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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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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3월호>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개혁주의 자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2세 때인 약 1324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포드 퀸즈 대학을 다녔다. 그 대학은 그 기간에 퀸 필리피의 고해 신부인 로버트 이글스필드에 의해 세워졌으나 이 학교에서 그가 기대했던 만큼 공부의 도움을 얻지 못하자 모튼 대학으로 다시 옮겼다.대중이 처음으로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 사건은 그가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에 대항해서 대학을 변호한 것이었다. 1230년 옥스퍼드에 정착한 이후로 그 때 당시 수도사들은 대학에 큰 골치거리였고, 그들과 계속해서 불화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교황에게 호소했고 학자들은 민권에 호소했다. 때로는 이편이, 때로는 저편이 우세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평범한 거지였으며, 구걸은 복음 단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그들은 강단과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교리를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그들의 삶이 게으른 것으로 인해 이 종교적인 탁발 수도사들을 경멸했으며 이런 사실을 폭로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런 구걸을 대항해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종교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수치거리임을 증명했다. 대학당국은 그를 대학의 첫번째 투사들 중의 하나로 여겼고 그는 곧 발리올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이즈음 이스립 대주교가 켄터베리 홀을 설립했는데 거기에 한 명의 관리인과 열 한 명의 학장을 두게 되었으며, 이 관리직에 위클리프가 뽑혔다. 그러나 주교가 죽자 그 자리는 엘리의 주교 스테펜 랭함으로 대체되었다. 그 일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한 위클리프는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에게 반대했다. 그때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존 왕 때부터 교황에게 지불되어 왔던 종교세를 철회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협박을 했고 에드워드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존왕이 불법을 행했으며 국가의 권리를 포기했다고 결정하고 어떠한 결과가 따르든지 항복하지말라고 왕에게 충고했다.
성직자층은 즉시 교황을 변론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 학식 있는 수도사는 그럴싸하고 힘찬 논문을 발표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나쁜 명분이 그렇게도 잘 변호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위클리프는 그 수도사에게 맞서서 매우 훌륭한 방법으로 그가 더이상 반박할 수 없게 했다. 로마에 대한 그의 고소로 그는 곧 적대시 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그는 교황에게 반대했으며, 그 는 로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위클리프는 나중에 신학교수의 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로마교회의 오류들과 수도사들의 타락을 완전히 인식하고 그것들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공공강연에서 그는 그들의 악을 비난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반대했다. 그는 미신으로 덮혀진 수많은 폐해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대중의 편견을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차츰 나아가서는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논문들과 종교적인 소설을 사용하여 그의의견을 나타냈다. 로마 법정의 강탈이 그가 즐겨 쓰는 주제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는 신랄하고도 장황하게 상술하면서 논리적 사고를 합류시켰다. 이것은 곧 성직자들 사이에 논란을 야기시켰으며, 그들은 위클리프에게서 캔터베리 주교직과 관직을 박탈했다.
이번에는 랭카스터 공작이 그 일을 처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가운트의 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이 공작은 종교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직자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법정의 부당한 요구들이 매우 부담스럽게 여겨졌던 차에 그는 뱅거의 주교와 위클리프를 보내어 이런 폐해들에 대해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교황은 영국 교회에 속한 어떤 교회 수입도 더이상 처리할 수 없도록 결의되어졌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위클리프는 주의깊게 로마체제와 정책에 들어갔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로마의 탐욕과 욕망을 폭로하기로 결심하고서 돌아왔다.
그의 전 위치를 회복한 위클리프는 그의 강의에서 교황의 횡령과 그의 무오성과 그의 자존심과 그의 허욕과 그의 전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이름 붙인 첫번째 인물이었다. 교황에 이어 그는 주교들의 겉치레와 사치스런 옷차림 등에 대해서도 비평하였다. 그들의 미신과 속임수는 그가 지성과 논리적 명확성을 가지고 말했던 주제들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의 보호 하에 위클리프는 좋은 보수를 받았으나 그가 그의 교구에 정착하자마자 그의 적들과 주교들이 새로운 힘으로 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가 죽은 후에 그의 손자 리차드 2세가 열 한 살의 나이에 그 뒤를 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하나뿐인 대리인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위클리프의 적들은 이런 환경을 이용해서 그를 대항하여 고소의 목록들을 새롭게 작성했다. 결국 교황이 왕과 몇몇 주교들에게 교서를 보냈으나 섭정자와 국민은 교황의 오만함에 경멸을 표했다. 그때 당시 교황은 예상되는 프랑스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돈이 부족함으로 인해 상당한 돈을 충당해 줄 것을 제안했고, 교황이 쓰기 위해 돈은 징수되어졌다. 이 문제가 위클리프의 결정에 맡겨졌다. 그러나 주교들은 교황의 권위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위클리프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는 람베스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때 밖에서 민중이 일으킨 소동과 궁정 신사인 레위스 클리포트 경의 명령에 겁을 먹은 그들은 명확하게 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에게 불쾌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말라고 위클리프에게 금지 명령을 내림으로써 전체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혁주의자에게 이것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맨발로 돌아 다니며 긴 프리즈 가운을 입고 전보다 더 열렬히 설교했기 때문이다.
