인생의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패배하고 있다고 여길 때 불평하기 쉽다. 출애굽기 16:3에는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달 동안 광야를 지나오면서 불평하는 부분이 나온다. "모세! 아론! 당신들은 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서 굶어 죽게 만드는 것이오? 약속했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요? 차라리 이집트의 고기 솥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파라오가 그들의 아기들을 무참히 죽였는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낙담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불평을 해댔고 과거를 "미화"시킨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용사들 중 하나는 여호수아다. 그러나 직접 출정해서 정복했어야 할 아이 성 첫 번째 전투에서 자신은 가지 않고 2개 대대 정도의 병력만 보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하여 돌아왔다. 당시 여호수아조차도 언약궤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요단 강을 건너게 하셨습니까!"

미국에서 소위 유명한 기독교 대학들이 게재하는 광고들을 보면 세상 대학의 광고를 보는 듯하다. 모두 영광이 떠나버린 것이다("이카봇," 삼상 4:21). 매력적인 여학생들, 다양한 스포츠 활동, 흥밋거리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학생들을 유혹하는데, 그들 역시 이 시대를 지배하는 영에게 관장당한 것이다.

"늙은 진격 장군"으로 불렸던 프러시아의 노장군 블뤼허는 나폴레옹을 대항해서 싸웠다.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기병대 기습을 지휘했다. 한번은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을 때, 함께 싸우던 한 독일군 장교가 블뤼허 장군의 북치는 소년 병사에게 "퇴각을 알리는 북을 치라!"고 명령하자, 그 소년은 블뤼허 장군이 자기에게 한 번도 퇴각을 알리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블뤼허 장군에게는 "진격하라! 앞으로! 돌격하라!"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치라."고 말했던 바울이 모든 사역과 싸움을 끝내면서 했던 말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였다(딤후 4:7). 이어서 『이후로는』이라고 말했다(딤후 4:8). 그는 미래를 바라보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오직 오늘을 살며 내일을 고대한다.

③ 불행한 사람들도 과거에 연연한다 . 이들이 과거에 머물기 좋아하는 이유는 현재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참전 용사들 모임에서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옛날" 일들을 말하며 함께 술을 마신다. 한번은 필리핀에 갔을 때, 미 86사단에 속한 필리핀 정찰병 하나를 수소문 끝에 만났는데 그와 옛날 얘기를 한 것은 고작 8분 정도였다. 나는 지나간 옛날 얘기를 되풀이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사람들 중의 90%가 60세를 넘긴 노인들이다. 관련 잡지나 여행가이드에는 세련된 옷매무새를 한 젊은 남녀들이 도박판에 앉아서 술잔을 들고 웃고 즐기는 사진이 실려 있지만, 실제로는 결혼한 지 40년 이상 된 노인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이 값싼 모텔에 묵으면서 슬롯머신에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카지노에서는 이들 노인들이 젊었을 때 좋아했던, 소위 몇몇 "스타들"을 불러서 그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 그들 역시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삶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는 행복하다. 난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과거에 관한 한 적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좋다. 필자는 "과거" 구원받기 전에 무척 좋아했던 "스윙" 밴드의 리더 "아티 쇼"의 음악을 담은 30분 분량의 CD를 아직도 갖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그의 음악을 들으면 "과거"처럼 재밌지가 않다. 나처럼 성경에 많은 시간을 쓰게 되면 과거와 조우할 수 없다.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며, 전도지를 나눠 주고,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고, 청소년 캠프에서 설교하며, 거리에서 복음을 외치다 보면, 과거의 생활이나 친구들과는 전혀 만날 수 없게 된다. 성경이 내 주위에 장벽을 두른 것이다.

