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교회사 분류
미국의 대부흥은 이렇게 전개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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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1월호>
웨슬리와 휫필드의 사역은 교회사가들이 “대각성”(The Great Awakening, 1720-1750)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움직임과 분리될 수 없다. 이 기간에 일어난 부흥에 관련된 모든 설교자들과 회심자들은 (웨슬리의 부흥 때와 마찬가지로) 킹 제임스 성경을 믿었고 그 성경으로 설교했다.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오순절파, 몬타니스트, 성공회, 제 7일 재림교, 프란시스꼬 수도회 등이 뒤엉켜 있는 칼빈 당시의 제네바를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칼빈과 낙스로 이어지는 실천신학의 줄기는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로 집약되고 루터, 슈벵크벨트, 스페너, 진젠도르프 등으로 이어져서 퀘이커, 메노파, 모라비안, 아미파, 둥커파 등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
잘 알려진 메이플라워 그룹(1620)인 브루이스터, 브래드포드 및 죤 로빈슨 등은 당시 분리주의자(Separat -ists) 혹은 비순응주의자(Noncon- formists) 등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명칭들은 영국에서 침례교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분류해 보자면 그들은 오히려 청교도(Puritan)에 가까웠지만 그들의 신앙은 퓨리탄들만큼 부정적인 의미에서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로빈슨 목사의 임종시 발언은 1600년경의 유럽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정곡을 찌르는 강령인 셈이다.
“나는 개혁교회들의 상황에 비탄을 금할 수가 없다... 루터파들은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1994년 현재 “근본주의자들” 역시 1909년 스코필드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 역시 칼빈이 남겨놓은 그것을 붙들기에 급급하고 있다... 물론 루터와 칼빈은 그들 시대에서는 반짝이는 귀중한 별들이었다.”(스코필드와 스펄젼도 그들의 시대에 그랬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뜻을 다 보여 주신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는 그 분의 거룩한 말씀으로부터 비춰주실 훨씬 많은 진리와 빛이 남아있다.
로빈슨의 임종시 발언은 “이중영감설” 혹은 “점진적 계시”라는 용어로 불리면서 이단시되었다. 밥 죤스 2세와 트루먼 달라는(1979년 현재) 밥 죤스 대학교 교수진들과 함께, 로빈슨 목사가 “전체적으로 축자영감 받은 원본” 대신 번역본들을 통해 더 많은 계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 두목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A.D.300년부터 1994년까지 그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운 모든 진리들은 번역본들을 통해 계시되었으며, 1611년에 나온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은 RV (1881), ASV(1901), NASV(1960), RSV(1952), NRSV(1970) 및 모든 원어 필사본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629년부터 1640년 사이에 거의 2만여 명의 청교도들이 성공회 기도집을 사용하라는 지시에 항거하여 메이플라워 그룹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청교도였던 헨리 제이콜은 1616년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며 미국의 여러 도시에 회중 교회를 세웠다. 후퍼 감독과 로버트 브라운은(이들 역시 청교도였다) 미국에 회중 교회들을 세웠다. 필립 쉐프는 루터 역시 죽기 전에 회중 교회를 세워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루터는 어떤 종류의 교회국가에도 강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다. 독일의 루터교회마저도 루터는 원치 않았다는 말이다. 루터는 좀더 살았더라면 루터교도 대신 침례교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침례교도들은 회중에 의한 자치를 믿으며, 그들에게는 지역교회만이 모든 일에 있어 결정기구이며 로빈스 목사의 말대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만 복종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교도 마을은 윌리암 코딩톤이 세운 포트마우스(Portmouth)와 뉴포트(New- port)와 사무엘 고톤이 세운 워윅(Warwick)과 로져 윌리암스가 세운 프로비던스(Providence)이다.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는 로져 윌리암스가 세운 것이 아니고 존 클라크가 1639년 뉴포트에 세웠다. 이 교회는 로져 윌리암스가 침례받기도 전에 세워졌는데도 친카톨릭 역사가들은 로져 윌리암스를 미국 최초의 침례교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존 클라크의 배경을 조사해 보면 왜 교회사가들이 로져 윌리암스를 굳이 최초의 침례교도라고 주장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존 클라크는 런던의 한 교회에서(스틸웰 목사가 담임목사였다) 침례를 받았는데, 그 교회는 영국의 침례교도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화란에서 온 화란의 메노파교도들이 세운 교회였다. 화란의 메노파교도들은 왈덴스로부터 왔으며 이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영국의 침례교도들마저도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존 스미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독일 침례교도들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 독일의 찬송가였던 아우스분트(Ausbund)는 영국과 독일에서 메노파와 침례교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우리의 옛 “이단” 친구들 중 세 그룹이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지방에 갑자기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이단 그룹을 추적해보면 그들은 최초로 “도나티스트”와 “노바티안”으로 불렸고, 후일 도나티스트란 명칭이 독일의 재침례파(Anabaptists)와 화란의 메노파 교도들에게 사용되었다.
