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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할 수 없는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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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 설명하자 펠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이제 그만 가라. 적절한 때가 오면 내가 너를 부르리라.”고 하더라』(행 24:25).로마 총독 펠릭스는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들었지만(행 24:24) 결국 구원받지 못했다. 그는 구원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다가 도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성경의 여러 인물들 중 하나다. 아그립파처럼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가 결국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미국인들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교훈적으로 배울 수 있다.
우선 펠릭스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복음을 들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미국도 아주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전파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을 수는 있다. 고린도전서 15:3,4에 나오는 은혜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 대부분은 그들의 생애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인가 복음을 듣게 된다. 특히 노스캐롤라이나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앨라배마 주, 플로리다 주 등의 남부 지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북군은 “남북전쟁”(1861-1865)에서 이겼지만 영적으로는 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북부에 사는 사람들이 남부로 내려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다. 남부 사람들은 전쟁에 져서 재정적으로 완전히 거덜 나고 말았지만 성경만큼은 계속 붙들었다. 그로 인해 어떤 남부 사람은 다섯 살 때부터 일 년에 두 번씩 부흥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또한 펠릭스는 더 알고 싶어 했다. 사도행전 24:26을 보면 펠릭스가 사도 바울을 더 자주 불러서 함께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에게서 뇌물을 받을 심산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만, 바울과 대화하면서 그가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듣는 것도(행 24:24) 즐거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파되는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음에도(롬 10:17) 구원을 받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 역시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회심하지 않고 있다. 펠릭스가 궁금해했던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이런 모습과 관련하여 『항상 배우나』(딤후 3:7)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미국인들에게도 해당된다. 많은 미국인들이 교육을 우상시하면서 이런저런 대학에 다니느라 시간을 쓰지만, 정작 오늘날의 대학들은 마약과 음행과 술이 성행하는 범죄 소굴이 되어 버렸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가장 광범위한 정보 통신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하면서 이전의 어떤 세대들보다도 스스로를 더 똑똑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데, 우스운 것은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사람들은 더 멍청해진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펠릭스는 사도 바울을 크게 존경했다. 그래서 그를 계속 불러다 앉혀 놓고 같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설교자와 그의 설교는 분리할 수 없다. 펠릭스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다. 펠릭스 자신도 남자였기에 바울이 “진짜 남자다운 사람”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 “걸출한 인물” 하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바울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가 전파하는 말씀을 유심히 들었다. 그러나 바울이 전파한 말씀대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설교자가 곧 설교다. 빌리 그래함을 예로 들어 보자. 많은 설교자들이 빌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 빌리 그래함도 전천년주의 신앙을 가진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배교한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초창기의 빌리 그래함과 배교 이후의 빌리 그래함은 같지 않다. 그는 “저는 모든 교회들을 대표합니다.”라고 설교한 적이 있다. 그러면 안식교, 로마카톨릭,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도 다 대표한다는 뜻이 되는데, 다시 말해 빌리 그래함은 타협한 배교자가 된 것이다. 또한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했던 말처럼 지옥은 실제적인 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 눈을 들어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가 그의 품에 있는지라. 그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라고 하니』(눅 16:22-24). 『그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 25:41).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4,15).
이상 세 구절은 서로 다른 “세 가지 경륜”에 관한 구절들이지만, 모두 지옥이 문자 그대로 불타고 있는 장소라고 천명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은 처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구령자였다가 그 이후에는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이 되어 버렸다.
바울은 펠릭스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절대적인 기준만을 선포하며 도덕적인 진리를 전파했다. 즉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행 24:25) 전파한 것이다. 바울은 “상황 윤리”나 “상대적인 진리”를 전파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과 달랐다. 그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사이에서 분명하게 선을 긋는 강력한 설교를 했다. 그래서 펠릭스가 그 설교를 들었을 때 떨었던 것이다. 펠릭스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든 것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으니, 펠릭스가 두려움에 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틀리다. 무게와 치수에도 기준이 있고, 의사들과 변호사들도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인간이 세운 기준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는 기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도 그분의 절대적인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기반으로 하는 기준이 있다(출 20:3-17).
