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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생애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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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2월호>
저명한 독일의 성직자요 교회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광부였다가 고위급 행정관이 된 존 루터(John Luther)의 아들로서, 만스펠트(Mansfield) 주에 소재한 작센(Saxony)의 이슬레벤(Isleben)에서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논리학과 철학 일반 과정을 이수했고, 스무 살이 되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윤리학, 그 밖의 다른 분야의 철학들을 강의했다. 그 뒤 부모의 권유로 변호사가 될 목적으로 민법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어느 날 친구와 들판을 걷다가 난데없이 내려친 번개에 맞아 루터 자신은 그 자리서 쓰러지고 옆 친구가 죽는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그 길로 세상을 등지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수도회로 들어가 버렸다. 루터는 거기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며 장서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전에 본 적이 없는 라틴어 성경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큰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읽고 또 읽는 중에 그 수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루터는 1년간의 수련(修練) 수사 과정을 거친 후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성직자가 될 것을 선서했고, 사제 취임식을 하고서 1507년 처음으로 미사를 직접 거행했다. 이듬해 비텐베르크 대학(University of Wittenberg)으로 옮겨 갔는데, 이 대학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속한 연로한 교수가 있었다. 당시 같은 수도원 수사였던 루터는 교수와 특히 죄들의 사함에 대해 의논했는데, 늙은 신부는 루터에게 “모든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며,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교리”라고 가르쳤다. 이에 루터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했던 사도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깨우치게 되었고, 전에 읽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해석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1512년 루터가 소속된 수도회의 몇몇 수도원들이 그들의 주교 총대리와 다툼을 벌이자, 루터가 로마로 가 그들의 대의명분을 주장할 자로 뽑히게 되었다. 로마에 간 그는 교황과 그의 궁정을 보았음은 물론, 그곳 성직자들의 관례를 관찰하고 그들이 미사를 거행하며 보여 준 조급하고 피상적이며 불경건한 모습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해 두었다. 그 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비텐베르크 대학에 머물며 신학 교수로서의 소명에 전념했다. 즉 로마서와 시편을 이전 주석자들과 완전히 다르게 설명했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으로 값없이 용서되므로 우리가 이 풍성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아들께로 부지런히 돌려놓았던 것이다.
1513년 3월, 율리오 2세(Julius II)를 뒤이은 레오 10세(Leo X)는 율리오 2세가 시작한 성 바울 대성당(the Church of St. Paul) 건축 계획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1517년 대성당 건축에 한 푼이라도 기부하는 자들을 위해 전 유럽에 걸친 총체적인 면죄를 발표했으며, 각 나라마다 대표들을 임명해 면죄를 찬사하며 사람들을 면죄해 주고 돈을 긁어모으게 했다. 이 괴이한 행위들로 비텐베르크 전역에 성난 아우성이 메아리쳤고, 특히 루터의 경건한 열성을 확 타오르게 했다.
1517년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전날(10월 31일) 밤,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성곽 옆에 붙은 교회 문에 면죄에 관한 논문을 공개적으로 붙여 놓았고, 그 글 서두에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글로든 논쟁으로든 한번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걸었다. 이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이단으로 고소했고,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도 작센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루터의 주장들을 틀어막을 일에 대해 고심했다. 루터의 주장은 로마카톨릭과 황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일이었던 것이다. 루터의 대적들이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려고 루터와 교섭을 벌이고 있는 사이, 루터의 교리들은 크게 우세를 떨쳐 고국과 해외에서 격려가 빗발쳤다. 보헤미안들은 개혁 작업 중 순교한 존 후스의 책과 편지들을 보내 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말고 잘 참고 인내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위대한 학자들도 루터에게 가세했다.
레오 10세는 루터의 대적들의 끈덕진 간청에 못 이겨 1520년 6월 15일자 교서에 루터를 정식으로 정죄함을 발표했다. 세족 목요일[Maunday Thursday, 부활절 전 목요일로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의 발을 씻으신 것을 기념하고, 또 성체와 서품(敍品)의 성사(聖事)를 그리스도께서 정한 것을 기념하는 로마카톨릭의 날]에 교황의 견책을 받고 처음으로 고소당한 마틴 루터는 부활절이 지난 후 보름스(Worms)로의 여정에 박차를 가했고, 그곳에서 황제와 독일의 모든 나라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끊임없이 진리를 고수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대적들에게 답변해 주었다.
샤를 5세는 자신도 교황의 판결에 따라 루터를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된 교회 분리론자요 악명 높은 이단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는데, 이에 루터는 교황과 주교들을 대적해 노골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황 세력들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교황의 교서를 대적하는 책과 “주교들의 위계”라 불리는 성직위계에 대항하는 책을 1522년 각각 한 권씩 집필했다. 또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후에 루터 자신과 멜란히톤(Melanchthon)에 의해 교열되었다.
1527년 루터는 심장 부위의 혈액이 갑자기 응고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다. 1533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1530년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표한 신조)을 고수한 연유로 고난을 겪은 오샤츠(Oschatz) 시민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1534년에는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같은 해에 <미사와 사제들의 화체설에 대한 반론>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537년 2월 슈말칼트(Smalkald)에서 종교 문제를 둘러싼 회합이 열렸을 때 멜란히톤과 함께 부름받았는데, 모임에 참석한 루터는 몹시 심한 병에 걸려 다시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남긴 유언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듯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과업에 전념한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예순셋을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을 에워싼 이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두세 번 열린 적이 있는 트렌트 공회와 교황이 복음을 거슬러 이상한 것들을 고안해 낼 것이기 때문이오.” 오전 9시가 되기 전, 자신의 임종 시간이 다가오는 걸 느낀 루터는 경건한 기도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영원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께서는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나이다. 저는 그분을 알았고, 그분을 저의 생명과 건강과 구속으로서 사랑했지만, 그 악한 자는 그분을 박해하고, 욕하고, 상처를 입히며 괴롭혔나이다. 제 혼을 주께로 인도해 주옵소서.” 이후 그는 다음처럼 세 번 연달아 말한 뒤 그를 구원하신 주님의 품에 평안히 안기게 되었다. “저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를 구속해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