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구절 해설 분류
야고보서 2:20-24 행위에 의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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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9월호>
『오 허황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믿음이 어떻게 그 행함과 더불어 작용하였으며,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음을 네가 보느냐?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는 성경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약2:20- 24).이 구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비롯해서 율법과 행위를 강조하는 여러 구절들로 인해 종교개혁 때 이신칭의(以信稱義,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교리를 들고 나온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 절하했었다. 얼마 전에는 성경의 오류만을 찾아내려는 인문주의자들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로마서 4장과 야고보서 2장은 명백한 모순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사실 이 구절은 지난번에 다루었던 히브리서 6:4-6(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37호, pp. 24-29)과 더불어 은혜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을 매우 당혹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구원받은 후에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죄를 짓고 자백하고, 죄를 짓고 자백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는 영적인 어린 아이들이나, 아예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때로는 구원의 확신마저 앗아가 버리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결국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든 모순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제시된 몇 가지 해결책들을 들어보고 올바른 성경적 해석을 찾아보도록 하자.
<오픈성경>의 야고보서 2:21-24에 대한 주석
「아브라함의 구원은 행함으로 구체화된 믿음에 기인한다. “의롭다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이렇게 의롭다고 선언한 것인데 이것은 구원 그 자체를 의미한다. 22절은 아브라함의 행동원리를 말한다. 행위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이 함께 있고 행위는 믿음이 구체화된 것이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단순한 이론적인 인식만을 말한다.」
이 주석을 읽고 이 구절과 로마서 4장의 이신칭의와 모순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혼돈만 가중시키는 애매모호한 해석이 되고 말았다.
<톰슨Ⅱ 주석성경>의 야고보서 2:21-26에 대한 주석
「지금까지 부정적인 측면에서 믿음을 설명하던 야고보는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살아 있는 믿음의 진수를 보여준다.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은 바울의 칭의 교리와 모순되는 듯이 보이나 사실 야고보가 주장하는 행함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므로 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믿음은 행함의 근거가 되었고 행함은 믿음을 완성시켰다는 뜻이다. 이처럼 믿음과 행함이 결합되어 있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단순한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 행함의 근본 원리로서 활동하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아름다움은 지적인 교리나 감정으로 완성되지 않고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완성된다.」
이 설명 역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그럴듯한(롬16:18) 말이 되고 말았다.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로마서 4장과 야고보서 2장을 차분히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두 서신의 주장은 서로 다르고 모순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주석성경>의 로마서 4:2에 대한 주석
「야고보서 2:24과 비교해 볼 것. 이 두 구절은 한 진리의 양면을 보여준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곧 믿음을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사람들이 보는 것, 즉 믿음을 갖고 있다는 보이는 증거로서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이 해석은 일견 매우 그럴듯하게 보인다. 필자도 한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 해석을 가지고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의 지도자격인 스코필드 박사마저도 (세대주의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주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는 이밖에도 창세기 6장을 비롯한 몇 군데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스코필드의 주석이 거의 대부분 올바른 것이지만,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애호하는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회복역(Recovery Version)(註 1)의 설명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신성한 생명을 받기 위함이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신성한 생명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생활이란 생명의 흐름이므로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후자는 원인이고 전자는 결과이다.」
이에 덧붙여 윗트니스 리는 그의 <라이프스타디 야고보서 강해>에서 야고보서에서의 구원은 의롭게 된 사람들이 행위로써 받게 될 상급에 관한 것으로 지옥불로부터의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니! 그처럼 신약 경륜을 외치는 그가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카톨릭이 행위구원을 가르쳐 왔기에 하나님께서 마틴 루터를 통해 이신칭의의 교리를 회복시켰다고 주장하는 그가 야고보서에서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이 구절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가? 언제나처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딤후2:15)대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하나님의 경륜에 맞추어 해석해야 합당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음과 아울러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 구약성경을 읽고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구약 성도들도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을 받고 거듭났다는 주장은 완전한 거짓 교리이다(이에 관해서는 본 학회지와 기타 말씀보존학회 서적들, 특히 <열린성경 닫힌마음>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사도행전의 과도기를 거쳐 신약의 은혜시대에서는 로마서 4장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그 의롭게 됨은 믿음으로만 유지된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행위)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갈3:11). 그러나 교회시대가 휴거와 더불어 끝나고 야곱의 고난의 때(렘30 :7), 즉 대환란이 시작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그 믿음을 행위로 지켜야만 된다. 즉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마24:13).
구체적으로 말해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산상수훈을 지키며 유대인들을 돕고, 가장 작은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마25:45). 이처럼 믿음과 아울러 행함이 더해질 때 그 사람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요, 구원과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히1:14).
오늘날 교회시대의 죄인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생과 구원을 받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요1:12, 요일5:12,13). 이처럼 교회시대의 하나님의 경륜과 대환란 시대의 경륜은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고 하신 것이다.
야고보서는 역사적으로는 사도행전 시대의 유대인들(1:1에서 열두 지파에게 보낸 서신임이 분명히 나와 있다.)에게 주어진 것이요, 영적으로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지만, 교리적으로는(딤후3:16에는 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 교리임이 분명히 나와 있다. 교리는 어떤 사실이 그런가 아닌가를 판가름해 주는 진리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선 교리적으로 정확히 해석한 후에 영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 야곱의 고난의 때(대환란)를 당한 유대인 열두 지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 때의 유대인들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4장은 창세기 15:1-6을 염두에 두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은혜시대의 성도들에게 기록된 것이고, 야고보서 2장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창세기 22장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고전10:32)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루신다는 원칙을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성경대로 믿는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의 바울 서신을 교리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외의 부분은 이 부분과 일치하는 경우는 교리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역사적, 영적 적용을 통해 교훈을 얻고 책망을 받기도 한다(딤후3:16).
야고보서의 배열순서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고보서는 교회시대가 끝나고 환란으로 접어든 시대에 주로 교리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서신에 속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의 배열 순서를 전천년 체계에 맞추셨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어느 시대의 누구를 대상으로 교리적인 적용을 할 것인가를 잘 판단한다면 아무런 모순이 없게 되는 것이다. BB
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회복역은 웟치만 니의 후계자이며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윗트니스 리가 알렉산드리아계열 사본에서 번역한 주석성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