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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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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6월호>
"자기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그렇게 너희를 위로하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사 66:13)."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잘아는 바와 같이 신격(Godhead)의 삼위께서는 모두 남성이시다. 아버지 하나님도 남성이시고, 아들 하나님도 남성이시며, 성령 하나님도 남성이시다(요 14:16,26; 15:26; 16:7).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즉 하나님께서는 여자들과 소통하실 수 있는, 남자들은 잘 모르는 그런 속성들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여자를 이해하실 수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위에 제시한 본문들이 시사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성"을 다루고자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아버지도 동정할 수 있지만(시 103:13), 위로하는 사람은 어머니이다(사 66:13).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역할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은 애정을 줄 아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독신 여성이나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께서도 동일하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다름 아닌 그분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드셔서 사랑을 쏟으시기 위해서였다.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의도도 그분의 사랑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으시기 위함인 것이다(롬 5:5).
하나님께는 어머니와 유사한 점들이 있는데, 우선 어머니들은 아버지들이 공감할 수 없는 작은 상처들을 잘 돌봐 준다 . 크게 다치거나 심각한 일이 생길 때면 아버지가 곧잘 처리하고 어머니는 오히려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손가락을 문에 찧었다든지,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무릎이 까지고, 벌에 쏘이고, 칼에 베이고 하는 작은 상처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들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저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그냥 나가 놀아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불쌍한 내 새끼, 괜찮니?" 하면서 안아 주고 눈물을 닦아 준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하는데(히 4:15), 여기에는 여자들이 시험받는 모든 부분도 포함된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셨을 때, 사람들이 "서원한 여자를 위해 정해진 값"으로(레 27:1-4) 예수님에 대해 값을 매긴 것을 알고 있는가? 남자로서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상처들도 이해하시지만 작은 상처들도 헤아리신다. 자매들이여, 혹시 아무도 당신을 동정해 주지 않고 당신이 통과하는 역경을 모른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처럼 그 문제들을 돌보고 계신다. 모욕, 창피, 무시, 수치 등 다른 사람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작은 것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진지한 마음으로 공감해 주시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레스터 롤로프가 미시시피 주에서 시작한 "베데스다 소녀의 집"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설교를 했었다. 후에 텍사스 주 정부가 간섭하는 바람에 롤로프는 그 사역을 내려놓아야 했다. 한번은 내가 그곳으로 설교하러 갔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려고 내려갔는데 한 십 대 소녀가 식사하는 내내 혼자서 울고 있었다. 아무도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 아이 역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지어서 형량을 채워야 했는데 그때까지 거기에서 2년을 지내 왔고, 앞으로도 2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부모는 그 소녀를 버렸고, 친구도 친척도 없는지라 그 아이를 방문하는 사람도,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홀로 앉아 오렌지를 먹으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전에 전기톱에 얼굴이 긁히는 위험한 사고를 당해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때의 상처보다 그 십 대 여자아이가 식탁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는 마음이 더 아팠다. 나도 혼자서 십 대 아들들을 키워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소녀의 딱한 사정에 공감이 갔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공감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자상하게 공감해 주시겠는가!(히 4:15)
또 한 가지 어머니와의 유사한 점은 하나님께서도 책으로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이다 . 옛날에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이 흔했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잤다. 요즘에도 그렇게 책을 읽어 주는 어머니들이 가끔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바보상자"에 미쳐 있기 때문에 "문맹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책으로 그분의 자녀들을 가르치신다. 마호메트는 성경 내용의 90%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 구절들을 도용하여 자기가 무슨 계시를 받은 것처럼 행세했었다. 성경을 도용할 정도라면 성경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했다면 마호메트야말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겠는가? 반면에 성경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날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들 중에 어느 하나만을 비정상적으로 확대한 나머지 다른 성품들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는 말씀과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라는 말씀, 이 두 구절밖에 없는 것처럼 행세한다. 그래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어떤 성경 말씀이든지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사랑과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시키면서 행하는 사랑과 연합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런 사랑은 지옥에나 합당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 사랑은 저주받은 사랑인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성경 영화"를 아무리 많이 본다 해도 성경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주일 학교의 유치부 아이들에게조차 유치한 것들이다. 오늘날 미국에 필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책"을 읽어 주는 부모들이다. 1892년부터 1920년까지 코넬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던 제이콥 셔만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박식한 사람을 결코 교육받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으며, 성경에 무지한 자 또한 결코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60년대 이후로 매년 거의 300만 명씩 배출되는 미국의 대학 졸업생들은 시궁창 같은 대학교에서 돈만 날린 꼴이다. 청교도들이 상륙했던 1620년 이후로 "고등 교육"은 미국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참담한 수준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조장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유사한 또 다른 점은, 어머니들이 장애가 있는 자녀를 더욱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장애가 있는 그리스도인을 특별히 아끼신다는 점이다 . 므피보셋은 다리를 절었다. 다윗 왕은 신하들을 보내서 므피보셋을 왕궁으로 불렀고, 그는 왕의 식탁에서 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처럼 먹을 수 있었다. 므피보셋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시어 그분의 아들과 함께한 공동상속자로 삼으셨으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도 앉을 곳을 마련해 주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돌보시는데(시 27:10, 사 49:15) "마리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설령 당신에게 훌륭한 어머니가 없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자리를 채우고도 남는 분이 계시니,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당신이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육신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당신은 둘도 없는 가장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유사한 점을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처럼 비뚤어진 자녀에게 오랫동안 인내하신다 .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들에게서 좋은 점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좋은 점이 없을 때도 말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요나와 베드로 같은 못난 사람들을 당신의 교회에 남겨 두겠는가?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회심하게 하신 것에 대해 화를 냈다. "부흥"이 일어났는데도 하나님께 화를 낸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성도가 아니던가? 그는 끝까지 자기가 잘했다고 하나님께 항변하기까지 했다(욘 4:4,9). 시몬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약속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주님을 지키려고 했다가 칼을 거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모욕감을 느끼고 낙담해 버렸다. 영광을 좀 얻어 보려고 했는데, 베드로는 겁쟁이처럼 달아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화가 나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참아 주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그를 회복시키시어 오순절 날에 설교하게 하셨고, 사도행전 전반부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큰 활약을 하게 하셨다.
