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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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올바로 나누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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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9월호>

『주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자신의 관례에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더라.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드리니 그 책을 펴시고 이같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시더라.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케 하시며,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고 하시고 책을 덮으신 후 그것을 맡은 자에게 다시 주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로 주목되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시어 “이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이루어졌느니라.”고 하시니』(눅 4:16-21).

위에 인용된 본문은 성경 연구에 있어서 한 가지 중대한 원리를 보여 준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거대한 통합된 덩어리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 체계를 완전히 거스르는 법칙이기도 하다. 최근 출간된 새로운 “성서들”은 이 원리를 철저히 혐오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구절들을 모두 변개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 2:15이 그렇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RIGHTLY DIVIDING]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NASV와 NIV는 이처럼 “올바로 나눠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다루다” (accurately handling)나 “올바로 다루다”(correctly handling)로 바꿔 놓았다. 킹제임스성경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전혀 킹제임스성경이 아닌 뉴킹제임스성경(NKJV)은 “올바로 나누어”(rightly dividing)라는 부분은 간직하되, 같은 구절에서 『공부하라[study]』는 명령 자체를 삭제해 버렸다.
하나님은 원래 나누시는 분이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SEPARATED]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신 32:8). 『내가 땅 위에 화평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라, 오히려 분쟁케[DIVISION] 하러 왔노라』(눅 12:51).

속담에도 “울타리가 있어야 서로 좋은 이웃이 된다.”라고 했다. “가교를 만드는 것”이 좋은 이웃을 만드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로 나누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을 올바로 나누신다. 주님께서는 영적으로도 올바로 구분하신다. 주님께서는 또한 그분의 책인 성경에도 올바른 구분을 설정해 놓으셨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첫째, 제자 됨을 구원과 혼돈하지 말라.

지역 교회 회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거든 이렇게 말해 보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시면, 어떤 것의 주도 아니십니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자신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죄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았더라도 다시 “재영접”하게 만들 수 있다. 즉 사람들에게 이렇게 어르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매주 주일 오전과 오후에 교회에 와서 경배드리지 않고, 수요일 기도회에 나오지 않거나, 혹은 십일조를 내지 않거나 교회 버스를 운전하는 봉사를 하지 않거나 주일학교 교사로서 섬기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당신의 인생 주인이 아니신 것이고, 따라서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정말 교묘한 속임수가 아닌가!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관장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시는 것은 제자 됨의 영역에서이다(눅 14:26,33).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아무런 공로나 행위 없이 단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엡 2:8,9). 당신은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구원과 제자 됨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제자 됨은 행위들과 관계되고, 구원은 행위와 전혀 관계가 없다.

둘째, 구약과 신약을 혼동하지 말라.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지 않다. 유언으로서의 새 언약(the New Testam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효력을 발휘한다(히 9:16,17). 즉 사복음서에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시대적으로 여전히 구약 아래서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부인하겠다고(마 10:33) 하신 것은 사도 바울에게 주신 교리와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딤후 2:12,13) 했을 때 그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 아래서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나 메기나 새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레 11장). 그러나 신약에서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딤전 4:4,5).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대적들인 민족들을 대항해서 인종 말살을 할 수 있는 신정통치가 시행되었다(삼상 15장).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롬 12:18).

셋째,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혼동하지 말라.
이스라엘은 물리적인 약속들과 물리적인 제사장들과 물리적인 희생제들이 있는 물리적인 민족이다. 교회는 영적인 약속들과 영적인 제사장들과 영적인 희생제물들을 다루는 영적인 민족이다. 당신은 확실하게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카톨릭이나 다른 이단들과 사이비들처럼 “성수”나 “제의,” “묵주,” “고해실,” “미사,” 교황의 “교서,” “바티칸 시국” 같은 온갖 비성경적인 것들에 속게 된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구분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나라를 의미한다(요 3:5, 눅 17:20, 롬 14:17). 반면 천국은 물리적인 나라를 뜻한다(마 11:12).
다섯째, 휴거와 지상 재림을 구분하라.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믿는 자들을 데려가려고 오시는 것을 말하며(살전 4:13-17), 지상 재림은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심을 말한다(살후 1:7-9).

