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사 분류
약속 있는 첫째 계명
컨텐츠 정보
- 1,700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 위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 <출애굽기 20:12> 위 다섯 번째 계명을 시작으로 십계명의 나머지 계명들은 사람들 간의 일을 다룬다. 처음 “네 계명”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계명들로서 마음과 지성과 혼과 힘을 다해(막 12:33)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며, 큰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마 22:37,38). 한편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으로 요약된다(마 22:39, 롬 13:8-10).『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출 20:12)은 “유대인”에게 약속된 카나안 땅, 곧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리킨다(신 4:21,40; 18:9; 25:15,19; 28:8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과 달리 유대인들에게 주신 이 명령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번”이나 적용했다(엡 6:1-3, 골 3:20). 이 계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특히 이 계명은 『약속 있는 첫째 계명』(엡 6:2)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유일하게 약속이 주어진 계명이다(엡 6:3). 바울은 이 계명을 따르는 것이 옳은 일로서(엡 6:1)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했다(골 3:20). 물론 세상에는 존경받을 자격이 없는 부모들도 있다. 자녀들은커녕 개 한 마리조차 키울 자격이 없는 어른들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예외는 있겠지만, 자녀들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며 빈둥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기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항상 좋은 본을 보여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녀들은 부모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
우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수의 필수 조건”이다. 시편 34편에서는 『생명을 갈구하고 많은 날들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볼 사람이 누구인가?』(12절)라고 묻고 있다. 장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의 명령들을 수행해야 한다.
① 혀를 악으로부터 지키라(13절a). ② 교활하게 말하는 입술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13절b). ③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라(14절a). ④ 화평을 추구하라(14절b). 한편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주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사, 땅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끊으려 하시는도다』(16절).
“미성년 범죄 사건”을 다루는 한 판사가 십 대들이 죄를 짓다가 일찍 죽는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로 적시한 적이 있다.
① TV와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 ② 가정에 남자 권위자가 없다. ③ 게으르고 직업이 없다. ④ 어머니가 직장에 다닌다. ⑤ 포르노 서적들을 읽는다. ⑥ 너무 이른 나이에 자동차를 운전한다. ⑦ 술을 배운다. ⑧ 신앙 훈련을 받지 않는다. ⑨ 학교에 규율이 없다.
다섯 번째 계명은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공경”이란 무슨 뜻인가? 첫째, 부모님께 존경심을 보여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말라키 1:6에서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제사장들을 향해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쉽게 말해 “너희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도대체 왜 아버지를 향한 합당한 존경심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사람에게 순종하기 마련이다(엡 6:1).
어머니가 자녀인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실 때마다 1달러씩 드려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을 고용하여 그로 하여금 당신의 방을 청소하게 하고, 잠자리를 정리하며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며 당신을 자동차로 학교에까지 데려다 주고 방과 후에는 운동 연습하는 장소까지 데려다 주게 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게 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아는가? 비용이 꽤나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을 것인가? 마땅히 부모를 향한 존경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리 로버트슨” 목사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한 소년이 그가 훈련시킨 애완견으로 하여금 정말 믿기 힘들 정도의 신기한 묘기들을 하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소년은 그곳에 모여든 군중들을 한 시간 동안이나 즐겁게 해 주었다. 쇼가 끝나자 어떤 사람이 소년에게 그 개를 팔라고 제안했다. 소년은 “100달러를 주신다 해도 이 개를 팔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이 개는 묘기를 끝내고 나면 항상 저를 쳐다보는데, 존경심이 깃든 그 눈망울 속에서 ‘나 잘 했죠?’라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꼬리를 흔들어 보여 주는데, 그 행동에는 ‘이제 기쁘시죠?’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를 어떻게 팔 수 있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셋째,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훈계와 징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된다. “아동 학대”는 옳지 않지만, “체벌”은 훈육의 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매를 들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알맞은 때에 징계하느니라』(잠 13:24). 자녀라면 마땅히 부모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미국 뉴욕에서는 강도 사건이 한 해에 89,000건이 일어나는 반면, 일본에서는 400건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일본인들이 “조상에 대한 효와 존경심”을 자주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도하게 공경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보다 조상을 더 숭앙하는 그런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눅 1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것 자체가 범죄 건수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넷째, 부모의 조언을 귀담아듣는다는 뜻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모들이 항상 좋은 본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조언들은 대부분 따를 만한 내용들이다. 시카고에서 십 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십 대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먼저 본을 보여 야 교회에 나갈 수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부모가 설령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자녀에게 “올바른 교회에 다녀야 한다.”라고 권면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훌륭한 조언이 된다. 