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독일 용사들”- 경건파와 모라비안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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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11월호>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 마틴 루터와 존 낙스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이끄신 복음전파를 추적해 보면 성령의 움직임은 복음의 근원지에서 서북쪽을 따라 북아일랜드와 아이오나섬(영국 스코틀랜드 서해안 앞바다의 섬으로 켈트 족의 초기 기독교 중심지)으로 가서 정착되었고 한편으로는 발칸을 거쳐 독일 남동부, 북이태리 및 오스트리아 북부로 성령의 움직임이 이어졌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 경우 로마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 성령의 움직임은 결국은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으로 이어져 “대부흥”(The Great Awakening, 1720-1750)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직한 역사가라면 복음의 대서양 횡단은 요한 웨슬리와 죠지 휫필드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을 믿고 사용하였던 영국인이었으므로 이 두 사람과 유럽의 그 어떤 카톨릭 교회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음은 물론이다. 동시에 이 두 사람은 영국 혹은 독일의 국가교회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두 사람 다 루터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 조국의 성공회에 의해서도 반대를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있어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과 웨슬리와 휫필드의 사역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성공회나 루터교 이외의 그룹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다행이 이 두 사람과 종교개혁과의 관계는 투명하게 입증된다. 먼저 웨슬리는 루터가 원래부터 가르쳤던 은혜의 교리를 강조하는 모라비안 경건파의 사역 하에서 그리스도께 개종하였다. 이 사실은 마틴 루터의 직계 후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후일 루터교도라 불리움)이 “약속의 땅”(민13,14) 앞에서 등을 돌려 더이상 나아가기를 거부했음을 보여 준다. 멜랑크톤에 의해 교육, 문화, 세련미 등이 침투된 루터교회 대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적 진리를 전파할 다른 그룹을 찾으셨다. 루터의 개혁 이후 얼마가 지나자 문화와 배교의 물결이 루터교를 뒤따랐고(A.D.1600-1700) 결국은 독일 “고등비평”으로 유명한 관념론의 물결(1800-1900)이 복음의 불씨를 완전히 꺼 버렸다. 이 와중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라고 해야 몇몇 성경적 목사들과 복음 전도자들 뿐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그 누구도 웨슬리에 의해 주도된(1740- 1790) 영국의 부흥과 휫필드, 테넌트, 프릴링 휴이센(1720-1750) 등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부흥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영국에서의 종교부흥 사이의 유일한 연관은 요한 웨슬리가 앨러스게이트 선교지에서(1738년 5월 24일)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었다는 사실과 휫필드가 옥스퍼드 시절 참여했던 “Holy Club”운동 뿐이다. 웨슬리는 피터 볼러와 슈팡겐 베르크라고 하는 성경대로 믿는 루터교도들의 노선을 따르던(이들은 멜랑크톤의 죽음 후 기존 루터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독일의 모라비안 교도들에 의해 성경적 기독교로 (유아에게 물 뿌리는 성공회가 아니라) 인도되었다. 따라서 영적 의미에서 “사도적 계승”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리아 안티옥(행11,13,16)에서 시작되어 발칸 반도(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를 거쳐 유럽의 핵심부인 독일 남동부를 거쳐 영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로마와 로마 카톨릭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이 영적인 노선을 계승해 본 적이 없다. 1611년이래 영국과 미국에서 구원받은 약 4000만 명 중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수사, 수녀, 그 어떤 카톨릭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된 사람은 15명이 채 안될 것이다. 오히려 카톨릭은 이들의 회심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슴치 않고 그 일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결국 과업을 완수한 사람들은 독일의 “용사”들이었다. 이 복음의 용사들은 경건파(Pietists)라고 불리웠으며 이들로부터 모라비안이 나왔다. 모라비안들은 메노파(Mennonites), 아미파(Amish), 덩크파(Dunkens), 슈툰트파(Stundists) 등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다. 독일 사람들보다 더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사람도 드물다. 한 사람의 항의자(a PROTESTANT) 마틴 루터 같은 훌륭한 지도자는 세 나라(독일, 영국, 미국)를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다. 