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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공격(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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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2월호>
C.I. 스코필드(1843-1921)는 미시간에서 태어나 테네시 주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남북전쟁이 후에 세인트 루이스로 이주했고 그후 다시 캔사스로 옮겨 그곳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용감하고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형편없는 술꾼이었던 그는 YMCA의 토마스 S. 맥피터즈라는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스코필드는 무디와 선데이처럼 회중교회의 회원이었다. 그는 1890년 중앙 아메리카 선교회를 창설했고 1909년 <킹제임스성경>을 본문으로 한 관주성경을 발행했다. 스코필드는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RV와 샤프와 그린의 ASV를 읽어본 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관주성경의 본문으로 <킹제임스성경>을 택했다. 이 스코필드 관주성경 덕분에 미국의 침례교 목사들 중 절반 가량이 신학교에서 무천년주의를 배우고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천년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A.T.로버트슨은 루이스빌에서 칼빈의 이단 교리를 가르친 배교한 근본주의자였다. 당시 저드슨, 머서, 스팃슨, 클라크 대학 및 바일러 대학 등에서는 어거스틴과 제롬이 만들어 낸 옛 이단 교리, 즉 후천년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프랭크 노리스 덕분에 침례교도들은 현대주의로부터 성별하여 올바른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고, 스코필드 덕분에 재림에 관해 올바른 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1910년부터 1970년 사이에 등장한 남침례교도 중 구령할 줄 알고 정통 교리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면(빌리 그래함, 해롤드 스미스, 크리스웰, R.G.리 등) 그들을 지켜 준 것은 다름아닌 클라렌스 라킨의 <세대적 진리>(Dispensational Truth)와 <스코필드 관주성경>(Old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이었다. 러시아 혁명(1917) 이전 스코필드 관주성경 편집자들은 러시아를 다가올 열강으로 꼽았다(에스겔 38,39장을 근거로). 이와 같은 통찰력은 ASV나 RV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의 판단은 AV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각주에는 적그리스도는 사람이며, 지옥은 실제로 불타는 곳이고, 믿는 자의 구원의 보장은 영원하며, 휴거는 대환란 전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는 예루살렘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킹제임스성경>에서 도출해 낸 이와 같은 진리는 모두 반카톨릭적이다. 따라서 그 어떤 카톨릭 신자나 주교, 추기경, 사제, 수도승, 수녀 혹은 교황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원문에서 나온 번역본(KJV)을 추천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알란드, 메쯔거, 네슬, 그리고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 원문에서 나온 번역본들(RV, ASV, NASV, NIV...)을 추천해 왔으며 앞으로도 추천할 것이다.
헨리 클레이 모리슨(1857-1942)은 켄터키 출신의 감리교 순회 전도자로서, 샘 존스와 프란시스 애즈베리와 같이 훌륭한 순회 설교자였다. 그는 애즈베리 신학교(현재는 자유주의 신학교로 변질되었음. 복음전파, 교육에 이은 문화와 배교의 악순환을 기억할 것)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모리슨의 주요 사역은 “수련회 집회”(camp meetings)였다. 윌리암 제닝스 브라얀(1860-1925)은 모리슨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평가했다.
밥 슐러(1880-1965) 역시 감리교 출신의 순회 전도자였다. 그는 오랫동안 (1920-1960)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있는 트리니티 감리교회에서 목회했으며, 미국의 소돔과 같은 이 도시에서 “주님의 전사 밥”은 동분서주하면서 죄를 지적하고 다녔다. 그는 또한 당시의 감리교계 지도자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는 다섯 아이를 키웠는데 그 중 세 명이 목사가 되었다. 슐러는 성경대로 믿는 구식(현대주의가 아님) 감리교 설교자였으나 그의 뒤를 이은 로버트 슐러는 세속적인 아마츄어 심리학자로서 버지니아 출신의 구식 설교자인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자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역한 슐러 부자의 관계는 마틴 루터와 마이클 루터 킹 쥬니어의 관계와 같다.
존 윌버 챔프맨(1859-1918)은 뛰어난 목사는 아니었지만 열정적인 전도자이며 캐나다, 하와이, 호주, 뉴질랜드, 스코틀랜드, 일본, 영국, 타스마니아, 필리핀 등에서 설교하였고 두드러진 성과를 얻었다. 그는 빌리 선데이가 사역을 시작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챔프맨은 약 5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임 사역자로 나서도록 이끌었다.