왜 사람들은 과거에 머물기를 좋아하는가? ① 지나서 보면 과거는 장밋빛으로 채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 멀리서 보면 다 괜찮아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땐 말이야..." 하면서 운을 떼는 것이다. 나 역시 소싯적을 기억하는데, 그때도 세상은 정말 사악했다. 문제는 우리 기억이 과거를 실제로 그러했던 것보다 더 좋게 채색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시골에서 살았다면, 푸르른 초원과 봄에 새들이 노래하던 아침과 어머니가 해 주시던 시골 음식을 생각하며 종종 향수에 젖고는 하지만, 허리가 부러져라 집안일을 했던 것이라든지, 몇 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던 것, 어둑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가축에게 먹이를 주면서 생고생을 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② 사람들이 과거에 연연하기 좋아하는 이유는,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 이런 사람들은 항상 과거에 자신이 어떠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필자는 이렇게 묻는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소?" 한 간부가 판매 사원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주에 큰 '대회'가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 가장 많이 판매하는 사람은 그 보상으로 해고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③ 과거에서 살기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과거 일과 연관해서 자신을 높이고 싶은 성향 때문이다 .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과거에 자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다고 자랑할 때마다, 당신은 사람들의 주의를 당신 자신에게로 끌고 있는 것이다. 듣는 이들이 그 당시에 살았든 살지 않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때 자문해야 할 질문이 있는데, "과연 내가 지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을 세워 주고 있는 것인가?"이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해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에게 도전을 주기도 하고 위로와 격려를 줄 수도 있다. 『우리 가운데 각 사람은 선을 위하여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세워 주자』(롬 15:2). 즉 세우는 데 좋은 것만을 말해서 자기가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쳐야 하는 것이다(엡 4:29). 누구나 경험을 통해 배우기 때문에, 과거 경험이 세워 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훈도 된다면 좋은 것이다. 즉 과거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하는 당사자 자신이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의 결과는 어떠한가? ① 현재를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 우리가 열심히 살 수 있는 날은 "하루"밖에 없는데, 바로 "오늘"이다. 어제도 내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밥 존스 시니어는 "옳은 길을 따라가면 올바른 목적지에 도달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마 6:3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과거에 연연한 것 때문에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참호 전투"만을 기억하여 독일군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고, 이에 동쪽 국경을 따라서 한층 강화된 참호 방어선(마지노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그 방어선을 우회하여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과해서 침공했고 48시간 내에 프랑스 내부로 진입했다. 프랑스는 과거 제1차 세계대전에 사로잡혀 있었던 반면, 히틀러는 그때처럼 마지노선에서 정면 공격을 감행하여 긴 참호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히틀러도 과거에 집착함으로써 패배하고 말았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때처럼 너무 늦게 공격함으로써 전쟁은 겨울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뒤 스탈린그라드를 요새로 삼으려 했으나 계속되는 폭격으로 요새로 삼겠다는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 역시 과거에 집착했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사는 것은 현재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기만당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아첨"과 "우정"을 성령의 열매로 착각하며 『이익이 경건』(딤전 6:5)이라고 여긴다. 현대 미국의 기독교 방송들은 현재 기독교계 상황이 어떠한지, 자기 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집단들이다. 항상 그들은 성령께서 미국을 휩쓸어 버리실 만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했지만, 현재 미국은 지옥만큼이나 사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이 "강력한 부흥"이니, "성령의 역사"이니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뒤쪽도 앞쪽도 우리가 설 수 있는 입지 조건이 못 된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가 설 수 있는 최적의 입지가 된다. 과거나 미래를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성경 예언들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소위 "예언 전문가"란 자들은 그 예언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많은 시간을 거기에 허비해 버렸다. 또한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D.L. 무디, 빌리 선데이를 통해 일으키셨던 부흥들에 대해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것도 헛짓이다. 당신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고 있다. 무디와 선데이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없어서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② 과거에 집착하면 교만하고 육신적인 사람이 된다 . 이런 사람들은 자리를 펴고 앉아서 과거에 이룬 어떤 위대한 업적이나 승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참전 용사들을 구령하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내심 "당신이 뭔데 그래? 당신은 내가 경험한 걸 경험해 보지 못했잖아!"라고 여긴다.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③ 과거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 간에 불화를 조장한다 . 나는 이러한 현상을 1951년과 1952년 사이에 밥존스대학교에서 보았다. 나는 밥 존스 시니어를 좋아했고 또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한번은 그의 메시지에서 밥존스대학교를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메시지가 그 학교에 관한 것이 되었고, 학생들은 자신의 모교가 하나님인 양 착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다니는 지역 교회에 충실하지 못했고 모교에 충성을 바치고 말았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오실 수도 있다! 과거에 필자는 주님께서 이때쯤 오시지 않겠는가 하고 짐작한 적이 있었다. 물론 주님께서 지금까지 오시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고대하고 있다. M.R. 디한이 말했듯이 "어쩌면 오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뤘든지 혹은 얼마나 크게 넘어졌든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오늘 주님을 위해(고후 5:15) 앞을 향해 나아가라!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야 할 시점도 바로 "오늘"이다.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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