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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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고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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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5월호>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끝마치고 내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일을 전혀 개의치 아니할 뿐 아니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행전 20:17-35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별 설교”다. 특히 25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난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쫓아가야 한다. 그러나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진전했는가를 점검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곧 죽음과 세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간에 사람은 죽고 정부는 세금을 거둬들일 것이다. 한 가지 추가하자면 하나님의 심판 또한 확실하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이상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보다 더 확실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오늘 오실 수도 있고 내일 오실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오늘 분명히 정부에 세금을 납부할 것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서 심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1초에 2명, 1분에 105명, 1시간에 6,316명, 하루에 151,600명이나 죽는다고 한다. 이 한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이미 18명 정도의 사람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본지에서는 나의 삶과 사역을 뒤돌아보면서 내가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째, 나는 최종권위로 성경만을 드높이려고 노력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굳게 세워 줄 것이며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라』(32절). 바울은 그의 회심자들을 하나님과 그분의 성경에 의탁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죄 없는 구주가 되어 주셨듯이, 나에게는 “오류가 없는 책”(성경)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성경의 권위보다 높인 적이 없다. “헬라어 원문”이나 “히브리어 원문”이 최종권위라고 암시조차 준 적이 없다. 우리 신학교 학생들에게 나 자신이나 학교가 최종권위라고 가르친 적도 없다. 우리 학생들은 졸업할 때면 각자 자신의 손에 최종권위를 가지고 떠나는데, 곧 권위를 인정받은 <킹제임스성경>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에게나 학교에 보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자들은 ASV, RSV, NASV, NIV, 리빙바이블, NRSV, NLT, 굿뉴스바이블, ESV 등이 더 낫다고 하지만, 내가 일일이 점검해 본 바에 의하면 이런 번역본들은 쓰레기들일 뿐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음의 구절을 비전으로 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숨겨 두지 않고 보여 주었으며 또 집집마다 다니며 너희에게 드러나게 가르쳤으니』(20절).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병원과 학교, 요양원, 직장, 동네, 거리 등지에서 주님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게 두려워서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 나머지는 그저 게을러서 전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교회의 침례탕에 쓸 그림을 그리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버스를 운전하면서 전파한 적도 있으며, 비행기에 동승한 승객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 항상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주님을 위해 신실하게 복음을 전파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할 날이 곧 올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저 직장에서 일을 하고 가족을 돌보고 취미생활을 하며, 청구서들을 처리하고 쇼핑하는 데만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날이 오게 된다. 언젠가는 심판의 날이 되어서 당신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당신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아서 지옥으로 던져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안타까워해도 소용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할 때인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인위적인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지원하도록 격려했다. 나는 독자들이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이나 선교 헌금이 아니라 “선교사들” 그 자체에 관심을 갖길 원한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되, 단순히 “모든 선교사들을 축복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기도하지 말고, 선교사들 각각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에는 호화로운 건물이나 시설이 없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지원하는 데 돈을 쓰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로 떠난 훌륭한 감리교 선교사 멜빌 콕스는 이렇게 말했다. “약 천 명의 선교사가 희생되었을 때에나 아프리카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십시오!” 나이도 많고 병도 들어서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 했던 인도의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가 어느 대학교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대신할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무도 그 초청에 반응하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다시 가겠소!” 그때 어떤 학생이 “목사님은 병들어서 거기 가면 죽기만 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자 더프는 이렇게 호소했다. “그래도 나는 그곳으로 가서 갠지스 강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와서 죽을 만큼 그들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할 것이오!”

넷째,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려고 노력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이리들이 양 무리 안으로 들어와 그들을 흩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회중 안에서도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교회를 분열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29,30절). 바울은 다가올 일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주님께서 오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 아래에 있다(행 1:7). 주님께서는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몇 년 정도 빗나간 시기에 오실 수도 있지만, 이 땅에 남겨질 사람들에게 성취될 예언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은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그들의 악한 죄성으로 인해 성경에 기록된 부정적인 예언들을 반드시 성취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있을 때까지는 중동,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지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 줄 아는가? 『주가 말하노니 악인에게는 화평이 없느니라.』(사 48:22, cf. 사 57:2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비가 올 경우 전쟁은 실내 체육관에서 열릴 것이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끝날 줄 모르는 “전쟁”인 것이다. 앞으로도 세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계 6,19,20장).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영적 전쟁을 성도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싸움』(딤전 6:12)을 싸워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딤후 2:3) 내야 한다. 우리는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원수로 참전했던 “미쉘 네이”처럼 싸워야 한다. 영국군이 그를 생포했을 때, 그는 이미 네 번째 말을 타고 싸우던 중이었고, 영국 보병들이 말을 탄 그를 공격할 때 가했던 총검 자국으로 그의 전투화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한쪽 눈마저 잃었고, 그의 코앞에서 발사된 총탄들 때문에 그의 군복은 화약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검을 휘둘렀고, “이놈들아! 프랑스군의 원수가 어떻게 죽는지 와서 보거라!”라고 말하면서 영국군을 향해 호통쳤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면, 생명을 내어놓기까지(계 2:10) 끝까지 싸워야 한다.

