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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왜” 성별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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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1월호>
성별을 영어로 “separation”이라고 하는데, “성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거듭난 성도들은 왜 성별해야 하는가? 우선 교회들이 “배교”했기 때문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 “배교”라는 단어는 “한 번” 나온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배교”는 헬라어로 “결함, 변절, 탈당”(defection)이나 “반란”(revolt)을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종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적용해 보면, “신앙적인 결함”이나 “신앙적인 변절, 반역 또는 반란”을 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배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로서, “진리의 말씀과 건전한 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변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성경적 교리로부터 이탈하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배교자들”에 대해 “바울”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빌 3:18) 있다며 경종을 울렸고,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벧후 2:1) 자초한다고 경고했다.한편 “배교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주된 특징”이 있다.
첫째,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체계”를 거부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이들은 마치 성경을 잘 믿는 사람들인 양 행세하면서 “정통주의”와 “근본주의”라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있을 뿐, 정작 성경적인 정통주의와 근본주의가 표방하는 “진리 체계”는 부인하고 있으니, 그들에게서는 어떠한 “경건의 능력”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마귀들에게 사주를 받아” 움직인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
셋째, 배교자들에게서는 “진실함과 정직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딤전 4:2).
넷째, “기만과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불의의 대가를 받게 되리니 대낮에 흥청거리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너희와 더불어 잔치를 즐기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속임수로 방탕하니 그들은 점과 흠이요』(벧후 2:13).
다섯째, “하나님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대적한다. 『이와 같이 이러한 더러운 꿈을 꾸는 자들도 육체를 더럽히며 다스림을 경시하고 권위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도다』(유 1:8).
여섯째, “영적으로 죽어” 있다. 『그들은 너희와 더불어 잔치를 할 때 두려움 없이 자신들을 먹이는 너희 애찬의 흠이요,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물기 없는 구름이며, 두 번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가 시들어 열매 없는 나무요』(유 1:12).
일곱째, 배교자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또 “성경”과 “복음”을 변개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갈 1:7).
배교가 진행되는 양상을 보면, 상당히 점진적이고 침투력이 매우 강한데, 주로 “누룩”을 통해 그 침투와 확산이 진행된다. 성경에서 누룩은 기본적으로 “죄”(고전 5:6-13)와 “거짓 교리”(마 16:11,12, 갈 5:1-9)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처럼 “위선”(눅 12:1)이나 “종교적인 형식주의”(마 23:13-22)를 함축할 때가 있고, “사두개인들의 누룩”처럼 성경과 초자연적인 진리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과 회의주의”(마 22:23-33)를 가리킬 때가 있으며, “헤롯 당원들의 누룩”처럼 세상의 문화와 사상 및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세속화”를 함의할 때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 “누룩”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전체를』(마 13:33, 눅 13:21), 혹은 『온 반죽을 부풀게』(고전 5:6, 갈 5:9) 하는 특징이 있어서 교회들과 회중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져 나간다는 사실이다. “세균”과 같이 퍼져 나가는데, 벌어진 상처에 세균이 침투하여 살을 파먹고 썩게 하는 것처럼, “누룩”으로 상징되는 “거짓 교리들” 역시 “종창”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종창처럼 퍼져 나갈 것이며 그들 가운데는 후메내오와 필레토가 있느니라. 그들은 진리에 관해서는 정도를 벗어나서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여[무천년주의 거짓 교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고 있느니라』(딤후 2:17,18).
사실 배교에는 “약”이 없다! 그만큼 치유 불가능하기에 배교자들에게는 “엄중한 심판”만 남아 있는 것인데, 그들을 위해 “흑암의 안개”가 영원히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벧후 2:17, 유 1:13). “인류의 역사,” 특히 현 “교회 시대”가 종말을 향해 다가감에 따라 “배교의 밤”은 더욱 깊어질 것이므로, “바울”은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딤후 3:1) 올 것이라 경고했고, 또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딤후 3:13) 할 것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결국 이러한 배교는 “대환란 기간”에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계 17:5)라고 불리는 “로마카톨릭” 안에서 절정에 달할 것인데, 이에 성경은 그런 가증한 “사탄적인 집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다른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나의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성별하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 이는 그녀의 죄들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불의를 기억하셨기 때문이니라』(계 18:4,5).
