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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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의 핵심 원리, 이중 적용(Double Application)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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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4월호>

성경을 심도 깊게 연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의 모든 구절을 세 가지로 적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역사적인 적용이 있다. 성경의 한 본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교리적인 적용이 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러한지 혹은 아닌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교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교리는 항상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리적인 적용은 항상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특히 계보나 명단이나 장소를 나열하는 본문들에서는 특히나 어렵다. 그러나 그런 본문에서도 교리적인 적용이 있다. 셋째로 성경은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곧 성격상 교훈적이며 실제적인 적용이다. 이는 성경에서 교리적으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본문들에서도 그 본문을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곧 구약과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다루는 본문들에서 영적 적용을 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교리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다는 점을 잊지 말라(딤후 3:16).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인데, 모든 문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을 다루는 구약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반복적으로 초림과 재림의 두 번의 오심이 그 중간의 시간 간격 없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2,000년의 간격이 있다. 두 번의 오심 사이에 있는 간격은 바울이 나타날 때까지 계시되지 않았다. 이 기간을 우리는 교회 시대라고 부르며, 구약에 예표로는 제시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바울에게 계시해 주실 때까지 이 교회에 관한 계시는 감추어져 있었다(갈 1:12, 엡 3:1-6). 이렇게 행하신 이유가 있는데, 사실 한다 하는 신학교나 신학원의 교수들도 이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다. 주님께서 이렇게 해 놓으신 이유는 만약 유대인들이 부활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교회 시대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구약에 나타나는 교회를 상징하는 명확한 예표들은 (곧 이브, 솔로몬의 이방인 신부, 요셉의 이방인 신부 등은) 예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칼빈은 이런 깊은 지식을 알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일어날지 아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은 변경될 수 없었다(immutable)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곧 숙명론이다.
이 말을 새겨들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기회 아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도 아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두 경우를 모두 아우르도록 상황을 정해 놓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어제 죽었다면 혹은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둘 다 아시며, 두 경우 모두에 대해 환경을 예비해 놓으셨다. 이쯤에서 “어디서 이런 지식을 얻으셨어요?”라고 묻고 싶은 이가 있을 것이다. 성경을 펼쳐서 사무엘상 23:6-13 본문을 읽어 보라.
성경의 하나님은 칼빈의 신보다 그 전지하심이 적어도 10배 이상 위대하시다. 칼빈의 신은 고작 자신이 창세기 1:1 이전에 판결한(작정한)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알 뿐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계신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한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딤후 2:15). 위에 서술한 진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될 때까지 기도하면서 사무엘상 23:6-13을 읽고 곱씹어 보라.
이것이 사도행전을 여는 열쇠요, 대환란을 깨닫는 열쇠며, 신구약을 이해하는 열쇠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한꺼번에 언급된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다(마 11:11-14).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엘리야가 되지 못했다(마 17:11-12).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종려주일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마 21:5), 이는 재림이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슼 9:9과 그 문맥을 보라. 예루살렘 입성을 말하는 9절은 10,14,15절의 명확하게 재림을 말하는 구절들과 하나의 본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재림이 일어나기 위한 모든 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님은 『왕』으로서 『왕의 도성』에 오셨으며 이방인 총독 또한 주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했다(요 19:19-22).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십자가로 재림이 연기된 것은 아니었다. 구약에서 초림과 재림은 함께 언급되며, 이는 주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을 때 휴거가 그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뜻이다(욥 37장, 사 26-27장, 시 50편). 사도행전에서 휴거가 일어날 수 있었으며(사도행전 7:56의 주석을 보라), 그랬더라면 스스로를 매달았던 유다가 적그리스도로 다시 나타났을 것이다(요 17:17, 살후 2:3). 그렇다면 다니엘의 70째 주가(단 9:24-27)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42개월이 다니엘의 70째 주의 전반부였다면) 다니엘의 70째 주의 후반부가 그때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70째 주의 후반부 42개월이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곧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위에서 말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독자들이 이해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든지 그것을 감안할 수 있도록 전체 구약을 이중적인 구조로 구성해 놓으신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영원한 판결(작정)”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약의 예언들이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들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과 장로교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그들의 신학으로는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이 직접 성경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초림과 재림이 함께 나오는 본문들을 제시할 것이다. 어떤 곳은 구절 표시가 바뀌면서 초림과 재림이 나눠지고, 어떤 본문은 한 구절 안에서 구두점을 기준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적그리스도의 출현까지 세상의 역사가 왜 이렇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왜 로마카톨릭은 그들이 유대인들을 대체했다고 여기게 되었는지, 왜 유대인들이 결국에는 소망을 잃어버리고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는지 설명한다.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오심 중에서도) 재림이었다. 그들은 “정복하시는 왕”(재림)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고난받는 종”(초림)이었던 것이다. 구약에는 이 두 번의 오심이 함께 제시되기 때문에 만약 산헤드린이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재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재림은 마침내 2,000년 뒤로 연기된 것이다.
이제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을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라고 불러도 좋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초림과 재림 모두를 다 다루며, 두 번의 오심 모두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시는『유대인의 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마 6:10), “그 왕국이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 6:13).
이 구절들을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것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령께서 독자들에게 조명을 주실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간의 절대 자유의지와 더불어 작용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들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시키실 과정을 결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제자들에게 아무도 주님이 오시는 날과 시간을 알 수 없으며 인자이신 주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신 것을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는가?(막 13:32) 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어떤 선택을 해도 재림에 관한 메시야 예언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설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날짜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 하지 말고, 앉아서 차분히 필요하다면 며칠간 두고두고 공부하고 생각해 보라.
이제 이중 적용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제시한다. 초림과 재림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호세아 2:23; 3:4-5, 이사야 53:10; 40:1-5, 아모스 9:11-12, 예레미야 애가 4:20, 베드로전서 1:11, 하박국 2:3-4, 미카 5:2-3, 창세기 49:10-11,24, 누가복음 21:24 등이다.
좋은 예가 있다. 시편 2편을 펴 보라. 시편 2:7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나오고, 그 뒤로 8-12절에는 천년왕국의 통치가 나온다. 베드로는 1-3절을 십자가 사건에 적용했다(행 4:25-28). 그런데 4-6절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재림으로 돌아오셔서 그의 원수들을 무찌르시고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앉으신다는 내용이다. 초림과 재림이 성경의 같은 장에 나와 있다. 시편 2편을 순서적으로 분석해 보면, 1-3절은 초림, 4-6절은 재림이며, 7절은 초림의 동정녀 탄생, 8-12절은 재림 후의 천년왕국 상황이다.
모든 카톨릭 추기경들, 주교들, 신부들, 교황들, 모든 후천년주의자들, 장로교인들, 침례교인들, 루터교도들도 이 진리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A.D. 90년 이후로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 이해의 핵심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19세기 동안 모든 유대인 랍비들과 지난 1,500년간 로마카톨릭 신부들과 추기경들과 교황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든 돌은 다름 아닌 이 “이중 적용”의 원리였던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 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다음호에 계속>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