다섯째, 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가지도록 노력했다. 대개 이들 학자들의 주장은 들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는 야생 나귀의 소리 정도로 취급해도 된다. 즉 그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경우 그렇게 여겨도 되는 것이다. 학자들이 무슨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니, “언어학적 발전”이니, “과학적 발견”이니 하면서 떠들어 댄다 한들, 그것은 성경 말씀 단 한 줄을 해석하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벧후 1:20).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벧후 1:21) 직접 나아가서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고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방법(고전 2:13)이 그 어떤 발견이나 원어 사전이나 과학 교과서보다도 훨씬 나은 것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역사적 발견”으로는 결코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원한다면 얼마든지 책을 읽으면서 공부할 수 있고, 또 성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책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거스르는 책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빌리 선데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경과 학자들이 서로 말하는 것이 틀리면, 학자들이 마귀와 한편인 것이다.”

여섯째, 나는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하려고 애썼다. 성도에게 하늘나라를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밖에 없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파괴적이고 악한 일들을 밝혀내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이 땅은 본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 마음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골 3:2). 물론 이곳 지상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긴 하다. 가을이 되면 종종 칼 래키의 초청을 받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집회를 갖곤 했다. 가을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의 교회에서 인상 깊었던 한 가지가 있다. 즉 그곳 성도들은 항상 하늘나라에 관한 찬송을 불렀다는 점이다. 나는 설교 초청을 받아 미국 전역을 두루 다니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실제적인 장소로서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죽을 때가 가까워질수록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 적어지고, 하늘나라가 보다 더 실제적인 장소로 마음에 와 닿아야 본향으로 떠나기가 쉬운 법이다. 내가 죽을 때가 되어서 힘들어 하는 것을 보거든, 여러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되, 심지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하나님께서 내게 실제적인 분이 되어 주시고, 또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기도해 주기 바란다. 내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아는가? 나는 하나님 한 분만을 원한다. 나는 동일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을 원한다!”라고 소리치고 싶다.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거든 위를 쳐다보라! 슬픔과 자기 연민 속에서 뒹굴지 말라!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기뻐하면서 죄인들이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또한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라!

마지막으로 유일한 구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려고 노력했다(24절). 60년 이상 사역하는 동안 나는 그 어떤 설교에서도 구원과 관련하여 행위들을 강조한 적이 없다. 심지어 우리 교회의 방문자들에게 초청을 하면서 복도를 통해 앞으로 나와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물론 죄인들이 앞으로 나와서 구원받는 것을 보기 원하지만, 교회 의자에서든지, 화장실에서든지, 주차장에서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든지, 그 어디에서라도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욕실에서 변기를 제단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기도하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의 간증도 들어 보았다. 나 또한 거리설교를 하다가 어떤 남자가 하수구에서 구원받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처럼 언제 어디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카톨릭 성사들, 침례, 교회나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의지하고 있다면 지옥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

구원의 길은 단 하나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이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신뢰하는 것이다. 옛날 미국의 시골 학교에는 건물 하나에 선생님도 한 분밖에 없었다. 선생님 한 분이 전교생에게 필수 과목들을 가르치고 아주 매서운 매로 학생들을 훈계했다. 어느 날 한 가난한 소년이 뭔가를 잘못해서 매를 맞아야 했다. 소년은 낡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엉덩이를 때리려고 코트를 벗기니까 셔츠도 입지 않은 상반신이 맨살 그대로 드러났고, 멜빵도 낡은 바지에 달아서 맨살 위에 걸치고 있었다. 하반신도 속옷이 없어서 달랑 낡은 바지만 입고 있었다. 그 소년이 매서운 매를 견딜 수 없을 것을 알았던 한 고학년 형이 자기가 대신 맞겠다고 나섰다. 선생님은 허락했고 그 형은 모질게 맞았다. 그날 내내 어린 소년은 그 형 옆에 앉아서 형이 맞은 상처로 아파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신음을 들으면서 소년은 마음이 찢어지고 너무 미안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이다. 우리가 맞아야 하는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신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의 희생을 무시해 왔다면, 이제라도 부끄러운 줄 알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구주를 위해서 살지 않았다면(고후 5:15) 깊이 반성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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