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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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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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5월호>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관한 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롬 6: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고전 9:21) 있는 자이다. “십계명”은 여전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롬 7:12) 영적이다(롬 7:14). 또한 선행의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을 때 바로 그 선한 일들을 위해 “창조”된 자들이다(엡 2:8-10). 그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그의 서신에서 십계명을 언급했다(롬 13:9, 엡 6:1-3 등). 십계명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신약적인 원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실행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본 글에서는 십계명 중에서 “제2계명”에 관하여 다룰 것이다(출 20:4-6).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베푸느니라』(출 20:6). 문맥적으로(4,5절) 우상을 버리면 하나님의 자비가 수천 대까지 미치게 된다. 사실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시기 전에 그 계명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성경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을 당시에 욥은 『내가 그의 입의 말씀들을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도다.』(욥 23:12)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도 줄곧 사람들에게 말씀해 오셨다. 필리스티아인인 아비멜렉 같은 사람도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와 같은 계명을 모세가 태어나기 300년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제2계명”은 우상 숭배의 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죄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증손자와 고손자에 이르기까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유일한 죄이다.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지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삼사 대까지,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에게 미치게 하고』(출 20:5).

세상 교회들 중에는 제2계명을 믿지 않는 “교회”가 하나 있는데, 곧 로마카톨릭이다. 그들은 제2계명을 제거하는 대신 제10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서 십계명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회” 안에는 우상들과 형상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놋 뱀”을 예로 들어보자.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요 3:14).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피의 희생이 자신의 죄들을 완전히 속죄하였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화목제물”(propitiation)이라고 부른다(롬 3:25, 요일 2:2; 4:10). 이것이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물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들라고 하신 것을 오히려 우상으로 삼았고, “로마카톨릭”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지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새긴 형상으로 만드는가 하면,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앞에서 절을 하기도 한다. 로마카톨릭이 그들의 공식적인 교리 문답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지된 죄이다. 심지어 석가모니도 “신성한 우상 따위는 없다.”라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성경도 모르는 자였지만 그 정도의 지식은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자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톨릭교도들은 “미신적”이다. 그들은 “마리아상”과 같은 형상들이 신성하고 거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우상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한다(고전 8:4). 헛것보다 못한 것들이다!
요즘에는 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크리스토퍼상”을 자동차에 달고 다녔다. 한때 필자도 그 형상을 구해다가 자동차 백미러에 용수철로 연결시켜 거꾸로 달아 놓은 적이 있었고, 빨간불 신호에 정차할 때마다 그 형상을 뒤집어 놓곤 했다. 그때마다 옆 차량의 운전자들은 신성한 형상을 함부로 대하는 필자의 모습을 보고는 죽일 듯이 쳐다보곤 했다. 왜 그런 것인가? 소위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어리석고 멍청한 미국인들이 그 플라스틱 형상 자체에 무언가 거룩한 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톨릭교도들은 “그건 내 신앙이니, 간섭하지 말아요!”라고 할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신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다.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광신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또 훗날 솔로몬에게 성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지시를 내리셨을 때,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룹, 종려나무, 사자 등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들 중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본떠 만들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숭배하지도 않았다. 지성소로 들어가면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자비석이 있으며, 두 그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언약궤도, 자비석도, 그룹도, 그중 어떤 것도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석 위,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로부터』(출 25:22) 유대인들과 만나 교제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자비석 위, 곧 두 그룹 사이에는 그 “어떤 형상”도 없었고, 오직 빈 공간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교제하실 때는 바로 그 공간에 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옮겨야 할 때면 제사장들이 그것을 어깨 위에 “가마”처럼 메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위쪽에는 앉을 수 있는 자리와 덮는 장막 같은 것이 있게 되고 그 아래에는 종들이 메고 가는 장대들이 있어서, 그 위에 누가 앉아서 가든지 간에 종들이 메고 옮길 수 있는 그런 가마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대개는 왕이나 귀족, 지체 높은 양반들, 계급 높은 종교 지도자 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 많은 부자들이 그런 것을 타고 다녔다. 로마에서는 교황도 가마를 타고 다녔다. 늙고 살찐 교황이 가마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언약궤는 좀 달랐다. 유대인 제사장들은 마치 그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처럼 언약궤를 옮겼지만, 그 언약궤를 덮은 청색 휘장을 걷어 내면 자비석 위에 어떤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인가? 하나님은 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요 4:24).



