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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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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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8월호>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0,11).


하나님의 전신갑옷과 관련하여 지난 호(통권 352호)에서 다루지 않은 “두 가지 병기”에 대해 먼저 언급하겠다. 『화평의 복음을 준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엡 6:15).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구원받는 방법에 관하여 30초 안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15:3,4, 히브리서 7:25, 로마서 10:13 등의 구절들을 사용해서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 원하세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할 때는 위 세 구절만 사용해도 구원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한편 에베소서 6장에 언급되지 않은 병기가 있는데 바로 “정강이 보호대”다. 에베소서 6장에는 단 여섯 개의 병기만 나온다. 정강이 보호대가 명시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싸우기 때문인데, 곧 그의 정강이가 땅바닥에 붙은 채로 보호되는 것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하나님의 전신갑옷”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모든 병기가 몸의 전면부를 보호하고 있고 후면부를 보호하는 병기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원수 앞에서 등을 보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대적할 때만 보호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아군인 자기 부대보다 먼저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또한 자기 부대가 자기보다 뒤로 처지면 처질수록 그 그리스도의 군사가 적들이 쏜 화살이나 총탄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군사에게는 “세 가지 대적”이 있는데, 곧 “세상”과 “육신”과 “마귀”다. 우선 “세상”은 무장을 하지 않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한 손으로는 돈이나 명성을 제시하면서 접근해도, 다른 손에는 우리를 죽일 잭나이프가 들려 있다. 또한 세상은 과거 “종교 재판소”에서 즐겨 사용하던 “철갑 처녀”(iron maiden)와 같다. 이는 고문할 대상을 그 안에 넣고 뚜껑을 닫으면 뚜껑 안쪽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못들에 찔려서 피 흘려 죽게 되고, 그렇게 죽은 시체를 발밑에 나 있는 문으로 구덩이에 곧바로 떨어뜨리는 고문 기구인데, 이것이 바로 세상의 실체다. “세상”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도, 결국에는 그들을 붙들고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세상은 세상 체제에 순응하고 일치하도록 강요한다(롬 12:2). 『이 세상의 신』(고후 4:4)인 마귀는 그 누구에게든지 『세상의 유치한 원리』(골 2:8,20)를 사용한다. 이등병이든 사성장군이든, 고등학교 중퇴자든 박사 학위 소지자든,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런 식의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그래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결혼하려면 하는 수 없어.” “조금은 괜찮아.” “항상 그렇게 해 왔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잖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야.” “잠깐만 해 보다가 언제라도 그만두면 되지 않겠어?” “양심이 그렇게 괴롭지는 않잖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일치하려고 할 때 항상 이렇게 묻는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거죠?” 사람들은 항상 나를 “부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긍정적인 질문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라.

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당신이 그 일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셔도 좋은가?

② 당신이 하려고 하는 것이 당신을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가?

③ 당신은 그 일을 할 때 양심에 찔리지 않는가?

④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⑤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어떤 결정을 위한 올바른 질문은 “그게 뭐가 잘못된 거죠?”가 아니라 “그것이 옳은가?”이다. 옳은 일이라면 해도 된다. 그릇된 일이라면 당장 중단하라! 중단할 수 없다면 너무나 연약해서 중단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애꿎은 설교자는 비난하지 말라.


두 번째 대적은 “육신”이다. 성경은 육신에 대해 “피하라”(“도망하라”)고 명령한다.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 10:14). 탐심과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것들을 피하라.』(딤전 6:11)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마귀”에 대해서는 “피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대적하라.』(약 4:7)라고 명령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대적하여 승리하셨다(마 4:1-11). 우리 역시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엡 6:10)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신에 관한 한 그 유혹에 자신을 계속 노출하게 되면 아무리 그 유혹을 거부하고 또 거부한들 결국은 그것에 굴복하고 만다. 쉽게 말해 육신에 일말의 기회조차 내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마귀의 집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지 말라. 마귀를 찾아가서 이런 식의 대화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야, 내가 뭐 좀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나는 지금까지 너를 섬겨 왔지만, 이제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너를 섬기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만 섬길 거야.” 그러면 마귀는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아, 그거 좋은 소식이네. 나도 너처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너를 믿지 않을 것이고, 평생토록 너와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그러면 마귀는 “그것참 흥미진진한 얘기구먼. 그러지 말고 잠시 들어와서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세히 좀 얘기해 봐!”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당신은 마귀의 집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 집에서 저녁 식사는 물론 밤새도록 마귀와 놀아나게 된다. “젊음의 정욕을 피하라”(딤후 2:22).