그 반대로 한 명의 나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a ROMAN CATHOLIC)는 약 500만 명의 독일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 넣었고 다른 15개 국의 사람들 15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경건운동은 독일의 국가교회였던 루터교라는 죽은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나온 영적 저항운동이었다. 경건파들의 확신은 간단한 것이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과 실행에 있어 그 어떤 것과 성경의 권위를 대치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죄인들을 이겨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끌어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셋째, 사람은 성사, 규례 혹은 행위와 관계 없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받는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며 그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어떤 천국도 세워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경건파 교도도 물 뿌리는 것이 죄인에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요셉이나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믿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로마 카톨릭의 미사,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국가교회, “제사장직”의 안수를 거부했다. 간단히 말하면 경건교도들은 가장 위험한 부류에 속하는 “후스파”요 “왈덴스”였으며 만약 그들이 20세기 미국에 살고 있다면 “위에 있는 권세”에 의해 “럭크만파” 혹은 “노리스파”로 불렸을 것이다. 그들의 영적 아비였던 루터의 추종자들은 한때 이런 것들을 믿었었다. 그러나 교회사의 악순환에 따라(복음전파, 교육, 문화, 배교) 독일의 기독교는 심지어 카톨릭마저도 용납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형식주의적이요 의식주의적이 되어 버렸다. 1700년대에 이르면 독일의 루터교는 음녀들의 어미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겨우 한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30년 전쟁으로 인해 (1618-1648) 종교적 논쟁에 국민들은 지쳐 버렸고 북쪽 지방에 있던 국가교회가 오스트리아(나중에는 바바리아 지방)의 국가종교와 같은 형태로 되돌아 가게 되자 성경대로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파 대신 냉냉한 종교의식과 형식적 설교를, 성경 강론 대신 신학논쟁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20:21) 대신 유아에게 물을 뿌리는 “짓”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윌리암 케리가 인도에서 선교를 하기 이전에 이미, 대영선교부가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세계교회협의회가 “선교사들을 돕겠다고” 나서기 훨씬 이전부터, 복음전파는 물론, 그린랜드, 북미, 아시아 및 서인도 제도에서 선교를 수행하였다.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했던 경건파운동은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선교 운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스페너와 프랑케가 할레에서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이미 또다른 독일계(오스트리아인) 크리스챤이 선교회 조직을 요청하였고 교회의 선교 의무를 지적하였다. 이 사람은 져스티니안 폰 벨츠라고 하는 남작으로(1621- 1688) 당시 죽어 버린 정통주의자들이 된 루터교도들을 각성시키려다 실패한 후 직접 선교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1688년 화란영 기아나에서 죽었다[멜랑크톤 식의 느슨한 기독교를 추종했던 “교양 있는” 신학자들은 폰 벨츠를 광신적이며, 이단적이고, 위선적이며 신성모독적인 인물이라고 혹평한다. 이들은 마태복음 7:6의 “진주들”이 복음이고 “개”와 “돼지들”은 구원받지 못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카톨릭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폰 벨츠 남작이 화란영 기아나로 자원해서 선교사로 가기 이전에 또다른 “용사” 피터 헤일링이 이집트와 아비시니아(1660)로 복음을 전파하러 갔으며 그는 그곳 아프리카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했다.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필립 제이콥 스페너(1635-1705)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였다(1663- 1727). 모라비안 형제단의 지도자들은 진젤도르프 백작(1700-1760)과 어거스트 슈팡겐 베르크(1704- 1792)였다. 웨슬리와 루터의 경우처럼 스페너나 프랑케도 처음에는 루터교회로부터 분리할 의사가 없었다(스페너는 루터교회의 신앙에서 떠났다고 비난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분리 의사는 없었다). 진젠도르프는 국가권력에 의해 색소니 지역에서 추방당했다(1736). [그들은 존 알 라이스와 R. G. 리가 후일(1930- 1970) 배우게 된 사실을 당시 배웠던 것이다. 배교한 교회나 학교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개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주님과 교제 전에 머물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면 이들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학교나 교회의 수입이 성경을 고칠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선생들이나 회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교회나 학교는 단 한 가지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즉 바닥 없는 구렁인 것이다.]