한편 정통 유대인들의 눈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숭배자들로 보인다는 것을 아는가? 필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친구”로 여기고,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한다(시 122:6). 그러나 필자는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사실 현대 유대인들은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말씀들에 순종하지 않으며, 또한 그 말씀들을 믿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즉 종교적인 자유주의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마리아가 창녀였고, 예수님께서 사생아였다고 믿는다(요 8:41). 그러면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우상 숭배자들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사람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또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메시아께서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사 7:14; 9:6, 미 5:2, 슼 12:10 등), 심지어 그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까지 말씀한다(고후 4:4, 골 1:15, 히 1:3).


그렇게 보면 필자는 일종의 “형상에 경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새긴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살아 있는 형상을 섬기는 사람인 것이다(히 10:5, 빌 2:6,7). 필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앞에 절하면서 “의심 많은 도마”처럼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지상에서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을 『참 하나님』(요일 5:20)이라고 부른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딤전 3:16) 아니시라면 이런 행위 자체가 우상 숭배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골 2:9)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분명 신성 모독죄를 지으신 분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요 10:30-33; 19:7).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 형상 앞에 엎드려 절한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의 형상이나 그림, “성체” 또는 “술주정뱅이 신부”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고후 4:4),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히 1:3)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골 2:9)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엡 3:14)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동시에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도 엎드린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높이셔서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하늘이 무너져도 마리아 앞에서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말라!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결국 그 우상을 섬기게 된다. 한번은 해외 오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이교도 우상 숭배자들을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효과적으로 이겨올 수 있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곧 이교도들에게 그들이 숭배하는 신들은 집에 불이 나도 자기들조차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되는 것이다. 그 우상이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제2계명을 어긴 결과는 무엇인가? 그 비극적인 결과는 멕시코, 남아메리카, 스페인, 이탈리아, 필리핀, 인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으니, 곧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인 빈곤이나 정치적인 불안 등이다. 성경은 우상 숭배에 대해 그 어떤 두 개의 죄들을 합쳐 놓은 내용보다 더 많이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들을 혐오하시는데,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삼사 대까지 저주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국가들은 전염병, 가난, 지진, 홍수, 내전 등으로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알라”나 “마르크스” 또는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돈을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미국을 증오하는 이런 나라들은 “이슬람 국가들”이거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들” 또는 “카톨릭 국가들”이다. 우연 치고는 정말로 엄청난 “우연”이 아닌가!


오늘날 어떤 형상의 발 앞에 엎드려 숭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 잡지, 스포츠 팀 등의 발 앞에 엎드려 숭배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현대판 우상 숭배는 다름 아닌 “탐심”이고,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우상 숭배”라고 적시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공통된 목적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런 점에 관한 한 라디오보다는 텔레비전이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큰데, 이는 텔레비전이 우리의 눈 바로 앞에 “이미지” 곧 형상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세대는 텔레비전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할 때에 갖고 싶도록 길들여졌다. 가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한다. 그래서 권위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책임을 지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음이니이다.』(삼상 15:23)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완고함”은 “집요함”과 다르다. “집요하다”는 것은 원하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끈기 있게 한 가지 일을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 목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라면 “집요함”은 좋은 장점이 된다. 한편 “완고함”은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 방식대로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스런 태도”이다. 이것이 우상 숭배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큰 가짜 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 신은 바로 “자아”인 것이다! 집요하게 옳은 일을 하라! 그릇된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집요하게 하라!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000번의 실험을 했다. 누군가가 에디슨에게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999가지 방법을 실패로부터 배웠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계속 시도했고 결국 성취해 내고야 말았다. 찬송가 작가인 윌리엄 쿠퍼(1731-1800)가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우상이라도, 또한 그 우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의 보좌에서 그것을 찍어 버리도록 나를 도우시고 주님만을 경배하게 하소서!”


『인자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자기들의 우상들을 세워 놓고 그들의 얼굴 앞에 그들의 죄악의 방해물을 놓았으니 그들로 내게 조금이라도 묻게 하랴?』(겔 14:3)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4절과 7절에서도 이 말씀을 두 번 더 반복하셨다. 오늘날 형상이나 그림을 놓고 절하면서 숭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세워 놓은 우상, 즉 우리 자신과 하나님만 아는 그 우상이 큰 문제이다. 우리는 그 우상을 마음의 보좌에서 밖으로 걷어차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한다. 이런 옛말이 있다. “내 마음에는 보좌와 십자가가 있다. 내가 보좌에 오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오르시려면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세워진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보좌에서 우상들을 무너뜨리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그곳에 앉으셔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경배를 받으시기 원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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