그런데 펠릭스가 바로 그 기준을 듣게 된 것이다. 법을 무시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50층 이상의 고층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사람은 중력을 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15층 지점에까지 떨어졌을 때 ‘아직도 바닥에 충돌하지 않았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착각은 오래가지 못한다. 얼마나 똑똑하고 교육을 많이 받았든지, 얼마나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든지, 정치적인 성향은 무엇이고, 또 무슨 종교를 믿고 있든지 간에,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면 반드시 무시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법을 위반한 대가는 절대적이며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의 법을 위반하면 불타는 용광로에 떨어져야 한다(마 13:49,50). 빌리 그래함이나 교황이 뭐라고 말하든지 상관없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전파한 것이며, 펠릭스는 그 말씀에 벌벌 떨었다.
물론 바울은 펠릭스에게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과 그것을 위반한 대가를 설교했을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증거했기 때문이다(행 20:21). 어떤 옛날 찬송가에는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죄인을 위해서 “여기에 길르앗의 유향이 있다.”라는 가사가 쓰여 있었다. 즉 죄인을 싸매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께서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롬 5:6).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지만 우리와 달리 죄를 짓지 않으셨다(히 4: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벧전 1:18,19, 요 1:29, 갈 4:4,5).
마호메트는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슬람교에는 “구속”이 없다. 그들의 신은 자기 피조물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나는 감옥에서 형을 사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수십 명의 흑인 이슬람교도들을 만났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선지자 마호메트가 당신을 위해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개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지자께서 진리와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되묻곤 했다. “제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선지자가 실제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질문이 무슨 말인지 “정말로” 모르기 때문이다. 구속에 관한 한, 알라나 마호메트는 그 어떤 이슬람교도를 위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시자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사람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나니』(요 15:13). 나의 구주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이 말씀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전에는 내가 그분의 친구가 아니라 그분의 “원수”였기 때문이다(롬 5:6-10). 우리가 본래 의로운 존재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잘못된 사악한 죄인이었을 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아무리 알라와 같은 “가짜 신”을 만들어서 성경의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속성들”을 그 신에게 인위적으로 부여한다 할지라도, 알라가 죄인들을 동정하는 자애로운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동은 말보다 더 웅변적이다!
펠릭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 들었다. 바울의 설교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도 큰 백보좌 심판에 서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당신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당신도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대의 죄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린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 듣지 못한 이교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걱정하지 말라! 이교도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롬 10:18).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인디언들은 “자연”을 통해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롬 1:20), “양심”을 통해 자신이 그 창조주에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롬 2:14,15).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시어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아메리카 인디언이든, 중국인이든, 아마존 원주민이든, 에스키모든,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듣기를 원하는 그 누구에게라도 그에 관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행 10장).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죄인에게도 비난받을 일을 하시지 않는다(롬 3:3,4).
오늘날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문제점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들었음에도 거절했다는 데 있다. 펠릭스 역시 바울에게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들었다. 그것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렸다. 환경적으로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인이라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때까지 복음을 듣지 못할 수 있다. 나도 27세가 될 때까지는 한 번도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은 자라오면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캐럴 안에도 복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어떤 설교자가 라디오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지만 곧바로 꺼 버렸다. 군복무 시절에는 해외로 파병되기 전에 장모가 성경을 선물로 준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한번은 필리핀에서 중대장이 내게 성경을 통해 무언가 진리를 말해 주려 했을 때, 나는 대뜸 그에게 “저리 치워요. 그 책은 거짓말투성이예요!”라고 하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하나님의 복된 말씀인 성경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비록 내가 1949년 3월 14일 이전에 죽어서 지옥에 던져졌다 해도 나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차 복음의 진리를 들었으나 거절했다. 오늘날 수억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세상의 죄인들이 그렇게 자주 복음을 들었음에도 거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의 길로 정해 놓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회피하면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로 모든 죄들이 씻겼는가? 하나님의 온전한 희생제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는가?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니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너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오 이스라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고 하느냐?』(겔 33:1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