프랑케는 독일 최초의 기독교 대학을 세웠는데 이것이 후일 밥 죤스 시니어의 밥죤스 대학교, 하일스 앤더슨 대학교, 린치버그에 있는 팔웰의 학교들의 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대학운동(1930-1980) 을 주도하는 펜사콜라의 홀튼 대학 및 기타 다른 대학들에게도 표본이 된 셈이다. 프랑케는 죠지 뮬러처럼 고아원을 세웠으며 그의 고아들을 성경대로 믿는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로 키워냈다. 고아원과 학교는 독일의 라이프찌히 근처 할레에 세워졌다. 이 학교는 향후 200년 간에 걸쳐 등장한 모든 철학자들에게 성경적인 영향을 주었다. 과학과 철학(딤전6:20, 골2:8)은 교육분야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기독교의 가장 커다란 원수라는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향후 200년 동안 “과학 이론”과 철학 체계라고 사람들이 불렀던 것은 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고 저술했던 것들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교육을 받은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엡4:18)에 대해 사악하고 비과학적인 편견을 지니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편견은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무의식적이며, 지속적이며(사29:11), 절대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이들 교육받은 그룹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전하는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심한 분노를 일으킨다. 1984년 현재 미국에는 자기들이 어렸을 때 지옥에 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받았던 불쾌한 느낌을 없애고자 전 생애를 들여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외과 및 내과 의사들이 많이 있다. 보헤미안 형제단과 모라비안 형제단들은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학교 졸업생들에 의해 훈련받았다. 이들이 갖고 있던 영향력은 유럽의 지성인들을 어찌나 괴롭혔든지 얼마간은 정신착란에 이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필립 제이콥 스페너는 알사스 지방의 라펠바일러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바젤과 제네바에 있을 동안 영국의 청교도 작가들과 (특히 리챠드 박스터) 메노시몬즈의 침례교적 가르침에 동조하던 화란의 경건파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스페너는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자기 집에서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1666년부터 이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 모임들의 결과 분리, 구령, 복음전파 및 중생에 있어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국적인 부흥을 가져왔다. 당연히 스페너는 “이단”으로 몰렸고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 모임들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복음을 증거했고 이 운동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결국 프랑크푸르트 전역과 심지어는 라이프찌히 대학교에까지도 “경건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라이프찌히와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진은 1970년대 테네시탬플과 밥 죤스 대학교의 교수진들과 똑같이 ‘악한’ 의도로 색소니 선 제후에게 스페너를 대항하여 고소했다. 어거스트 프랑케 역시 라이프찌히에서 그 대학 교수진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었다. 이들 교수진들은 프랑케의 사역을 방해하였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출생(New Birth)이 필요하다는 그의 가르침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 대학교의 “근본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커스터, 포크너, 힌슨, 위즈덤처럼) 프랑케의 경건 운동은 학생들에게 공부를 (성경에 대한 파괴적 비평을 말함) 게을리 하게 할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비판적 태도”를 (물론 교수진들이 내세우는 파괴적 비평에 대해서) 취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1694) 브란덴부르크 선 제후는 자기 자신의 대학을 갖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위해 크리스챤 토마시우스(1655-1728)라는 사람을 시켜 할레에 대학을 세우도록 하였다. 토마시우스 역시 루터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해 라이프찌히로부터 교수진에서 쫓겨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경건파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이유로든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는 것 그리고 독일 대학교에서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프랑케와 스페너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프랑케는 결국 할레에 있는 이 대학교로 와서 고아원을 세웠고 1727년까지 2000명의 어린 아이를 키워 냈다. 할레의 이 학교는 6000명의 경건파를 길러 냈고 이들은 모두 훈련된 목사와 전도자가 되었다. 이를 뒤이어 모라비안들은 (같은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음) 향후 200년에 걸쳐 또다른 3000여 명의 선교사를 배출하게 된다. 이외에도 프랑케는 칼 힐레브란트 폰 칸슈타인(1667-1719)의 도움으로 성경 연구원을 세웠다. 이 연구원은 20세기에도 팜플렛 형태로 성경을 출판 보급하고 있다. 미국에 들어 온 루터교회는 독일의 할레 출신들인 목사들과 교사들에 의해 복음화 되었다.