모라비안들은 오래전부터 왈덴스와 동일시되었으며, 1315년 경에는 (독일 출신의 한 왈덴스였던) 월터 로라드의 추종자들이 “로라즈”라고 불렸음을 상기해 볼 때 우리는 미국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교회의 배경을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 창설자는 유럽 교회에서 안수받은 사람으로 그가 속해 있던 교회는 전적으로 도나티스트(4세기), 노바티안(3세기), 몬타니스트(2세기), 및 요한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을 본받은 교회였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던 존 클라크의 배경이라고 할 수있다.
이들 침례교도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왈덴스(Waldenses)로 불렸다. 따라서 로져 윌리암스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고 하는 그의 사상을 영국의 침례교도들로부터 배웠는데, 이들은 그 사상을 영국 성공회나, 장로교회나 혹은 청교도들로부터가 아니라 왈덴스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뉴욕에 있는 롱 아일랜드와 스테이튼 아일랜드에는 자신들을 “왈덴스”와 “재침례파”로 부르는 그룹이 실제로 있었다.
당시 칼빈주의적 청교도들 안에는(존 코튼, 토마스 후커, 코톤 마더 및 존 윈스롭 등이 메사츄세츠 안에서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음) 4, 5세기의 도나티스트들처럼 성인만을 침례주며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가르침을 유지하고(위클리프 휘하의 모든 로라즈 그룹도 이렇게 가르쳤다.) 그 어떤 국가교회도 지역교회의 행정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들어 있었다. 이처럼 미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폭발의 불씨를 이미 자체 안에 안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종교 자유의 모퉁이돌로서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식민촌 건설을 허락한 사람은 교황의 추종자였던 찰스 1세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찰스 1세가 카톨릭교도들이 박해받지 않고 미국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묘안이었다. 그는 (교황을 포함해서) 모든 다른 훌륭한 카톨릭적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안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는 “관용”과 “종교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미국인들에게 부탁했다. 로마의 전략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덩커파, 메노파 및 스위스 형제단은 펜실베니아에 정착했다. 이들과 함께한 그룹 중에는 아미파도 있었으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 이 그룹은 17세기 스위스에서 제이콥 아메른(Jacob Amern)에 의해 시작되었었다. 뉴져지에 정착한 한 퀘이커 교도였던 존 울맨은 젊은이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뉴져지 동부로 선교사들을 보냈다(1701). 물렌베르크는 1742년 펜실베니아에 루터 교회를 조직했다. 그는 이전에 독일의 경건파교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었다. 1700년쯤에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장로교인들이 상당수 미대륙에 정착했다. 1710년 경에는 미국에 12개의 장로 교회가 세워졌고 1729년 경에는 27명의 사역자가 이들 교회를 이끌었다. 영국에서 성공회와 아일랜드에서 카톨릭에 의해 박해받았던 장로교인 수백 명이 대서양을 건너갔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매릴랜드(“마리아의 땅”)로 이주했으며 그들 손에 맥주와 위스키를 들고 나타났다. 장로교인들과 청교도들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 모든 그룹들 중 가장 박해를 받았던 그룹은 침례교도였다. 카톨릭 역사가들은 미국에서는 “깊이 자리잡은 편견” 때문에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카톨릭이 중세 1000년 동안 자행한 악에 대한 올바른 “편견”이었다) 카톨릭은 늘 “관용”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이들 카톨릭보다 더 비관용적 대우를 받았다.
로드아일랜드에는 2개의 침례교회가 세워졌고(1638, 1656), 메사츄세츠에 2개(1663, 1665), 뉴져지에 4개(1707), 그후 로드아일랜드에 9개가 더 세워졌으며(1750), 코네티컷에 7개가 세워졌다(1750). 이들 침례교도들은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혔고, 벌금형에 처해졌고, 체형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저주받았고, 재판에서 추방령을 받고 쫓겨났으며, 회중교회, 장로교회, 청교도 및 개혁교회들에 의해 위협당했다. 이들은 그 어떤 형태의 유아 세례(baby sprinkling)도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치명적”인 진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모든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이다.
