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원히 보존하신 말씀 분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vs. 제거하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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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6월호>

성경에서 “어린양”(Lamb)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명의 벌거벗은 남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입혀 주셨을 때다.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창 3:21). 여기서 “가죽”은 “탈굼”(Targum,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에 나오듯이, “뱀(마귀)의 가죽”이 아니다. 그것은 “양,” 특히 “어린양”의 가죽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성경 전체에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예표가 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구상에서 최초로 죽임을 당한 짐승은 “어린양”이었다. 이 땅에 최초로 “붉은 피”를 쏟은 짐승은 다름 아닌 “어린양”이었다. “어린양”이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양”을 치는 “목자”(창 4:2) “아벨”이 개인의 속죄를 위한 “피의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다.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이렇게 “창세기”에서 “어린양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성경은, 계속 이어지는 “어린양의 죽음의 행렬”(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을 지나, 결국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한 어린양』(계 5:6)과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 5:12),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계 7:17)으로 끝나게 된다. 특히 『어린양의 혼인식』(계 19:7)에서 “어린양”이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혼인을 하고,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계 21:9)로 묘사되는 『그 큰 도성 거룩한 예루살렘』(계 21:10) 안에는 『그곳의 성전』(계 21:22)이요, 『그곳의 빛』(계 21:23)이신 “어린양”께서 계신다. 또한 그 거룩한 도성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계 22:3)가 있고, 바로 그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계 22:1)이 흘러나오며, 그 안으로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자들만』(계 21:27) 들어가 『그 도성의 빛 가운데서』(계 21:24) 걸을 수 있다.

한편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에 관한 진리”를 “피의 책”인 성경 안에 펼쳐 놓으실 때, “개인”을 위한 희생제물(창 4:4; 22:8)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위한 희생제물(출 12:5-7)과 “한 민족”을 위한 희생제물(레위기, 신명기)과 “인류 전체”를 위한 희생제물(요 1:29)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가운데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어린양”으로까지 순차적으로 전개하고 계신다. 또한 “성경”에는 “어린양”이 “예언되어” 있고(창 22:8), “실제로 적용되고” 있으며(출 12:13), “사람으로 인격화되어” 있고(사 53:7),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신원이 확인되고” 있으며(요 1:29), 결국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주님은 “어린양”이심과 동시에 『양의 목자』(요 10:2)이시다. 『양들의 큰 목자』(히 13:20)요, 위대한 『목자장』(벧전 5:4)이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 중에는 “목자”가 많다. “아벨”이 그렇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위대한 두 지도자인 “모세”와 “다윗” 역시 목자였다.

한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땅”에 갔을 때, 그의 아들 “이삭”이 이렇게 물었다. 『나의 아버지여... 불과 나무를 보소서. 그런데 번제에 쓸 어린양[lamb]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그러자 “아브라함”은 “미어지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이삭”을] 살리실 수』(히 11:19)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for a burnt offering].』(창 22:8)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답변은 “문맥적으로”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삭”이 물은 것은,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친히’ 번제에 쓸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라.”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답변”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변개된 성경들”은 “성령님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himself”를 “God” 바로 뒤에 위치시킴으로써(NIV - God himself will provide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하나님께서 ‘친히’ 또는 ‘자기를 위하여’ 마련하실 것”이라는 답변으로 변개시켰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개역개정판, 개역한글판성경).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표준새번역). “성경 번역”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바르게 보존된 성경”도, “최종권위”도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정동수” 역시 다른 변개된 한글 성경들처럼 똑같이 변개시켰다.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흠정역). 이러한 번역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은 문맥적으로도 확인되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손수) 준비하신 것은 “어린양”(lamb)이 아니라 “숫양”(ram)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더니, 보라,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ram] 한 마리가 그 뒤에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숫양[ram]을 잡아와서 그의 아들 대신에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분명 “이삭”은 “어린양”(lamb)에 대해 물었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은 “숫양”(ram)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창 22:8)라고 답변했다.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이 대답은 사실 “예언”이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히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또 어떤 시기를 지시하는 것인지”에 관해 “아브라함”이 잘 알지 못했다 해도(벧전 1:10-12, 눅 9:33 -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며 말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술과 말을 사용하셔서 “예언”을 말하게 하신 것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선지자”(창 20:7)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예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창 22:8)하셨는데, 초림 때 “친히” 바로 그 “어린양”이 되셨으니,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딤전 3:16)이셨고, 『한 아이』요, 『한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영원하신 아버지』로도 불리신다(사 9:6).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taketh away]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는 죄를 ‘제거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변개된 한글 성경들은 모두 한결같이 “죄를 ‘지고 가신’ 분”으로 변개시켰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개역개정판, 한글개역성경).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표준새번역).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쉬운성경).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지” 않고, “세상 죄를 제거해” 버리셨다. 구약 시대에 어떤 동물의 희생제사로도 제거될 수 없었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전히 제거하신 것이다.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똑같은 제사를 자주 드리지만 이것으로써는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으나 이분은[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린 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그후로는 그의 원수들을 자기 발판으로 삼으실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히 10:4,11-14).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여전히 “죄를 지고 가고 계신 미완성”이 아니라, 과거의 단번 속죄를 통해 “완전히 죄를 제거하여 완성하신 영원한 구속”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죄사함”(remission)과 “구속”(redemption)의 차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들의 피의 효력”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 아래 살았던 유대인들은 “죄사함,” 곧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가 “짐승들의 피”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으니, 우선 죄와 허물이 용서되었지만, 범법자가 깨끗하게 되지는 못했다(출 34:7, 민 14:18).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히 10:4),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도 마련해 주지 못했다(히 9:8).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았어도 죽은 뒤에 곧바로 셋째 하늘의 낙원, 곧 온 우주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셋째 하늘의 “지성소”로 올라가지 못했고, 정해진 때가 이를 때까지 땅 아래 있는 “임시 장소”인 “아브라함의 품,” 즉 “지하 낙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또한 죄인들의 양심을 온전케 하지 못했고, 정결케 하지도 못했다(히 9:9,14). 그 결과 계속해서 죄들에 대한 “의식”(conscience)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해마다 죄들이 다시 기억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히 10:2-4). “피의 효력”도 영원하지 못했기에, 희생제사를 “해마다,” “여러 번,” “자주,” “반복해서” 드려야만 했다(히 10:1,11-14).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피”의 효력이 “죄를 용서하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죄사함”만 있었고, “구속”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 언약” 속에 묶여 있던 구약 성도들에게는 “온전하고 영원한 구속”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죽으셨다.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그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히 9:15). 그 결과 “구속”이 이루어졌으니, 죄와 허물이 용서되는 것은 물론, 온전히 깨끗하게 되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도 열렸다(히 10:19,20).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죽은 뒤에 “지하 낙원”이 아닌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약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지하 낙원”을 빠져나가 “셋째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1-53, 엡 4:8). 죄인들의 양심이 온전해지고 정결케 되었다(히 9:14). 따라서 죄들에 대한 “의식”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히 10:17), 계속 반복해서 기억할 필요도 없다. “피의 효력”은 영원하다(히 10:14). 그래서 “해마다,” “여러 번,” “매일,” “자주,” “반복해서” 드릴 필요도 없어졌다(히 7:27). 무엇보다도 “죄들을 제거”했다(히 10:11-1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들이 제거된, 즉 “구속”(엡 1:7, 골 1:14)의 결과다.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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