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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배교의 배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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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5월호>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3)
르네 데카르트(1561-1650)와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1748-1830)는 둘 다 예수회에서 양육받은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히틀러는 예수회가 아닌 베네딕트 수도사들에 의해 양육받았다) 바바리아 출신 카톨릭 신자였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최종권위는 성경이 아니었다. 그의 최종권위는 상상력과 함께 육체적인 감각이었다. 데카르트는 “사고 방법”을 위해 자신이 만들어 낸 규칙들(70여 페이지에 달함)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에 있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로써 무오한 사고방식이 생겨났고 이성은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신들로 군림하게 되었다(창 3장 참조). 데카르트는 선한 카톨릭 신자로서 인류는 로마 카톨릭 사제들과 교황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권위적인 계시로서의 성경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비록 교황에 의해 “선한” 카톨릭 신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예수회는 교황과는 달리 자신들이 하우프트와 몰리에르(1622-1673)는 물론 데카르트 역시 키워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예수회의 역사에는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는 그가 성경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천재라고 한다. 레싱(1729-1781) 역시 그가 마틴 루터의 가르침 대신 교황에게 순복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한다. 바이론, 쉘리, 하이네 역시 “수용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들 역시 “카톨릭적 영향 하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에 언급된 자들 가운데는 셰익스피어 이후 그 누구도 성경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빅토르 유고(1802-1885)만이 그의 <노틀담의 곱추>라는 작품으로 교황의 금서목록에 들어가게 된 성경을 믿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노틀담의 주인공들)의 모험담은 선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신부들”은 육욕으로 불타오를 뿐 아니라, 공갈협박을 동원해서 육욕을 채운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1750년부터 1774년까지는 흔히 “계몽시대”라고 불리는데 이는 루터의 독일어 표준원문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파한 경건파들과 모라비안 교도들의 전세계적인 선교운동 때문이 아니고 존 로크(1632-1704), 파스칼(1623-1662), 보일, 할레이, 라시느,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등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개인의 창의력을 억누르는 영향력을 잃어버리도록 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계몽”을 가져오기는 커녕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에 불과했다. 칸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어떤 증명도 없이 시도되는 막연한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가지고 그의 철학을 출발하여 결국 증명할 수 있는 사실들은 “과학”의 범주에 넣었고(골 2:8, 딤전 6:20) 반면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은 “종교”(갈 1:8-15)의 범주에 넣었다. 이 교묘한 철학 체계로 인해 독일의 모든 대학교수들(칸트를 믿고 따른)은 대학 캠퍼스에서 실험관이나 망원경 혹은 현미경을 통해 증명된 것은 참 지식인 반면 솔로몬, 모세, 다윗, 및 바울 등이 기록한 것은 참 지식이 아니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교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이 교만은 끝도 없고 완화될 수도 없음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로써 대학 실험실에서 관찰되는 물리적 현상만이 절대 진리가 되었고 반대로 하늘, 지옥, 동정녀 탄생, 육체의 부활, 새로운 출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등은 “비실재적”인 것들이 되고 말았다. 대학 실험실에서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증명할 수 있는가? 리옐, 팔레이, 그리고 다윈은 모두 칸트로부터 힌트를 얻어 그들의 “과학”을 세워나갔다. 이들은 파라오나 님롯만큼이나 “계몽된” 자였던 것이다.
헤르데르의 <인류의 역사, History of Mankind>가 1780년에 출판되었고 이 책은 점차 교육받은 계층의 교과서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 및 요한 바오로 2세의 1982년 순방 연설과 마찬가지로 후천년주의적이다.
과학에서는 “물리적 현상의 관찰”이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프리스틀리, 카벤디쉬, 폰 할러, 라마르크, 허쉘, 라플레이스, 제너, 폴타, 빙클만 등이 나와서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그 누구도 B.C.4000년 이래 존재해 온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 과학자들은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고,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고국이 지니고 있는 기아, 분쟁, 죄, 혁명,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죄와 죽음에 대한 치유책을 찾아내지 못했고 국제분쟁, 전쟁, 혹은 질병을 해결하지 못했다(“과학”은 구원받지 못한 철학자들에 의해 그 용어가 사용된 이래로 인류의 일곱 가지 큰 문제를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과학”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하는 것을 대체해 버린 업적을 세운 셈이다).