세 번째 대적은 “마귀”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주의하고 깨어 경계하라고 명령하셨다(벧전 5:8,9). 성경은 마귀를 『울부짖는 사자』(벧전 5:8)에 빗대어 표현한다. 한번은 아프리카에서 30년 동안 섬긴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자에 대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점 두 가지가 있어요. 한 가지는 사자가 얼마나 높이 점프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마을마다 사자에게 죽임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모두 한결같았어요. 사자의 점프 높이에 대해 모두 과소평가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자가 자기 키만큼 뛸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보다 1.5배 혹은 2배 수준까지 점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사자가 높이 점프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게 문제였어요. 또 한 가지는 밤에 울부짖는 사자의 소리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글에서 밤을 보내야 할 때면 한밤중에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 무시무시한 울음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곤 했지요.”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케네스 코플랜드 같은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처럼 떠벌리는데 그야말로 멍청한 소리다. 만약 다 자란 아프리카 사자가 당신이 있는 방문을 열고 먹이를 찾아 들어온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망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은 마귀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256쪽 / 9,000원



마귀는 주로 “세 가지 전술”을 사용한다. 첫째, “위장(camouflage) 전술”로서 일종의 “은폐 작전”이다. 사탄은 자기가 한 일을 다른 자가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을 모르게 만든다. 자매들이여, 마귀는 당신의 남편을 비난하면서 다가와 결국에는 당신의 남편이 대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형제들이여, 마귀는 당신의 아내가 문제라고 여기게 만든다.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그들의 원수처럼 느끼게 한다. 또한 마귀는 교회 회중을 향해 목사를 비난하고, 목사가 회중을 비난하게 만든다. 물론 마귀도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근본적인 대적은 사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대적은 마귀다(벧전 5: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닌 것이다(엡 6:12).


둘째, “위조(counterfeit) 전술”이다. 이 시대에 사탄이 만들어 낸 걸작품은 성경이 아닌 “성경들”이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이러한 명언을 남겼다. “시궁창에 빠진 술주정뱅이가 보이는가? 그는 사탄이 만들다가 실패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다. 저기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부자가 보이는가? 그는 사탄이 만든 인물 중에서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 왜 그런 것인가? 마귀가 부자를 사용할 때 당신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술주정뱅이의 말은 듣지 않는다. 누가 술주정뱅이처럼 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부자처럼 살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 사람은 아주 많다.
288쪽 / 12,000원

셋째, “타협(compromise) 전술”이다. “타협”이란 무엇인가? 오래전 어느 거리 광고판에는 이런 “담배 선전 광고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담배 한 갑을 들고 있는 그림이 부착되어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림으로 바뀌었고, 또 두 달이 지나자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보고 있는 그림으로 바뀌었으며, 또 두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그림으로 바뀌었다. 또다시 두 달이 지나자 남자가 여자에게 담배를 건네는 그림이 부착되어 있었고, 그다음에는 남자가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그림이, 마지막으로는 여자가 혼자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밑에는 “너, 정말 많이 늘었구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약, 술, 담배, 포르노, 변태 성욕 등은 모두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 요즘 대학 교육을 받은 멍청이들, 즉 뉴에이지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단일세계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향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배교”라고 말씀한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


“타협”을 이런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가서 영원히 불탄다고 믿는다. 그런데 세상 학교에 다니고 책을 몇 권 읽기 시작하더니 믿음이 점점 흐려진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똑같이 죽은 후에 무덤에 묻히기만 할 뿐, 사후 생애와 관련해서는 그들 간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하버드대학교, 예일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버클리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시카고대학교 등에서 배우는 세상 교육이다. 그래서 밥 존스 시니어가 “구원 없는 교육은 저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킹제임스성경>이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소위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 신학대학원 등에 가서 강의를 듣기 시작하고 책을 몇 권 읽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문서를 쓰시긴 쓰셨는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처음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쓰셨는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별반 다를 게 없고 학자의 자격과 신념에 따라 사본들 간에 우선순위가 매겨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의 실체다!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가 이름 있는 기독교 대학, 신학교, 신학대학원 등에 가면 이런 것을 교육이라고 받게 된다. 당신도 그런 식의 배교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첫 단계에서 타협을 제안받았을 때 자신의 성경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발짝도 물러서면 안 된다. 성경은 당신에게 “그러므로 서라!”(엡 6:14)라고 명령하고,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으라!”(엡 6:13)라고 명령한다. 서라! 요동하지 말라! 고꾸라져 죽을 때까지 서 있으라! 고꾸라져 죽을 때도 서 있는 채로 죽으라!


나는 1949년 3월 14일에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 있는 한 방송국에서 휴 파일 목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그때 목사님은 <킹제임스성경> 신약을 꺼내 보이시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물으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3개월에 한 번꼴로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구원받은 지 6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킹제임스성경>을 내밀면서 “럭크만 씨,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여전히 나는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킹제임스성경>에 대한 성경적 믿음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고수해 왔고, 그러한 입장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고집 센 노인”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취한 성경적 입장을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인이여, 일어나 서 있으라! 대열을 흩트리지 말라! 당신이 지키지 못한 그 전선을 통해 원수 마귀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라! 굳건하게 서 있으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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