1378년에 이반 6세와 무시무시한 교황이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했던 클레멘트 7세 사이에 경쟁이 일어났다. 이 때가 위클리프의 재능을 발휘할 호기였다. 그는 곧 교황권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렬히 읽혀졌다.
그해 말에 위클리프는 폭력적인 무질서에 사로잡혔다.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이 가장 적대심이 강한 옥스포드의 시민들 중 4명을 동반하고 그의 침실로 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가 주장했던 부당한 것을 철회하라고 그를 다그쳤다. 위클리프는 이 엄숙한 전갈에 놀랐으나 침대에서 일어나 확고한 태도로 응답했다. “나는 죽지 않겠소, 대신 살아서 수도사들의 악행을 알리겠소.”
위클리프가 회복됐을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즉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그는 이 일의 필요성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었다. 성경을 억압하는 주교들이 열심히 그것을 샀으며 복사본을 구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특별한 복음서나 서신서들을 베낀 것을 입수했다. 나중에 롤라드(위클리프파 그리스도인들)가 증가 되었을 때, 이런 성경 조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견된, 저주받은 이단의 목을 조르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위클리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체설(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의 교리를 침범했다. 이런 ‘이상한’ 의견은 파스차드 래드버트가 고안한 것으로 놀랄 만큼 대담하게 주장되어졌다. 위클리프는 1381년 옥스포드 대학 강의에서 이 교리를 공격하고 이것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때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이었던 바튼 박사는 대학의 수뇌들을 소집해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겠다고 협박했다. 위클리프는 랭카스터 공작으로부터 더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전에 그의 적이었으며 그때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윌리엄 코트니 앞에 나오라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대학의 한 구성원으로서 교황의 사법권에서는 면제 되었다고 말했으며 이 변호는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대학은 자신의 구성원을 지지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재판이 열렸고 최소한 그의 의견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이 되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이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이 문제를 공표하자마자 위클리프가 즉시 답변했다. 대주교에게 부추김을 받은 왕은 ‘이단 선생’ 즉 위클리프의 감금을 허락했으나 하원은 이러한 행동이 불법이므로 왕에게 취소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으로 하여금 위클리프가 쓴 모든 ‘이단’ 교리들과 책들을 찾도록 지시하는, 왕으로부터 온 편지들을 입수했다. 그런 명령의 결과로 대학은 소란스럽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이 폭풍을 피해 외딴 곳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씨는 뿌려졌고 위클리프의 의견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어반은 교서를 공표해서, 종교를 높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이 명분을 위해 싸우며 거룩한 교황좌를 수호하고 클레멘트와 그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라고 촉구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심하게 악용되었으며, 위클리프의 쇠퇴기에 그를 힘써 싸우도록 자극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 가장 신랄하게 글을 썼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교황을 타이르고 대담하게 그에게 요구하기를 “어떻게 그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상징을 (그것은 평화와 자비와 사랑의 상징인데) 두 명의 가짜 사제들의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도록 이끄는 깃발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사제들이 유대인들에게 압박 받았던 것 보다 더 심하게 기독교계를 압박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가? 로마의 오만한 사제는 언제쯤 인류가 평화와 사랑 안에서 살도록 관대함을 보일 것인가?”라고 했다.
이런 심한 글은 어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가 전에 겪었던 것보다 더 큰 고난들을 그에게 겪게 했다. 그러나 섭리적으로 그는 그들의 세력에서 구출되었다.
위클리프는 형벌과 비밀리에 갇혀지냈던 곳에서 풀려나 루터워스의 그의 교구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삶을 조용하게 끝마쳤으며 1384년 말에 주 안에서 평화로이 잠들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