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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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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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년 월호>

피터 S. 럭크만 / 김진석 옮김

고린도전서 1:30,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네 가지가 되셨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 주님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지혜가 되셨고, 우리에게 죄가 있기에 의가 되셨으며, 우리가 더럽기 때문에 거룩함이 되셨고, 우리가 사로잡히고 속박당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속이 되셨다.

첫째로 살펴볼 요소는 “지혜”이다. 인간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약 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아신다. 인류는 창조된 이래로 지금까지 줄곧 무지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지하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인간은 쉽게 말해서 실패했다. 너무 자명하기에 무슨 증명이나 책을 써서 밝힐 필요조차 없다. 지난 6,000년간 인간은 인류가 당면한 주요 문제들 중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죄와 고통, 가난, 질병의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했다. 소소한 문제들은 개선한 면이 있지만 필수불가결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인간은 여전히 평화를 이룬다는 미명하에 서로를 죽인다. 이것이 UN이 하는 일이다. 6,000년의 인류 역사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의 역사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도 모두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 세상의 군상들은 프리드리히 대왕, 알렉산더 대왕 등을 칭송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위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높이지 않는다.

인간이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라는 것이다. 아담 이래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 열 명을 뽑자면, 마하트마 간디, 마호메트, 아인슈타인, 칼 마르크스, 찰스 다윈, 프랭클린 루즈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조셉 스미스, 부처, 교황(누가 됐든 간에)이 될 것이다. 왜 어리석은지 아는가? 이들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들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며, 위로부터 주시는 진리의 빛이 필요하다. 교육은 인류의 해결책이 아니다. 98퍼센트의 인구가 문맹에서 벗어난 독일이 무슨 짓을 벌였는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밥 존스 시니어가 잘 말했듯이, 구원 없는 교육은 저주일 뿐이다. 교육 받은 인간은 영원한 것 대신 순간의 일들만 염려하며 광기에 지배당해 살다가 무덤으로 간다. 그런 지상의 삶은 단지 70년에서 100년 정도 지속될 뿐이다. 그마저도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렇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그 말은 곧 우리 자신이 불의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는 죄인이기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가 필요하다(롬 3:19). 당신은 주님께 심판받을 때 무언가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죄의 기록이 나열될 때 당신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교도소에 가서 설교할 때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운을 뗀다. “여러분, 나와 여러분의 유일한 차이가 무엇인지 압니까? 여러분은 죄를 짓다가 잡혀 왔지만 나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목사님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여기의 『모든 사람』에 바로 당신도 포함된다. 당신은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요!”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죄인일 뿐이다.

“자기 의”는 인간의 기본적인 성품으로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창 3:19). 나는 정원에서 몸을 구부려 잡초를 뽑고 맨발로 다니면서 일할 때 이 말씀을 자주 생각한다. 나는 흙으로 만들어졌다. 진흙으로는 뭔가를 만들 수 있지만 땅에 흩뿌려져 있는 마른 흙으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체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이전에 죄 많은 죄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함이 무엇인가?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나를 목욕시켜 주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욕조 바닥에 흙이 깔리면 이 개구쟁이의 얼굴을 쳐다보시고서는 어쩔 줄 몰라 하셨다. 구약에는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문둥병자는 헌데 같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하고 더럽다. 그는 윗입술에 덮개를 쓰고 “불결하다, 불결하다.”라고 외쳐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죄들을 묘사하실 때도 『그것들은 봉합되거나 싸매지거나 향유를 발라 유연하게 되지도 못하였도다.』(사 1:6)라고 말씀하셨다. 즉 심한 헌데에서 피가 나오고 반쯤 아문 딱지가 곪아터져서 거기서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더럽고 불결한 모양새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런 상태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가 구원받기 전에 신봉했던 종교에 대해서 『배설물』이라고 불렀다(빌 3:8). 만약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로마카톨릭교도였는데 그런 말을 했다면 과연 신부들이 어떻게 대했을까? 바울이 “내가 전에 가졌던 종교는 인분(人糞)과 같습니다!”라고 했다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더럽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거룩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져야 한다.