토마스 페인러는 한 아이에게 침례주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채찍질을 당했다. 토마스는 유아에게 물을 뿌리는 행위는 반기독교적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하바드대학교의 총장이었던 헨리 던스터(Henry Dunster)는 4명의 어린아이의 이마에 물을 축이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총장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오바댜 홈즈와 존 클라크는 유아에게 물을 뿌리는 것을 부인했다고 해서 20파운드 벌금과 채찍형을 당했다. 다른 이들도 유아에게 물을 뿌리는 행위는 아무 “효용”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여러 차례 감옥에 가야 했다(1665년 보스톤에서).
존 코톤과 뉴잉글랜드 지방의 모든 회중교인들은 로져 윌리암스의 사역에 반대했다. 죠지 폭스(1624-1691)가 세운 퀘이커 그룹이 유아 세례를 주지 않는다고 하자 이들 역시 주권적 은혜와 무조건적 선택은 물뿌림에 의해 조건지워진다고 믿었던 “극단적”(five pont) 칼빈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코톤 마더는 첫번째 부활은 오직 영적일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실로 미트라를 쓰지 않은 교황으로 군림했다. 사실 청교도 제국주의는 바티칸 제국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왕께 바치는 헌사에서 언급했던 것이다. 반면 카톨릭 역사가들은 바티칸궁에서 살고 있는 왕관 쓴 통치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티칸이 제국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수긍하려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희한한 이들 역사가들은 미국에 있었던 “청교도 제국주의”(Puritan Imperialism)는 끊임없이 언급하면서도 바티칸 얘기는 전혀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청교도들이 거리에서 설교하는 사람을 화형에 처하거나 채찍질하거나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 사실인 것처럼 로마 카톨릭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카톨릭 교회는 청교도보다 30만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사가들이 제임스 1세와 찰스 2세 치리하에 아일랜드 사람들에 대한 처우를 비판하는 것은 짐 죤스가 미국 의회의 조사를 불평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1979). 제임스 1세와 찰스 2세 시대 이전에는 피의 메리 여왕의 잔인한 살상이 있었으며, 메노파, 재침례파, 왈덴스, 불가리안, 위그노, 보도, 로라즈 및 “마니키안” 같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5백만 명이 살상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유명한 코네티컷 주의 “안식령”(blue laws)은 초기 미국 정착지들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이들은 채찍에 맞았고, 목매달렸으며, 투옥되었고, 영국에서 도착하자마자 추방되었다. 퀘이커의 창시자 죠지 폭스(George Fox)는 전천년주의자였으며 유아 침례를 반대하였다(도나티스트처럼). 그는 한 사람의 추종자도 없이 영국과 유럽과 미국에서 설교하였다. 성직자들이 계시록은 닫혀진 책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봉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폭스는 극단적 문자주의자였다. 그는 요일들을 “월, 화, 수, 목, 금, 토, 일”로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들 요일들이 이교도들의 신들(gods)의 이름을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 건물을 “첨탑빌딩”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이 교회란 “불려나온 무리”(called-out assembly)라고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 교리를 왜곡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설교로 수천 명이 주 예수께로 돌이켰다. 그는 참된 사도들의 본을 따라 박해받았고, 매맞았으며, 돌로 침을 받았고, 체포되었으며 투옥되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는 오직 한 가지 책만을 믿었다. 그는 그 책을 “성경”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1611년에 나온 킹 제임스 성경이었다.
바로 이러한 토양 위에 웨슬리와 휫필드의 메시지는 떨어졌으며, 이 좋은 땅에서는 수많은 열매가 걷혔던 것이다. 종교적 배타주의의 표적은 실로 미국 땅에도 있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못한 음녀들의 어미(계 17:1-6)에게서 자라난 음란한 자녀들로부터는 그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하루 아침에 말끔히 청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땅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어린이들 외에도 로마에 의해 성장되지 않은 일련의 어른들이 있었으며, 사실 이들 중 상당수는 로마 교회와 전혀 무관했던 자들도 있었다. 사실 미국은 대국이며 모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 교회 주창자들의 제거가 가능한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고, 성인 침수를 원하지 않는 마을이 있다면 그것을 원하는 마을이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유럽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잘 훈련된 “갱”들을 통하여 24시간 이내에 사태를 장악할 수 있는 체제였던고로 로마 카톨릭이라는 동물원에 모든 사람이 갇혀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침례교도들은 녹슨 버터처럼 퍼져나갔고 노스캐롤라이나(1727), 버지니아(1780), 인디아나(1802) 등지에 교회들을 세워나갔다. 1790년경에는 죠지아에 42개의 독립침례교회들이 세워졌고 테네시에 18개, 켄터키에 10개가 세워졌다. 1838년까지는 알라바마, 아이오아, 텍사스, 알칸사, 루이지아나, 위스콘신, 오하이오 및 미주리에도 독립침례교회들이 세워졌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