“어니스트 피커링”은 그의 책 <성경적 성별>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교자들과 연합하여 교제를 계속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염된다는 원칙은 ‘왈덴시안’이나 ‘재침례교도들’ 같은 고대의 ‘성별주의자들’이 이미 강조했던 바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들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죄 가운데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들을 분명하게 해석해 보면, 이것은 미래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거짓된 것들로부터 성별해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런 악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시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런 악을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나 집단이 배교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곱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바른 성경,” 곧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서의 성경”이 없다. 설령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성경을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살전 2:13) 믿지 않는다. 둘째, “성경적 교리”를 믿고 실행하는 대신 인간적인 전통이나 교단 교리를 따른다. 셋째, 지옥의 멸망을 향해 가는 죄인들에게 죄와 심판과 지옥을 담대하게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 길거리나 공원 등지에서 “거리 설교하고 구령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화인 맞은 양심으로 쉽사리 죄를 짓는 것은 물론, 비성경적인 행보를 내딛는 교인들을 바로잡기 위해 “성경적 진리”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치거나 양육하지 않는다. 다섯째,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간절히 무릎 꿇고 간구하는 “기도의 용사”가 없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가 거의 없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해 용기 있게 “성경적 성별”을 외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배교는 “바르게 보존된 성경”을 버렸을 때 시작된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했을 때 시작된다. “성경적 교리”를 버리고, 그 교리로부터 돌아섰을 때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거나 소망하지 않았을 때, 또는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에 걸맞은 믿음의 생활을 저버렸을 때 배교는 시작되는 것이다.
성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다! “성별하라는 명령”은 오늘날 새삼스럽게 대두된 “새로운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교회사 2천 년 동안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의 “피흘린 발자취”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성경적 교리”이다. 무엇보다도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단호하고 분명하며, 심지어 엄중하기까지 하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일치되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임이라.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 것이며 그들 가운데서 다닐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며 또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들과 딸들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가 말하노라.”고 하셨느니라』(고후 6:14-18). 이처럼 “성경적인 성별”은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주의할 사실이 있는데, “성별”(separation)과 “분열”(division)은 다르다는 점이다.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의 특징들 중 하나는 “분열”이지, “성별”이 아니었다.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고전 3:3) 오늘날 “성별주의자들”을 향해 “분열주의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있다. “로마카톨릭”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신학 교수이자 목사였던 “에드윈 홀”은 <청교도와 그들의 원칙들>이라는 그의 강의록에서 “성별주의자들을 분열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거짓 교회들이나 공회들 혹은 로마카톨릭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을 두고 ‘분열’이라고 언급한 사례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성경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규범들’만 따르되, 사람이 만든 규범과 전통과 명령을 거부하는 성도들에게 ‘분열의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는다. 성경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성별하는 것을 결코 금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어떤 사람이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거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해도, 그가 ‘거짓 교사’라면 그런 자를 거부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분열’은 성경대로 믿는 ‘같은 교회’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내부적인 불화’를 의미한다.”
분열과 성별은 다르다! 분열은 “육신적으로 분리하는 것”이지만, 성별은 “성경적으로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육신적인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지만, “성경대로 믿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교회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성경적 성별”이다. 성경은 “분열하지 말라”고 경고한 반면, “성별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씀한다. 미국 침례교 설교자 “프랭크 노리스” 목사 시대에, 성경적 성별에 무지했던 목사들은 노리스 목사가 취한 “성경적 성별을 위한 행보”에 대해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인 극단적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남침례교 총회 안에 “자유주의 누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안에 그대로 남아 개혁을 추구하려 했던 목사들은 “평화와 화합, 교단적인 연대, 사랑과 연합”을, “순수한 복음, 순수한 성경적 교리, 진리를 향한 충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리스 목사처럼 “성경적 성별을 외치는 사람들”을 “교회 연합을 파괴하는 범죄자들”로 낙인찍어 버렸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성경적 성별”에 관한 분리의 책임은 “성별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당사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다시 말해 “성별해서 떠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인데, 성경은 분명 『그들에게서 떠나라.』라고 명령하신다.
“프랭크 노리스” 목사는 1935년 1월, “탬플침례교회”에서 “성별”에 관해 이렇게 설교했다. “배가 물에 떠 있는 것은 괜찮지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당신은 반드시 배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해도, 결코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성별”은 “성경적으로 순수한 교회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이 싸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재림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걷는 “성경적 성별의 길”은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지나간 날들에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값비싼 대가를 그들의 순교의 피를 통해 이미 지불해 놓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성별했을 뿐인데, 그 결과 엄청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경적 성별을 몸소 실천한 “프랭크 노리스” 목사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각 교파에서 ‘하만’ 같은 사람들이 비성경적인 요구들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굴복했다면, 아무런 말썽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수들 일곱 명이 사퇴하도록 ‘베일러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말썽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얻어맞고 발길질당하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나를 향한 수많은 악의 어린 비방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되받아쳤다.” 이렇듯 성별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거룩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별”은 종종 “피”와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앞선 시대의 순교자들은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성별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그들의 “피흘린 발자취”를 우리 역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