넷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구속”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인들은 포로요 노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시 사야 하신다고, 곧 구속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지금까지 수백 명의 수감자들을 보았다. 감옥에 갇힌 자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는데, 바로 그들 모두 “어떻게 하면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에만 골몰한다. 오늘날에는 수감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계속 사슬이나 수갑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풀린 채로 자유롭게 있지만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자기 자신의 악들에 걸리며 자기 죄들의 줄들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잠 5:22). 우리의 본성에 내재된 나쁜 습관들은 그것들을 깨뜨려 버리기까지는 우리를 옥죄고 사로잡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스스로 습관들을 형성한 것임에도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만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36). 사람들은 인류의 자유, 노예 생활에서의 자유 등을 외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34).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설사 우리가 출옥하고 쇠사슬에서는 풀려났다 해도 자유로운 몸이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마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을 때에 비로소 회심할 수 있다. 범죄자들에게만 갈보리가 필요하다. 죄인이 아닌 사람, 죽지 않을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죽을 것을 안다면,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면, 죽음 이후에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없다면 당신은 구원받아야만 한다. 당신도 구원받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범죄자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으나』(사 53:12).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에는 강도들이 있었다. 당신은 “전 훔친 적이 없어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언젠가 감옥에서 “큰 백보좌 심판”에 대한 그림 설교를 하면서 죄들의 목록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중간쯤에 있던 사람이 옆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런 거 안 했어!”라고 하자 옆 사람도 “나도 안 했어!” 하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계속 설교했다. “당신은 마귀처럼 살면서 당신의 어머니가 근심하며 살게 해서 그녀에게서 10년을 훔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 의를 자랑하던 한 죄수가 “저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라고 시인했다. 나는 이어서 “젊은 처녀의 볼에서 순결의 꽃을 훔치지 않았습니까? 수박이나 사과나 앵두도 훔친 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포로가 된 자는 구속당하고 비참하며 헐벗고 눈멀고 향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고향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병사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붙잡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스탈린은 수천 명의 독일 병사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들은 시베리아의 차디찬 눈 속에서 얼어 죽어야 했다. 고향의 푸른 산과 들판, 사랑하는 가족과 좋아하는 음식을 단 한 번도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홀로 죽어야 했던 그들의 포로 생활을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영광 가운데 계시며 황금 저택과 황금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혹자는 “그걸 믿어요?”라고 묻는다. 물론 나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 그곳에는 진주문이 있고 온전하게 된 성도들의 영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며 천사들과 그룹들과 천상의 무리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구부려서 인간을 내려다 보셨다. “사람들이 죄의 포로가 되었구나. 죄에 속박되어 스스로 나올 수 없구나.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풀어줘야겠다!” 이것이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이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케 하시며,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눅 4:18).

사람들은 “럭크만, 당신에게도 감옥이 있나요?”라고 물을 것이다. 바로 내가 지닌 이 몸이다. 내 혼은 이 감옥에 갇혀 죽을 때까지 탈출할 수가 없다. “참 말 같지도 않네요!”라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당신은 썩어가는 시체 속에 있으며, 그 몸 안에 갇혀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 감옥 속에 당신과 함께 탈옥을 할 수 있는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

필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중에 하나가 일본 도쿄 시내의 한 기차역이다. 하루는 새벽 3시경에 죄의 소굴에서 뒹굴며 밤을 보낸 후 장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약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고 몰려들었다. 사방 8킬로미터 안에는 미군 헌병도 없었다. 나는 구석에서 기차에 탑승하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은 일본어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군! 넌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냐. 집으로 돌아가야 해!”

당신은 돌아갈 집이 있는가? 나는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통과해 집으로 돌아왔다. 1949년 3월 14일에 나는 펜사콜라 시내의 팰라폭스에서 라이트 거리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언덕에 한 감리교회가 있었다. 나는 그 교회에 들어가서 약 20분 정도 기도했는데 당시에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나의 지친 마음을 토로할 뿐이었다. “주님, 저는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집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피곤하고 젖었고 춥습니다. 저는 비를 맞으며 방황했습니다. 반쯤 취했고, 반쯤 죽은 상태입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총도 맞았고 욕도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저는 피곤합니다. 집이라는 곳이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교회 건물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그때 찬양대가 어딘가에서 부르고 있던 찬송가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찬송가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만세 반석 열리니”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찬송가였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집, 아름다운 집, 그곳에서 나는 결코 방황하지 않으리! 밝은 그 성의 빛이 빛나네. 나의 집, 아름다운 집.”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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