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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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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7월호>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 네가 일할지니 네 모든 일을 할지니라. 그러나 일곱째 날은 주 너의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 주가 안식일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0:8-11>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은 “의식법”에 관한 계명이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표적”으로서(겔 20:12,20) “도덕법”을 다루는 다른 계명들과 구분이 된다. 표적을 구하는 민족은 유대인이기에(고전 1:22) 안식일은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교회(고전 10:32)에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도 일곱째 날에 쉬셨고 그날을 복 주시면서 거룩하게 하셨잖아요?”(창 2:2,3)라고 따져 묻는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모세가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후였다. 성경은 『그들에게 주의 거룩한 안식일을 알게 하시고 주의 종 모세의 손을 통해 그들에게 법규들과 규례들과 율법들을 명령하셨으며』(느 9:14)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시내 산으로 온 “유대인들”을 가리킨다(느 9:9-13).
그렇다면 아담이 안식일을 지켰는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일”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에 쉬어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브라함 역시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안식일을 지킨 적이 없었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아담에서부터 모세까지 그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 모두 안식일에 관해 몰랐기 때문이다. 모세의 때에 이르러서야 안식일이 계시되었고,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표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신 이후에야 일어난 일이었다.
현 교회 시대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안식교인들이 상당수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고(막 1:21, 눅 4:16) 바울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행 13:13,14; 17:1,2; 18:4)라고 항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지 않고 “교회 건물”로 간다. 신약에서 안식일을 지켰던 사람들은 회당으로 갔는데, 유대인들에게는 회당이 “경배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회당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율법의 의식과 규례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의 율법은 이미 폐기되었다(고후 3:3,11). 사도 바울이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계명들을 인용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거룩한 삶”이나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롬 13:9). 에베소서 6:2, 고린도전서 8:4-6, 데살로니가전서 1:9, 고린도전서 10:4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의 교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권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명령했다.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유대인에게만 주신 “의식법”에 관한 규례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돼지고기나 메기를 먹는 문제 또는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의 절기나 새 달(삼상 20:5,18,24, 시 81:3, 암 8:5), 안식일 등을 지키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그러한 것들이 사도행전 2장부터 교회의 휴거가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 곧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골 2:17).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날짜 개념에 따라 “일몰부터 그다음 일몰까지,” 즉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이며,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계명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주의 첫날”인 주일에 모여서 경배를 드리는가? 장로교인이라면 “그거야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모이는 주된 이유는 그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부활하시지 않았다(마 28:1-8).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이나 주의 첫날에 제자들과 만나셨다(눅 24:13-49, 요 20:26-29). 성령님께서도 주의 첫날에 강림하셨고(행 2:1-4, 레 23:15,16),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의 첫날”에 교제하고 설교를 들었으며(행 20:7) 헌금도 주의 첫날에 걷었다(고전 16:2).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첫날을 지키는 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라서 그렇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간 것은 유대인같이 됨으로써 더 많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였다(고전 9:20). 다시 말해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곧 안식일에 회당에서 모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회당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모임을 갖기 위해 회당에 간 것이 아니었다.
