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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여왕 통치기간 중 화형당한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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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8월호>
영국 왕의 유언에는 영국의 왕위를 수프폭크공작의 딸인 레이디 제인에게 양도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5일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이은 메리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존 로저
존 로저는 순교자 윌리엄 틴데일과 마일즈 커버데일을 통해 개심하게 되었다. 그는 “토마스 매튜”라는 이름이 붙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그들과 합류했다. 그는 영국에서 개혁을 증진시키는 일을 도왔으며 바울성당에서 봉사했는데 거기서 메리여왕이 왕좌에 오를 때까지 계속 있었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에드워드왕 통치시절에 가르쳤던 참다운 교리를 더욱 확증했으며 교황제도와 우상숭배, 미신의 병폐를 주의하라고 사람들을 훈계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소환당해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여왕은 참된 설교를 금지시켰고 그의 적들은 이 기회를 이용했다.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한 후 그는 화형선고를 받았다. 자신의 교리를 철회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때 그는 “내가 설교했던 것을 나의 피로 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그의 아내와 10명의 아이들은 그가 스미스필드로 가는 길에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혈육이 당하는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면서 놀랄만한 인내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로렌즈 사운더즈
로렌즈 사운더즈 목사는 하나님의 참다운 종교가 소개되었던 에드워드왕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잘못된 카톨릭 교리들을 담대하게 반대했다. 여왕의 무리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대단히 불쾌해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넣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었던 왕실 수석 배우들인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의 사랑덕분에, 또한 그의 설교에서 법적으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풀려났다. 악의에 찬 박해음모를 알아차린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떠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후 그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화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화형장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늘 신발을 만들어 주던 가난한 구두공이 소리쳤다. “오 나의 선한 주인이시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힘을 주시고 위로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운더즈가 응답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높은 지위에는 맞지 않은 사람이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이 시련을 이겨내도록 힘을 주실 걸세.” 1555년 2월 8일 그는 화형당했다. 화형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윌리엄 헌터
어려서부터 그는 경건한 부모의 영향으로 건전한 교리로 양육을 받았다. 열아홉 살때 그는 미사 때의 성체배령을 거부함으로써 주교에게 끌려갈 것이라고 협박을 받았다. 그는 신앙을 포기하면 용서와 안전이 보장되리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틀밤낮을 기둥에 묶여서 빵 부스러기와 물 한컵만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손도 대지 않았다. 2일 후 그의 믿음에 전혀 변동사항이 없음을 알고 주교는 그를 감옥에 넣었다. 계속해서 그가 믿음을 부인하지 않자 주교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화형대에 다가가자 그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는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여 나의 영을 받으소서”라고 말했다.
존 후퍼
존 후퍼는 에드워드 6세때 런던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에서 그는 죄를 바로잡고 세상의 불의와 교회의 부패한 죄악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매일 수많은 무리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때로 그가 설교할때 교회가 꽉차서 문안으로 더이상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왕 앞에서 설교한 후 그는 곧 그라우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2년간 그 직무에서 봉사했으며 너무나 모범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의 적들조차도 그에게서 어떤 비난거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주의깊고 부지런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에드워드왕의 시대에는 종교가 건전했고 번성했다. 그는 보더와 헬스박사 앞으로 소환된 후 공의회에 넘겨져서 여왕의 돈을 빚지고 있다는 거짓고소를 당했다. 감금기간중 그는 로저목사를 만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밤중에 후퍼는 시내를 통과해서 뉴게이트로 옮겨졌다. 이런 일이 비밀리에 행해졌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에 불을 켜고 나와서 그를 격려하며 그의 변치않는 믿음에 하나님을 찬양했다. 뉴게이트에 있는 얼마동안 보더와 다른 사람들이 자주 와서 그의 믿음을 철회시키고자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전에 가르쳤던 진리를 자신의 죽음으로 확증코자 했다.
1555년 2월 9일 8시 정각에 그는 화형장으로 갔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장이 서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여들었다. 그가 돌아서면 여왕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제안을 다시 했다. 물론 그는 거절했다. 장작더미의 부족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서 세 번이나 불이 다시 지펴졌다.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으소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잠자는 아이처럼 조용하게 죽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하늘나라의 즐거움 속에서, 축복받은 순교자로 있으리라.
해드리의 로우랜드 테일러
로우랜드 테일러는 해드리의 교구목사로 죄와 악행에 대해서는 단호했으나 가난하고 병들고 불구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축복된 기억들이 끝난 후 메리여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의 교구민 중 두 명이 두번이나 해드리 교구교회에서 온갖 미신적인 의식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기로 결심했다. 데일러는 교회에 들어와서 단호하게 이 일을 막았다. 그러나 클락이라는 사람이 그를 교회 밖으로 내몰고 미사를 집전케 하고는 즉시 윈체스터의 주교인 대법관에게 그의 행동을 알렸다. 그는 소환당했다.
그의 친구들은 대륙으로 도망하라는 충고를 해주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기꺼이 그 소환명령에 응했다. 가디너주교는 그를 보자 관례에 따라 테일러를 꾸짖었다. 그는 이런 집권남용을 인내하며 들었다. “어떻게 감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거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라고 주교가 말했을 때, 테일러는 대답했다. “당신은 윈체스터 주교이자 대법관인 스테판 가디너요. 그러나 당신도 언젠가는 죽을 사람에 지나지 않소. 내가 당신의 얼굴을 두려워해야 한다면, 당신은 왜 우리 모두의 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거요. 어떤 얼굴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거요?”
오랜 대화 끝에 가디너는 소리쳤다. “너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이다! 너는 참으로 신성모독자이며 축복된 성사를 모독했으며, 거룩한 미사를 배척했다. 미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희생제로 드리는 것인데...”라고 했다.
그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나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축복된 자들이라고 믿소. 하나님께서는 참새까지도 돌보시며 내 머리카락까지도 다 아시니 그러므로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시오. 그를 믿고,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하시오. 나를 죽은 자로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나는 살 것이며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그가 화형을 당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기도하며 화형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기도했다. 워윅이란 사람이 잔인하게 장작을 그에게 던졌다. 그것은 그의 머리에 맞아서 그의 얼굴이 찢겨지고 피가 흘렀다. 그가 영어로 찬송가를 부르자 존 쉘톤이 그의 입술을 치며 “라틴어로 말해!”라고 소리쳤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졌고 그는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손을 모으고 똑바로 서 있었다. 소스라는 사람이 마침내 창으로 그의 머리를 치자 그의 시체는 불속으로 떨어졌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