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난해구절 해설 분류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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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1월호>

위의 구절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짓고서도” 죄를 자백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이다. (미국의 Holiness 그룹을 비롯해 우리 나라에서도 구원파의 일부와 강서중앙교회의 서달석 목사 등이 이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이들의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2. 거듭난 사람의 죄는 진짜 죄가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자백함이 없어도 거듭난 사람의 죄는 용서하신다.
4.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의 죄를 보지 않으시며 대신 그가 신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신다.
5. 거듭난 사람의 죄는 그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6. 거듭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이미 모두 용서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 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이 두 구절에서 “우리”가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도 포함하고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그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의 저자이며 역사상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욱이 요한일서 1:9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죄인들의 경우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된다. 반면 이미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들을 자백하면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면 비록 그 죄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 놓여졌고 그가 갈보리에서 죄들의 사함을 받았을지라도 자백하지 않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자백하지 않은 죄는 성도와 주님과의 교제에 있어 장애물이 된다. 다윗은 그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2:5). 이 고백은 구약성경의 다윗의 경험인 동시에 신약성경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죽기까지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자.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롬 7:18,19,21). 바울은 심지어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고 고백했다. 구원받은 죄인은 의인이 되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된 것뿐이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죄악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리워진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의롭지 못한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것이다(롬 4:5).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의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죄를 짓고서도 죄가 아닌 체하면서 자백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교회시대 초기의 영지주의자들처럼 “마음껏” 죄를 짓는 자들이 있다. (그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고 육체로 짓는 죄는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담대한” 교리에 근거해서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
요한일서 1:7-9까지의 말씀과 본 구절을 조화시킬 수 없는 또 다른 사람들은(주로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늘상 하는 대로 헬라어를 최종권위로 삼아 “해결책”을 제시한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반복적, 습관적 행위를 가리키므로 이 구절(“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지(habitually practice) 가끔가다 죄를 저지르지도(occasionally commit)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이란 구절 역시 습관적으로 죄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cannot live in sin habitually). 그러나 이렇게 되면 “죄를 지을 수 없다”(cannot sin)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습관적으로 살다”(live in, habitually)라는 세 단어를 첨가시킨 셈인데, 이러한 첨가에 대해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신 4:2, 잠 30:6, 계 22:18).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칙에 따라(고전 2:13)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다(창 40:8, 요 16:13). 우선 요한복음 3:6과 요한일서 3:9의 문맥이 모두 거듭남에 관한 것임을 주목하라. 요한복음 3:6에 따르면 우리의 육체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반면 우리의 영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요한복음 1:12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한다. 즉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오면서 그의 죽은 영을 살리게 되는데 이것이 거듭남이다. 이 거듭난 영을 성경에서는 속사람(고후 4:16, 롬 7:22) 혹은 새사람(골 3:10)이라고 부른다. 이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고전 6:17) 죄를 짓지 아니하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롬 7:17). 이는 하나님의 씨가 이 새사람 안에 거하며(로마서 7:18에서 바울은 자신 안, 즉 자신의 옛 사람인 육체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새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새사람은 성령을 좇아 살고 우리의 옛 사람은 죄의 종노릇을 한다(요 8:32). 이에 바울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다(롬 8;1).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다(육신적 죽음, 롬 8:13).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육신을 따라 살다가 병들거나 죽은 성도가 많이 있었다(고전 11:30).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로마서 12:1,2에 따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고(이것이 헌신이다) 세상과 일치하지 아니하며(이것이 성별이다) 생각의 변화를 받아(이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롬 8:6)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한 후 자기 자신을 죄에게는 죽은 자요(겉사람, 옛 사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속사람, 새사람)로 여기라는(롬 6:11) 말씀을 계속적으로 적용한다면(continually apply),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자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24시간 내내 계속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죄를 지을 것을 미리 아시고 대비책으로 요한일서 1:9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짓고 자백하지 않는다면 지옥에는 가지 않을지라도, 그는 이 땅에서 구원의 기쁨을 잃는 것은 물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다(요 15:1-6). 자백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롬 8:13).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나 만일 연약하여 죄를 짓는다면 속히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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