조스트레일리라는 이름의 옛 감리교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침례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감리교 설교자였다. 그는 밥 슐러가 버지니아 주에서 목회했을 당시 그의 친구이기도 했다. 조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불경건하고 사악한 술주정뱅이와 재혼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마저 죽었다. 그 후 7년간 의붓아버지에게 노예처럼 붙들려 살면서 밥 먹듯이 맞아야만 했다. 열네 살 되던 해, 어느 어두운 밤에 그는 집에서 도망쳤는데, 얼마 안 되는 소지품만을 챙겨 고향을 떠나 버지니아 주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도중에 매서운 폭풍우를 만나는 바람에 온몸은 다 젖었고,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고통 속에서 산 한가운데 있는 어느 오두막집에 다다르게 되었다. 문을 두드렸더니 몸집이 크고 뚱뚱한 농장 아주머니가 나와서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런 야밤에 밖에서 뭐 했던 거니? 비 맞은 생쥐처럼 다 젖었구나. 어서 들어오렴." 그가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의 아이들이 큰 침대에 파자마를 입고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을 재우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조에게 젖은 옷을 벗고 깨끗하고 마른 잠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런 다음 하루 종일 굶은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차려 주었다. 음식을 다 먹었을 때, 아주머니는 "얘야, 네가 저 침대에서 자도록 해라. 내 아이들은 이쪽에서 나와 함께 잘 거란다. 그런데 우리는 잠자기 전에 항상 함께 기도를 하지." 조는 기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는 커다란 가정용 성경을 꺼내더니 그와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런 후 그들은 모두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는데, 그런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조는 그저 눈치껏 아주머니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아버지!"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자, 그는 눈을 뜨고 '누구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서 살펴볼 정도였다. 그렇게 기도가 끝난 후 조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잤는데, 훗날 그는 "여섯 살 때 이후로 제대로 된 단 잠을 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다음 날 그가 일어나서 그 농장 아주머니에게 "이제 길을 떠나야 해요."라고 하자, 그녀는 "그럴 필요 없다. 우리와 함께 살아도 괜찮아. 넌 몸이 튼튼하니까, 일을 도우면서 심부름도 좀 하면 돼." 그래도 그는 떠났다. 15km 정도를 갔을까, 그 근처에서 열리는 옛 감리교 "천막 집회"에 들어가서 그는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게 되었다. 설교자는 구원받은 조에게 감리교회에 다니자고 권면했고, 심지어 그를 양자로 삼아 자기 집에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 농장 아주머니에게로 가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길로 오두막집으로 가서 은혜를 베풀어 준 그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신이 구원받았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리교인이세요?"라고 묻자, 그 여인은 "아니야, 나는 침례교도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조는 다시 한 번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돌아와서 그 감리교 설교자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감리교 설교자로 안수를 받아야 했을 때, 비록 감리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어머니"의 교회인 침례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갈 곳도 없이 온몸이 비에 젖어 추워서 떠는 한 소년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아늑하게 쉴 곳도 제공해 주었을 때 이런 열매가 맺힌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났던 시절, 런던의 한 거리에서 부랑아 하나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 아이는 종잇조각 하나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그 종이에는 찰스 웨슬리가 쓴 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온화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
저 같은 어린아이를 지켜봐 주시며
저의 우둔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를 주님께로 인도하소서.
주님께로 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애로운 하나님, 거절치 마시고
주님의 은혜의 나라로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을 맛보고 있는가? 『자기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그렇게 너희를 위로하리니』(사 66: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