물론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아닐지라도, 제4계명을 통해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할 만한 영적인 교훈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쉼”에 관한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를 끝내신 후 쉬셨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니었다. “피곤함”을 느끼는 피조물들을 위해 친히 본을 보이셨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가복음 6:31에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나와 잠시 쉬어라.』 “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갤럽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첫 번째는 “너무 많이 먹는 것”이 문제였고, 두 번째는 “충분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필자는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가만히 놔두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들로 사역자를 녹초로 만든다. 그래서 필자는 점심 식사 후에 전화선을 뽑아 두고, 문도 걸어 잠근 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한 시간 정도 쿨쿨 낮잠을 잔다. 이런 습관이 필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로 일주일 중에 하루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 전적으로 드려야 한다는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 “안식일”과 관련하여 그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님만을 드높이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떼어 놓음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사 58:13). 물론 주일에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른 요일들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하루”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요일들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부산하고 그분께 마음을 집중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미국 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주일에 다른 일들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일에 그들은 친척들을 만나며 배 타고 낚시하러 다닌다. 그러면서 “럭크만 형제님, 교회에서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변명한다. 정말 그런가? 낚시하러 갈 때 “기도할 제목들”을 챙겨 가는가? 배를 탈 때 찬송가를 갖고 가는가? 다른 배들로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위선을 떨지 말라! 물고기 잡으러 가는 길 아니던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일이나 지체들의 일 또는 지옥을 향해 가는 죄인들을 염려해서 낚시하러 가는 게 아닌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를 뽐내는 장소가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잘 가르치고 양육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훈련시키는 장소이다.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자랑하려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면 본연의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성도들이 주의 첫날에 함께 모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성도들을 위해 모금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인 “주의 첫날”에 모였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일곱째 날이 아니라 주의 첫날에 모여야 한다. 요리를 한답시고 집 안에 있지 말라. 날씨가 나쁘다고 교회에 가는 것을 꺼리지 말라.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집에 있지 말라.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교회에 가는 것 자체가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야 한다. 즐겁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교회로 자녀들을 데리고 가라. 그렇게 하면 자녀들도 그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다. 구원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필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교회들에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60년이 넘도록 필자는 “함성을 지르면서” 즐겁게 신앙생활했고 지금까지 그 감격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이런 교회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가는 그런 복을 잃어버리기 전까지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 이곳 펜사콜라성경신학원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참된 설교와 참된 찬양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는데, 그들이 졸업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그런 설교와 찬양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들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디즈니월드”에 가 보면 옛날의 미국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지만 거기에는 단 하나의 교회도 없다. 그러나 초창기 미국에는 교회가 많이 있었다. 필자는 교회가 없는 지역에서 살고 싶지 않다. 한 지역에 교회가 50-60개 있어도 이 모양인데, 교회가 전혀 없는 지역은 얼마나 더 사악하겠는가! 과거 미국 개척 시대에 서부 지역이 그렇게 “무법 지대”였던 이유는, 지역 곳곳에 놓인 철도를 통해 일꾼들의 돈을 노리는 사악한 자들이 그곳으로 유입되었어도 교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모여서 설교자를 모셔 오고 교회를 세우고 나서야 상황은 다소 진정될 수 있었다.
성경은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땅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한다. “소금”은 고기를 일정 기간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데 사용된다. 소금이 없는 곳에는 부패가 시작된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있는 지역에는 “부패”가 억제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지역에 “펜사콜라기독교대학”이 있다는 사실을 좋게 생각한다. 덕분에 아이들은 그 학교를 통해 성경에 노출될 수 있고, 그들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꽤 괜찮은 음악을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펜사콜라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우리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신학생들이 4월에서 9월까지 거리 모퉁이에 서서 설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런 사역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건전한 도움이 되는지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출석할 수 있는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있다면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활용하고 그 사역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한 교회 바깥에는 거친 황무지처럼 은사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 소위 “구도자들”에게 맞춰진 예배, 록 음악이나 CCM에 기반을 둔 예배 등의 “현대적인 기독교”만 있을 뿐이다.
구원받지 않은 죄인은 주님 안에서 쉬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주 안에서 쉬라.”(시 37:7)라고 말씀한다.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온전히 신뢰할 때 주님 안에서 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속을 완성하셨을 때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외치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천상에” 앉으셨다(막 16:19).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엡 2:6) 앉아 있다. 주님 안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안식교인에게 안식일에 요리를 해 먹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성경을 열어서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3)라는 말씀을 읽어 주었더니, 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라.』(막 2:27)라는 말씀으로 응수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바탕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 편한 대로 안식일을 부분적으로만 지키고 나머지는 안 지켜도 되는군요. 그렇다면 나도 당신만큼이나 안식교인이겠네요!” 만일 당신이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으려 한다면, 당신은 『온 율법을 행할 의무가 있는 자』(갈 5:3)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을 율법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주일에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다른 요일이라도 쉬는 날로 정해서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등과 같은 국가들에서는 부득이하게 주일에 경배를 드리지 못한다. 주일에 경배를 드리면 “종교 경찰”이 붙잡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온전히 쉬는 시간을 가지라! TV를 틀어 놓고 두세 시간씩 스포츠 경기를 보라는 뜻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완성하신 사역을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라. 그러면 주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