진젤도르프, 웨슬리, 번연, 휫필드, 에드워즈, 테넨트, 피니, 존스, 카트라이트, 무디 및 선데이가 영적 전쟁의 선두에 서 있는 동안 음악가들은 최대의 돌풍을 일으켰고(바하, 고노, 모짜르트, 헨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쇼팽, 브라암스, 와그너, 리스트, 베르디, 비제 등) 미술가들은 전세계적인 복음전파로 얻은 열매들을 거두고 있었다(렘브란트, 버미어, 고야, 터너, 호가트, 마네, 모네, 마티스, 쿠베, 세잔느, 르노와르, 반고호, 드가 등).
성령께서 로마 카톨릭, 불교, 도교, 이슬람교, 유교, “자유연애”, 진화론, 무신론, 무정부주의, 회의주의를 폭풍으로 휩쓸자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수백 가지의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농업 및 사회혁명이 일어났고, “과학”은 온갖 종류의 술책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커다란 “발전”과 “진화”가 일어났는지 구원받지 못한 자들 중 성경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천국이 세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고, 과학(딤전 6:20)과 철학(골 2:8)에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든 배교한 그리스도인 역시 “왕국이 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3년 말 히틀러는 나치운동을 “긍정적 기독교”(창 3:1을 볼 것)운동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당시의 미혹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히틀러는 대량살상을 시작하기 전 “기독교 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밀약을 체결하였고 매우 현명하게도 자신의 정부를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계 20:1-2)를 따라 이름지었다. “thousand year reich”이란 말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 땅에 “천국”(계 20:1-3)을 세울 수 있다는 믿음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어리석게도 모든 휴머니스트들은 이 사실을 믿고 있다.
라토레(그는 자기가 “침례교도”라고 고백한다) 같은 역사가는 교황의 입장에서 교회사를 집필한다. 즉 종교 역시 발전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교회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자극”이라는 용어가 라토레의 교회사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 용어가 성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개인, 민족, 국가, 교회를 위한 기독교적 자극이란 말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라토레는(웨스트코트와 홀트와 같이) 비카톨릭 신자로 성장했으면서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기독교” 조직이라는 가르침을 지지하고 유포하여 사람들로 이 사실을 신뢰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17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전세계적인 “개혁” 운동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의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교황의 칙령을 순종하려면 그랬다). 더 나아가 17-20세기 간에는 그 어떤 카톨릭 신자도 구원이 물침례 이외로부터 온다고 믿지 못하도록 강요당했다. 반면 전세계에서 <킹제임스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어떤 교회와 상관없이 죄인들을 구원하며 그 어떤 교회도 그 누구의 구원을 통제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설교시 유아세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회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피니와 스펄젼 역시 설교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회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적 자극”이란 윌리암 부스 장군이나 피터 카트라이트 만큼이나 “카톨릭”과 관계가 없다. 라토레가 뜻하고자 했던 바는 전세계적인 복음전파와 종교개혁 성경의 보급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15세기에 걸쳐서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단 3세기에 걸쳐 이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움직임이(이 역사는 권위역본과 여기에서 번역된 800여 개 언어로 된 번역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탄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귀는 교회 역사에 있어 주인공인 교회만큼이나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사탄의 역사와 목적, 계획 및 책략(고후 2:11)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교회사는 결코 교회사가 될 수 없다. 그런 책은 세속사에 불과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신약의 지역교회와 그 회원들은 그들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마다 매번 반대를 당해 왔다(행 2,3장; 4:31; 5:1-6, 8장; 9:1-4, 13:44-45; 14:3,4 등). 16,17,18,19세기의 복음사역과 선교운동이 아무런 반대 없이 환영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무지한 소치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교회사에 있어 가장 거대한 배교의 물결이 이 복음운동을 뒤이어 밀려왔다. 이 배교는 권위역본의 본거지인 영국에서 꽃피웠고 전세계로 신속히 확산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움트기 시작한 배교는 당연히 서쪽으로 전개되었다. 이 배교는 철학과(골 2:8) 연관되었고 한 학생 저널리스트(배교한 유대인이었음)의 활약으로 확산되었으며 생활을 위해 평생토록 정직하게 일해 본 적이 없는 로마 카톨릭 성경 개정자들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배교의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 프랑스에서의 예수회의 복권, 부모가 독일의 루터교회로 회심한 한 독일계 유태인에 의한 프랑스 혁명 이념의 체계화 등이 있었다. 이 배교의 카톨릭적 측면을 보자면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이 반-프로테스탄트, 반-권위역본, 반-표준원문 동맹체로 변질된 것이다.
