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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구주(요한복음 4 :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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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2월호>
4:15-19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 물을 나에게도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여기에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도록 하옵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로 오라.”고 하시니라. 그 여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한 네 말이 옳도다. 너에게는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며, 또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므로 네가 이 점에 관하여 참말을 하였도다.”라고 하시니,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선지자이신 것을 내가 아나이다.』그녀는 주님께 “그 물을 내게도 주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매일의 수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마음에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이 여인과 같이 죄인인 모든 사람들은 매일의 수고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복음만이 모든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구원을 바라는 죄인에게 예수님은 다소 엉뚱한 답변을 하고 계신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녀가 죄인임을 밝히시려는 의도로 주어진 것이다. 죄인은 자신의 죄가 구주 앞에서 낱낱이 밝혀지고 폭로될 때 비로소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주님은 이 여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우리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인간의 가장 악한 성품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감춤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를 빛 가운데로 가져와 그분 앞에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의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4:20-21『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경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경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하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아, 나를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않을 그 때가 오리라.』
예배하는 장소의 문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주된 논쟁점 중의 하나였다. 복음을 전할 때 흔히 경험하는 것처럼 죄인의 양심은 자신의 죄 문제를 본능적으로 피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죄인이 죄를 지적하는 진리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화제를 돌려 빠져나가려고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인 그녀에게 “이 산” 혹은 “저 예루살렘”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주님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경배할 장소에 대한 문제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신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경배할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경배할 사람이 문제임을 지적하시어, 그녀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탈출구를 봉쇄하셨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원하는 모든 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분을 아는 것이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원이 유대인, 즉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4:23-24『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거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이 요한복음 3:7에서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본문에는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다. 거듭나지 못한 수만 명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로 기도하며, 설교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하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교회놀이이며,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모습이다(잠 15:8).
경배는 구속된 사람의 행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단지 탄식하고, 부르짖었을 뿐이었다(출 2:23,24). 그러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넌 후에야 비로소 경배를 드린다(출 15:1).
경배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혼적인 열심으로만 나아가거나, 마음은 다른 곳에 빼앗긴 채 몸만 예배당에 있다면 그것역시 주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경배가 될 수 없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영적인 예배는 혼적인 예배와 구별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육신은 아름다운 장소와 감각적인 음악, 그리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 “밝고 매력적인” 예배를 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종교의식은 음악과 분위기에 좌우되는 혼적인 의식들이다. 개역성경에 나온 것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다. 정한수를 떠 놓고 “진정으로” 비는 “신령한” 마음은 모든 종교, 우상숭배에나 적합한 것이다. 틀린 성경에 바탕을 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킨 엉터리 예배에 불과하다.
분위기 형성을 위한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와 예복들, 웅변의 기교와 유머 감각들로 이루어진 설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시적인 기도, 이외에도 참석자들에게 갖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된 것들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칙을 무시한 잘 짜여진 연극에 불과하다.
경배의 유일한 목적은 경배받으시는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 비록 그 예배가 매력적이지 않고 재미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모든 예배는 단순하고 영적이며,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지나친 형식들은 영적인 예배를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요소이다.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말씀으로 전파하는 설교여야 하며, 입술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와 주께 드리는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여야 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여야 한다(골 3:15-17).
4:28-36『그러자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 두고 성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말한 그 사람을 보라.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하니, 그때 사람들이 성읍에서 나와 주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주께 간청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드소서.”라고 하더라. 그러나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있느니라...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 너희가 아직도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말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는 곡식이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음이라. 또 거두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느니라. 이는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함께 즐거워하려 함이라.』
이제 그녀의 질문은 그쳤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행복한 결말을 증거하기에 늦지 않은 시간에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음을, 즉 이방의 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됨을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마름을 인지하였고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을 마시기 원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제 영원한 생명샘을 발견한 그녀에게 더 이상 물동이는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일단 그리스도를 알고 개인적인 구세주로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이전의 육신적인 것들로부터 돌아서게 마련이다.
음식을 사 들고 온 제자들은, 피로하고 기운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넘치는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음식을 드시라는 그들의 간청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육신의 친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나누어 주는 자가 또한 받는 자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다. 순종하는 종에게는 섬기지 않는 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를 일하기에 알맞지 않은 밭으로 보고 있었다. 단지 외양을 보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외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종종 우리는 어떤 자들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로 단정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순종하면 뜻밖의 수확을 거둘 수도 있다.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은 모두 중요한 일이다. 그 자신이 거두지 못하더라도 부지런히 적절한 씨를 뿌린다면 그의 사역은 적절히 보상받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거두어 들이도록 하셨을 때에도, 그것은 이미 씨가 뿌려진 밭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것임을 알고 거둔 열매에 대하여 겸손해야 한다.
4:39-42『그 성읍의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말로 인하여 주를 믿었으니, 그녀가 증거하기를 “그분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씀하셨다.”고 함이더라. 그때 사마리아인들이 주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간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머무시더라.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니, 사람들이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는 네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들어서 이분이 참으로 그리스도, 곧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그녀는 이치를 따져 보고자 머뭇거리지 않았다. 참된 증거는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본문 말씀은 유대인의 불신과 거부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주님은 거기에서 한 가지 이적도 수행하지 않으셨지만 사마리아인들의 많은 무리가 그를 영접하였다. 어떤 공개적인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들의 구원과 흡사하다. 그들이 믿게 된 것도 여자의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인자”나 “다윗의 아들”이 아닌 “세상의 구주”로 칭해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4:43-54『이틀 후에 주께서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시니라.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시니라. 그때 주께서 갈릴리에 오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더라. 이는 명절 때 그들도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가서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라. 그후에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의 카나에 오시니, 그곳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더라. 그곳에는 어떤 귀족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퍼나움에서 병이 들었더라. 그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주께로 가서 간청하기를, 주께서 내려오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하니... 그 귀족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어린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자기 길을 가니라. 그가 내려가고 있을 때, 그의 종들이 그를 만나 소식을 전하여 말하기를 “주인님 아들이 살아났나이다.”라고 하니, 그가 “몇 시쯤에 그 아이가 나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어제 제칠시에 열이 떨어졌나이다.”라고 말하더라. 그러므로 그 아버지는 그 시간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그 자신과 온 집안이 믿으니라. 이것이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기적이라.』
이제 구세주께서는 다시 자신이 높임을 받지 못한 고향으로 가신다. 한 장소에서 아무리 성공적이고 인기있는 사역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곳에서 일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옮겨가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실패가 우리를 초조하게 하여 다른 곳을 찾아보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성공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옮겨갈 것을 명하셨는데도 제 자리에 지체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갈릴리를 경시하였다(요 7:41,52). 다른 세 복음서들에서 이 때의 갈릴리에서 주님이 배척당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 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사렛에서, 주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60장 말씀을 읽으며 설교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의 신적인 영광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눅 4:23,24).
여기에서 그가 사용하신 “선지자”라는 말은 매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여인의 지각이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사용했던 말이었으며(19절), 그곳에서 그는 높임을 받으셨다.
카퍼나움에 있는 귀족의 아들이 낫게 되는 기적은 카나의 혼인식의 기적과 유사한 면이 많다. 두 경우 다 주님께서는 말씀만 하셨고, 그 말씀을 믿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그 결과는 표적을 목도한 자들이 믿게 된 것이었다.
“세상적인 부는 불확실한 위안이요, 확실한 근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이 집안의 시련은 하나의 위장된 축복이었다. 책망받았을 때 그는 화내지 않았고, 계속하여 간청하였다. 질병과 죽음은 나이 든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이 지상에서 죽었던 최초의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