조나단 고포스(1859-1936)는 허드슨 테일러(1832-1905)의 책을 읽고서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고포스 가족은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 체포되어 심하게 부상당했으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고포스 부인이 쓴 그들의 사역에 관한 일기는 해외 선교에 관한 위대한 책이며, 필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다음은 고포스 일가가 중국의 폭도들에게 위협받고 있을 때의 일화이다. 중국 폭도들이 “외국 마귀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고 외치자, 열 살 난 고포스의 아들이 “우리를 죽이지 말아요. 우리는 카톨릭이 아니라구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폭도들의 두목이 부하들을 막으면서 “죽이지 마라. 이 사람들은 못된 외국 마귀들이 아니고 좋은 외국 마귀들이니라.”고 말했다고 하니, 미국의 언론들보다도 훨씬 훌륭한 분별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구원받지 못한 중국 농부들이 때로는 미국의 하원의원과 상원의원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엉클 버드 로빈슨”(1860-1942)은 테네시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텍사스로 이주했다. 그는 20살 때 회심했으나 글을 몰랐다. 그가 하는 영어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회심한 이후 47년 간을 전적으로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국민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전생애를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렸던 것이다. 그는 1611년 권위역본만을 사용했고 100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33,000여 번의 설교를 통해 10만여 명의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버드는 헬라어를 알고 있던 웨슬리만큼이나 <킹제임스성경>의 “근본적인 사항들”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교리적으로 동일한 입장을 고수했다. 버드는 나사렛 교단이 냉랭한 감리교단으로부터 분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자였지만(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실로 온유한 영을 가진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로 인해 생활이 정결케 되고 지역 전체의 생활이 변화되었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의 감리교 친구인 밥 슐러의 트리니티 감리교회를 위해 설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당신들이 담배를 씹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했다고 하지 말라. 나는 ‘감리교 신자라면 어떻게 그가 삼키기를 두려워하는 그것을 씹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로드니 “집시” 스미스(1860-1947)는 진짜 집시 출신으로 영국의 레이톤스톤 근처의 천막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죽은 후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스미스는 집회를 열 때마다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당시 RV(1885), ASV(1901)가 널리 유포되고 있었고(영국과 미국에서) 배교한 모든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추천하고 있었지만 이 집시 출신 전도자는 이들 부패한 성서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미국을 다섯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구세군의 윌리엄 부스 장군과 함께 일했던 초창기 시절 그는 거리에서 설교했고 한번은 영국에서 옥외 집회 도중 카톨릭 신자들에 의해 폭거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초창기 설교는 강력했다. “술과 도박은 사라져야 한다. 교만, 이기심, 비열함, 그리고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든 것이 당신의 삶에서 사라져야 한다. 쾌락을 향한 사랑과 쇼에 대한 애착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마음을 완전히 없애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저 하늘나라의 아침 바람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상쾌하기를 바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죽이라.”
집시 스미스는 호주 및 영국의 덴버, 런던, 에딘버러, 맨체스터 등지에서 설교했고 미국도 방문했다(1889, 1892, 1906). 1905-1915년 사이의 미국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의 평가는 미국에서 1901년 ASV의 등장과 더불어 배교의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 국민들이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양적으로, 재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영적,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는 물질적 생활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15년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스미스의 설교를 듣고 150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파리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 사역할 때면 그는 회중교회 목사들의 도움을 받았다(영국에서는 영국 국민 자유교회 소속이었다). 그는 일리노이의 페오리아, 브룩클린, 애틀란타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설교했다. 집시 스미스는 토레이처럼 단호한 성경 강론자는 아니었으며, 특히 말년에 가서 그의 메시지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정통적이고 복음적인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는 가장 분명하던 시절에는 단호하고 직선적이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성경에 따르면 회개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손을 얹고 당신에게 저주가 되어 왔던 그 일들을 끄집어 내서 ‘오 주여 여기 있나이다. 내 죄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죄를 다시는 짓지 않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죄로부터 영원히 돌이키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바로 회개란 말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을 믿었던 로드니 집시 스미스의 생애와 사역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우리는 그의 생애 기간 중 교황과의 밀약에 힘입은 히틀러가 대량 살상을 자행하고 있었고, 교황 피오 9세의 “교황 무오설”이 공회에서
공식 교리로 결정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무오설”은 역대 십수 명의 교황들의 “도덕”과 “믿음”에 관한 공식 교서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로마 카톨릭 지도층이 내린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이 교리는 바울 6세, 요한 3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의해서도 여전히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다.
교황들이 세계 1,2차 대전을 야기시킨 밀약을 체결하고 있는 동안 집시 스미스와 W.B.릴레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파했다.
W.B.릴레이(1861-1947)는 인디애나에서 출생해서 켄터키에서 성장했다. 1897년 그는 미네소타의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제일 침례 교회에서 “남침례교” 목사로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 50년 간 머물면서 철저히 독일계 루터교회와 독일계 카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그곳에 2,500명의 회중을 보유한 교회를 세웠다. 그는 1902년 노스웨스턴 스쿨을 창설했는데, 이 학교의 설립 근거는 <킹제임스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ASV와 RV는 독일 관념론이 낳은 배교한 성서라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W.B.릴레이는 미국의 교육자들과 설교자들이 배교한 책임을 독일의 학문에 돌렸다. 릴레이는 반카톨릭적, 반사회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것은 독립 선언문과 권리 선언을 제정한 미국의 건국 공신들의 입장이었다. 그는 교황 피오 9세(1846-1878)의 교서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의 절대적인 분리를 믿었다. 그는 양심의 자유와 사유 재산 제도(당시 유럽을 휩쓴 막스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자유 기업을 신봉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창의력과 복음에 의한 성격 개조가 가능함을 믿었다(당시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든 성격과 개인의 능력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주장했었다). 한 마디로 릴레이는 문제를 일으키고, 지옥을 외치는 반동적 “문제아”였던 것이다. 그는 성경을 믿는 침례교도로서 지역 교회의 독립성과 성인의 침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릴레이와 연관을 맺었고 하나님께서 전세계적인 사역을 그에게 주시기 전 릴레이가 고수했던 침례교적 입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1970년대의 제리 팔웰(“도덕적 다수”의 주창자) 역시 동일한 입장을 고수했다. 몬타니스트, 마니키안, 카타리, 알비겐스, 폴리시안, 노바티안, 그리고 도나티스트들이 20세기에도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리를 지지하는 <킹제임스성경>이 성공회보다 침례교 출판사에 의해 더 많이 보급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실로 주님은 유머 감각을 갖고 계시며(눅 10:21) 주님께는 이 세상의 “학식” 있는 자들을 “어리석게” 만드시는 것보다(고전 3:18) 더 기뻐하시는 일이 없는 것 같다(고전 1:28). 빌리 그래함은 침례교도로 침례교도인 릴레이와 연관이 있지, 초교파주의자인 밥 존스 쥬니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제리 팔웰 역시 침례교도로 침례교도였던 프랭크 노리스와 연관이 있으며, 초교파주의자를 자처하는 타협주의자 밥 존스 3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