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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같은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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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7월호>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시키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 너희에게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니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12-13).시몬 베드로가 자신의 편지를 읽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 같은 시련”의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 그는 다니엘 3장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겪었던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느부캇넷살이 세운 금상에 경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던 것인데, 그러한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을 “불 같은 시련”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살았던 한 찬송가 작사가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짓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바다를 통해, 어떤 이들은 홍수를 통해, 또 어떤 이들은 불을 통해,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 피를 통해...”
교회사에서 그 “불 같은 시련”이 문자 그대로의 불이었던 경우는 많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폴리캅을 화형대에 묶어 놓고 불로 태워 죽이려고 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도무지 불이 붙지 않아 칼로 죽여야만 했고, 칼이 그를 찔렀을 때 뿜어져 나온 피는 불길을 다 꺼 버렸다고 한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묶고는 기름과 타르를 발라 불을 붙인 다음 자신의 정원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한 조명으로 사용하곤 했다.
로마카톨릭은 암흑 시대 동안 “마녀들”이라고 비난받았던 복음주의 신앙인들을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이나 불태워 죽였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존 후스는 교황이 직접 콘스탄틴 공회를 오가는 동안의 안전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형대에 묶인 채 불태워졌다.
메리 튜더(피의 메리)는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관을 물려받았을 때 존 로저스, 휴 래티머,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니콜라스 리들리 같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을 화형에 처하며 스미스필드의 주변 하늘을 환하게 불밝혔다. 리들리는 사슬로 화형대에 자신의 몸을 고정시키고 있던 사형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친구, (사슬을 화형대에 고정시키는 꺾쇠를 말하며) 아주 세게, 단단히 내려쳐야 할 걸세. 이제 이 몸은 가야 할 곳으로 갈 테니 말이네!” 그의 곁에는 휴 래티머도 있었는데, 나뭇단에 불이 옮겨 붙자 래티머는 리들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들리 형제, 기운 내시오. 그리고 남자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촛불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오.”
베드로가 “불 같은 시련”에 대해서 말할 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암흑 시대(the Dark Ages) 이래로 인간이 다윈의 사다리를 타고 웅덩이에서 낙원을 향해(from puddle to paradise) 단 1인치라도 진보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말라. 실제 상황들 속에서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1999-2011) 힌두교도에서 개심한 인도 목사들 중 많은 수가 산 채로 불태워졌다. 1999년에는 그래함 스타인즈라는 선교사가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자동차에 탄 채로 힌두교 과격파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런 일은 암흑 시대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있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20세기 말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시몬 베드로의 “불 같은 시련”이며 그것은 어느 세기의 어떤 하나님의 자녀에게라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정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비정상이다. 규칙의 예외가 된다는 말이다. 규칙은 다음과 같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어떤 고난들은 아주 심하고 어떤 고난들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우리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의 졸업자들 가운데 하나인 복음 전도자 샘 깁은 학교에서 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그때 의사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 결과 깁 형제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 근 31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내가 브렌트 침례교회에서 사역할 때, 돈 베이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1960년대에 소형차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뒤집힌 자동차에 깔리는 바람에 반신불수가 되어 버려 남은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들을 부양할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십대 소년들이었던 아들들이 일을 해서 그 가정을 부양해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 경기나 데이트나 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말이다.
브렌트 침례교회의 쉘씨 부부는 소중한 10대 아들을 끔직한 자동차 사고로 잃었는데, 그 소년의 시체가 얼마나 심하게 훼손되었던지 그들은 그 장례식을 관 뚜껑을 닫아둔 채로 치러야만 했다. 형제들이여, 이 세상에는 진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설령 이러한 시련들과 환난이 그대에게 닥친다 해도 결코 놀라지 말라. 대개 그런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건지 의아해 하며 멍한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왜 그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는지 알려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왜”는 중요하지 않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 나는 결코 하나님을 탓하지 않을 거야.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귀니까.” 그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마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한 절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욥 1-2장).
사탄이 당신을 뒤쫓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다 이유가 있으시기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때와 기회”가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때(전 9:11),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러한 것들이 지속되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지나친 칼빈주의자나 운명론자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야기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주님께서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행운”이나 “우연,” 혹은 “사고”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리스도께 밀착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바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바르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보상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한 본보기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두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불 같은 시련”이 닥쳐올 때 우리 모두는 불 속의 “네 번째 사람”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단 3:25). 새로 나온 “성경들”은 그 구절을 변개시켜 당신이 “불 같은 시련”을 통과할 때 그분을 찾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시몬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4:13에서 만일 당신이 “불 같은 시련”을 통과할 때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 중 얼마는(나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난을 겪게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잔뜩 인상을 쓰고 이를 악문 채 그것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소와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글쎄,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 같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주를 위하여 비난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happy”해야 하고,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happy”할 수 있다(벧전 4:14). (역주 : 여기서 “복이 있는”이라고 번역되는 영어단어 happy는 또한, “행복한”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양로원에 있는 솔터 부인(지금은 돌아가셨지만)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25년간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녀가 패배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갈 때면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이런, 안녕하세요? 피트 형제!” 그 다음 나는 이렇게 묻곤 했다. “솔터 부인, 승리하셨나요? ‘주님께 찬양을!’ 하고 말씀해 주셔야죠!” 그러면 그 자매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주님께 찬양을!” 그녀는 내가 이제껏 알아온, 냉난방이 되는 교회의 푹신한 방석이 놓인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양호한 건강상태의 그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현재 지속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며, 설사 그가 내일 자살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한마디라도 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그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항복해 버릴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형제들 중 몇몇이 겪었던 일들 중 어떤 것들은 나로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것을 통과하게 해주실 수 있다고.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거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고후 12:9-10).
사랑하는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어떤 두려운 시련을 통과해 가고 있다면 내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즉 당신은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성경은 당신이 그것을 통과해서 가는 동안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과 행복은 당신이 선택해야 할 것들이지 결코 나나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선택해 줄 수는 없다.
이제 한 번 봐준다는 의미에서 나는 당신이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모종의 자기연민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당신의 구주께서는 당신을 위해 그보다 훨씬 나쁜 것들을 겪으셨고,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히 12:2) 그렇게 할 수 있으셨다. 우리 모두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남겨 놓으신 한 『본』을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벧전 2:21).
레스터 롤로프는 “조금만 더 견뎌내세.” 하는 찬송을 부르곤 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시거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때까지 “견뎌내자.” 그분께서 우리를 하늘의 본향으로 데려가시는 것(그것이 휴거든지 죽음이든지)이 훨씬 더 나은 일일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 우리는 그 기뻐함을 바로 지금 실천에 옮겨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영광』과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앞선 베드로전서 4:13-14에도 나타나고 있다. 핵심은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구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4:13).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닥치는 엄청난 고난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엡 6:18, 빌 4:6).
베드로전서 4:16에서 우리는 우리가 합당한 이유로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신이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사 53:3)이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받는 고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지구상의 모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이사야 24장, 예레미야 25장, 요엘 2장, 요한계시록 11-13장, 다니엘 11장,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읽을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할 것』(딤후 2:12)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며』(벧전 4:19),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 내야』(딤후 2:3)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