이 배교의 “유대적” 측면은 토마스 뮨쩌(1770), 바보이프(1796), 에갈리투(프랑스, 1838), 하이네, 문트, 구츠코(독일), 바이트링(1842), 페르디난트 라살레(독일계 유태인, 1842), 푸리에(플아스, 1836), 카베 변호사(1856), 그리고 푸르동(1865) 등의 사상들이 일반화된 것이었다. 이들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유대인의 피를 받았으나 무신론자인 칼 마르크스와 같이 극단적 사회주의 혹은 극단적 공산주의의 형태를 지지하였다. 마르크스는 결코 새로운 사상을 창출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플라톤은(B.C.427-347) 헬라 철학자로 고대로부터 있어 온 이 모든 사상의 원천이었다. 그의 공화국은 철저히 국가가 통제하는 공산체제였다(가족을 국가가 통제하고, 혼인 역시 국가가 통제하도록 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매스컴을 이용 그의 사상을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 자신도 저널리스트였으므로(레닌과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뮨쩌, 바보이프 등이 접촉할 수 없었던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의 사상은 단순했다. 그는 일하기가 싫었으므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자 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자기들을 위해 일하도록 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발생된다고 결정해 버렸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원천은 죄가 아니고(약 4:1), 그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딤전 6:10)(권위역본은 마르크스의 속을 200여 년 전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정욕으로 인한 싸움이(약 4:1)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결론내렸다. 혁명이 “돈이 없는 자”에게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고용주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빼앗으면 되는데 무엇하러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단순화시키면 너무도 “간단해진다.” 한 마디로 말해 원하는 것을 훔치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를 사람이 있는가? 레닌과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는 정치국을 만들어(당을 장악한 19명으로 되어 있음) 1700만 명의 당원과 6억 5천만 명의 인민을 통제하는 체제를 만들어 냈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란 종교적 계급에 의해 통제되는 군사독재인 것이다. 이 종교계급은 “모든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의 최종권위로서” 진화적 과정을 숭배하는 “선행을 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그들의 죽은 성자인 레닌의 묘지로의 순례행렬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이들 종교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경찰(GPU, 후일에는 NKVD가 됨)이 창설되었고 이것은 후일의 KGB가 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비밀경찰 역할은 추기경과 예수회가 맡고 있다.
오늘날 칼 마르크스의 유품이라고 해 봐야 노동조합이 파업도 일으킬 수 없고, 노동자들은 기도도 할 수 없으며, 노동자들은 단결권도 갖지 못하는 거대한 강제수용소수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정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강제수용소에 가야만 한다. 이외에도 그들의 권리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평화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삼고 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유산은 중공으로 이곳에서는 그 어떤 혁명가도(마르크스와 레닌 같은) 24시간 이내에 처형되며, 그 어떤 흑인도 그 어떤 공직을 차지할 수 없고 “민중”에 의한 정부가 “민중”에 의해 세워지기 전에 4천만 명의 “민중”이 처형당했다. 모택동 어록이라고 해야 몇몇 용어와 열정을 제외하면 마르크스 전집의 내용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면(마 7:20), 그리고 정직한 역사 학도라면, 칼 마르크스는 미혹당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에서는(1750-1890) 안개와 비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는 그 강도가 좀 식은 감이 없지 않다. 어쩌면 독일의 맥주 대신 차를 즐기는 영국인들의 차분한 성품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신론과 혁명은 진화론(다윈)과 사회주의(페이비안협회)로 완화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영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자본론”을 다윈(1809-1882)에게 헌정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윈은 사태파악을 못했을지라도 칼 마르크스는 눈치가 빨랐다. 마르크스는 만약 영국 사람들이 다윈의 환상적 이론(생물학적 진화론)을 “과학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경제 이론도 “과학적”이라고 받아들일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체계화된 소득세, 의무교육, 상속과 사유재산 폐지, 총기압수, 계급없는 사회, 복지국가 및 인종통합 등은 모든 한 통속이 되고 만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는 어째서 공산주의자들은 비과학적인가를 설명해 준다. 진화론은 열역학 1,2법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엉터리 가설로 차마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진화론은 종교적 신념으로 전적으로 “비과학적”이다. 만약 “과학”(딤전 6:20)이 “관찰”에 의해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의 체계”라고 한다면 진화론과 계급없는 사회라는 이론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 두 이론은 그 어떤 “과학”과도 관계가 없다.
<킹제임스성경>의 창세기 1:1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기원”에 관한 그 어떤 과학도 있을 수 없다. “지질 연대, 지질시대” 등은 타락한 상상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어떤 지질이론을 가지고 인간의 기원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자신의 선함과, 동료 인간들(동물)이 상호 살상을 통해 “진흙에서 낙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과, 선행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종교적 광신자들의 착각일 뿐이다. 다윈과 마르크스의 체계 안에서 살상(killing)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종교적 광신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살상도 서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