위와 같이 서로 구분되는 교리적인 진리들은 성경을 공부해야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부하기를 싫어한다. 직장 일, 생활비 마련, 자식들 뒷바라지, 세금 걱정에 너무 바빠서 성경을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책인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들이 언젠가 당신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2:48). 지금이라도 “기말고사”를 대비해서 “벼락치기” 공부라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 안에 있는 구분들은 교리적인 주제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안에 있는 “책들”을 나눠야 한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올바로 나눈다는 것은 단지 성경 안의 책들을 큰 구획으로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오직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바울 서신만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리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물침례를 제거해 버린다. 어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심지어 바울의 “옥중서신”만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약의 교리는 창세기 2장에서도 찾을 수 있고, 솔로몬의 노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말씀들에서도 에베소서 5:22-32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 된 교회에 관한 진리를 예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은 때로 책들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 “구절들”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한 구절 내에서 콤마나 세미콜론을 중심으로 둘을 나누기도 한다. 본 글의 도입부에서 제시한 누가복음 4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원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부분은 이사야 61:1,2이다. 이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자.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초림).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초림). 『온유한 자에게 기쁜 소식들을 전파하게 하셨음이라』(초림). 『그가 나를 보내심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싸매고,』(초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초림). 『갇힌 자에게 감옥이 열림을 선포하며,』(초림).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시고 더 이상 인용하지 않으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2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 이 부분부터는 재림에 있을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복수하시지 않았다. 바로 여기 이사야 61:2의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의 끝에 찍혀 있는 “콤마(,)”에 “2,000년”이라는 시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유사한 예를 하나 더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창세기 49:10,11을 보라.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오실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재림 때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11절을 주목해 보라. 『그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그의 나귀 새끼를 선별한 포도나무에 매며,』 여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승리의 입성을 하신 사건을 말한다(마 21:4-11). 하지만 이어지는 부분인 『그의 옷들을 포도주로 빨고 그의 의복을 포도의 피로 빨았도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재림으로 오셔서 UN의 2억의 군대를 발로 짓밟으심으로써 그분의 옷이 피로 물드는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사 63:1-4, 계 14:18-20; 19:13). 즉 성령님께서는 창세기 49:10에서 “재림”을 다루시다가 11절 상반절에서는 다시 “초림”을 다루시고, “콤마(,)” 이후에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다시 “재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를 하나 더 보길 원한다면 창세기 49:24을 보라.

『요셉의 활이 더욱 강하고 그의 손의 팔이 야곱의 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통해 강해졌으니, (거기에서 목자,』 여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선한 목자로서 오신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하지만 다음 부분을 읽어 보라. 『곧 이스라엘의 돌이 나오도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니엘이 예언한 것처럼 재림 때 이방 왕국들을 부수는 “돌”로서 오심을 보여 준다. 『왕께서 보셨는데,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이 철과 진흙으로 된 그 형상의 발을 쳐서 산산이 부수니, 그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함께 산산이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쭉정이같이 되어 바람에 날려 사라져 간 곳이 없어졌으며, 그 형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상을 가득 채웠나이다』(단 2:34,35). 『이들 왕들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넘겨지지 않을 것이요, 도리어 그 왕국이 이 모든 왕국들을 쳐부수고 멸하여 영원히 설 것이니이다』(단 2:44). 이처럼 창세기 49:24은 초림과 재림이 콤마 하나로 나눠져 있다. 이런 경우는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나온다.
『“이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이루어졌느니라.”고 하시니』(눅 4:21).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17-21에서 재림에 해당하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중단하심으로써 그분께서 인용하신 부분만 초림 때 성취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세대주의자”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해야 함을 친히 모범적으로 보여 주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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