루트겐 박사는 코펜하겐에 있는 왕궁 목사로 프랑케와 스페너에게 동인도로 갈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자원한 두 선교사는 바돌로매 지겐발크(1683-1719)와 하인리히 플루트샤우(1678-1747)였다. 대부분의 루터교회는 이들을 지원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따라서 할레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진이 이를 떠맡았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았던 비텐베르크의 교수진들은 플르트샤우와 지겐발크를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불렀다(이와 같은 짓은 교수 휴게실에 모여 앉아 “번역의 오류”와 “축자영감받은 원문”을 “더 잘 표현”해 보겠다고 논쟁을 일삼는 20세기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취하는 태도와 정확히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 48년 간 사역했던 크리스챤 프리드리히 슈바르츠(1726-1798) 역시 할레 출신이었다. 지겐발크는 인도의 타밀어로 신구약 전체를 번역하였고 350명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슈바르츠, 플르트샤우, 지겐발크는 아일랜드나 영국인이 아니라 용감한 독일인들이었다.

경건파운동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회사역에도 자극을 주었다. 테오도르 운터레이크(1653-1693)와 죠아킴 네안더(1650 -1680) 같은 사람들은 루터교 예배당과 성당에서 열리는 죽어 있는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고 회중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또다른 경건파였던 코티프리트 아놀드(1666-1714)는 교회사에 등장하는 “이단” 집단들이 잘못 이름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역사적 입장들”만 고수한다는 기존 정통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단단한 성경적 진리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교회사에 있어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였다. 진짜 이단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이름 붙였던 죽어 버린 정통주의 배교자들이었다.

니콜라우스 루드비크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1700년 드레스렌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터처럼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나 할레에서 프랑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인해 전심으로 자기 직업에 충실할 수 없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보헤미안들과 모라비안들이 색소니 지방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을 때(1722) 진젤도르프는 자기 영토에 마을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였다. 후일 이 마을은 “Hernnhut”(주님의 망대)라고 불리웠다. 모라비안 교회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이때쯤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1467년 자신들을 보헤미아의 “Unitas Fratrum”(형제연합체)이라고 불렀던 한 그룹이 그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이 세워진 후에는 장로회에서 나온 4명으로 된 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는 진젠도르프 백작 휘하의 레오나르트 도버라고 하는(1706-1766) 사람이 그 책임자였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20년만에 성공회와 루터교도들이 200년 간 수행한 선교사역을 능가하는 열정을 보였다. 도버와 니추슈만(1696-1772)은 서인도 제도에 선교사로 갔다. 크리스챤 데이비드(1690-1751)는 그린랜드로 갔으며 1735년에는 어거스트 고트리프 슈팡겐베르트(1704- 1792)의 지휘 아래 대규모 선교단이 죠지아 주로 건너갔다. 요한 웨슬리가 슈팽겐 베르트를 만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죠지아로 가는 여행 길에서였다. 요한 웨슬리가 영국을 부흥으로 이끌기 전 그는 두 명의 모라비안 형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둘 다 독일인들로 피터 볼러와 진젠도르프 백작이었다. BB

신약교회사 42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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