종종 부모들이 별 볼일 없거나 심지어 나쁘게 보이는 조언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녀들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거의 없다. 마피아들조차 그들의 자녀들만큼은 갱단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자녀들이 성장해서 “존경받는 사람들,” 곧 의사나 변호사 등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의 선친도 구원받지는 못했어도 내게 좋은 조언들을 주셨다. 예를 들면 낯선 사람의 자동차는 타지 말라든지, 모르는 사람에게서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지 말라든지, 그런 식의 좋은 조언들을 해 주셨던 것이다. 한번은 내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을 데리고 뉴올리언스로 가서 보트를 타고 남미로 가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트야, 가령 네가 병사들을 데리고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를 맡겠니?” 아버지께서는 미 육군 대령까지 지내셨던 분이기에 모든 것을 “군대”의 관점에서 생각하셨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너와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네가 어디를 가든지 따를 거다. 그들에게는 네가 신과 같은 존재이니까. 그런데 너는 지금 그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는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실로 훌륭한 조언이었다. 결국 나는 가지 않았다. 당시 그 조언이 나의 생명을 구했고, 그 결과 훗날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를 공경한다면 늙으신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 성경에서 부모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자녀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엡 5:25),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자녀들을 사랑하게 하라고 명령한다(딛 2:3,4).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시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자녀들이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들에 나타나는 타락의 현상들 중 하나는 “무정함”(딤후 3:3)이다. 곧 마땅히 우러나와야 할 “자연스런 애정이나 인정”(natural affection)이 결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녀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감정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부모를 보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노망이 들고 골치 아프게 한다고 해서 부모를 요양원에 내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시절에 부모는 우리를 내버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노쇠한 부모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공경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에게 매를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부모를 두려워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문제를 “덜” 일으키는 자녀들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매를 맞거나 외출을 정지당하거나 자동차 열쇠를 빼앗기는 것이 무척 싫은 것이다. 물론 어머니나 아버지, 특히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면, 그 자녀들은 부모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와 매한가지인데, 곧 태양처럼 작렬하는 용광로를 만드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을 벌벌 떨면서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다(히 12:21). 그런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바보 천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마리아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성호를 욕하는 데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을 감히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죄의 대가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를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완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신 위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누구나 “두 개의 생일”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육신의 아버지가 낳아 준 “육신적인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낳아 주신 “영적인 생일”이다(요 3:5,6).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신가? 언제 당신의 아버지가 되셨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의 영적 생일이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 『말씀하시기를 “기뻐 받아들여진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2).
수십 년 전, 비가 내리는 어둑한 저녁 무렵 펜사콜라 어느 시내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4,5일간 면도도 하지 않고, 셔츠 단추와 신발 끈도 풀린 채로 거리를 배회하면서 미치광이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필요했던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주일 저녁이었고, 비어 있는 한 교회에 무단으로 들어가 기도의 제단에서 약 20분 동안 기도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는 지치고 녹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총을 쏘고 욕하고 사기 치고 속였습니다. 저 역시 거짓말하고 훔쳤으며, 평생토록 사고만 치고 다녔습니다. 저는 춥고 옷도 젖었고 비참한 상태입니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을 가져 본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모르고, 또한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제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떠나온 본향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20분간 기도하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기도가 끝날 때쯤 교회 뒤쪽에서 찬양대가 “만세 반석 열리니”라는 찬송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곧바로 일어나 구원의 확신도 얻지 못한 채 그 교회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한심한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다음 날 휴 파일 목사를 내가 일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국으로 보내 주셔서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그 “본향”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인생의 어둠이 더욱 짙게 엄습할지라도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며 반드시 그곳에 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당신이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면,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가운데 그분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요일 3: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