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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음모와 반격(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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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0월호>
민족 국가들의 성립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발흥(1600-1900)과 더불어 교황들은 십자군운동(1권) 이후에 발생했던 것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이들 민족 국가들을 전복시키고 그 통치자들을 로마 카톨릭으로 대치하여 그 정부를 다시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582년부터 1990년까지의 모든 카톨릭 지도층의 노력은 이 한 가지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158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외교정책”의 배경에는 항상 바티칸 당국이 도사리고 있었다. 카톨릭 당국은 자신들과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잘못 되어가는 모든 일에 대해 교회 내의 “자유주의자”들 혹은 “과격분자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카톨릭 교도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느끼고 있지 않다”라는 근거 하에 모든 비판으로부터의 면책을 요구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혁명, 사기, 혹은 배반 등의 행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잡히면 “박해”를 받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전쟁과 가난을 포함한 전세계의 모든 악한 일들은 “민족주의”(혹은 “나쁜 통치자들”)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나선다.만약 우리가 역사를 심각하고 신중하게 분석해 본다면, 교황 자신과 그의 교회가 “평화”를 도래하도록 하는 중재자가 아닌 경우에는 그 어떤 교황에게도 국가간의 평화의 도래가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두 강대국이 교황의 지배에 순복하지 않는 한 두 강대국 사이의 분쟁은 로마 카톨릭에게 항상 이득이 되어 왔다. 교황이 UN에서 국가간의 분쟁의 “중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할 때 그것은 교황이 국제적인 독재자로서 무료 봉사를 하겠다는 의미이다. 금관을 머리에 쓰고 14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는 월급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회의 신학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나쁜 행동은 선한 “의도”가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으며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속임수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 모든 교황의 고해 사제는 예수회 회원이다.
결국 필라델피아 교회시대에 있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 유럽에 걸쳐 파문과 성무금지령으로 위협하는 방식보다는 (시간이 걸리므로) 각 나라의 통치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게 하는 색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 우선 카톨릭 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였다. 아우그스부르크 조약(1555)과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이런 살상을 막기 위해 체결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조약들에도 불구하고 살상은 멈추지 않았다. 이는 그 어떤 교황도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카톨릭 당국에 의해 그 조건이 결정되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가간의 조약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 당신이 체결한 조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종교적 정치가와 상대해서 (그는 자신이 4억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1598년 헨리 4세가 발표한 낭트칙령으로 프랑스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시대정신”과는 반대로 종교적 관용을 허락받았다(케네디가 “종교적 정의”에 관해 연설한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8세는 재빨리, 낭트칙령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저주받은 칙령”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때마다 “지상에 평화”를 들먹이는 교황이 “국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상상해 보라. 교황이 이런 발언을 하면 자신의 부하임을 내세우는 75%의 카톨릭 신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의도적이지 않고서야 교황이 그런 발언을 왜 했겠는가? 이것은 살상을 부추기기 위한 의도적 발언이다.
독일 국민의 3분의 1을 살해한 30년 전쟁(1618-1648) 역시 동일한 방식에 의해 일어났다(1970-1982년 사이에 일어난 런던더리와 벨페스트의 폭동 역시 동일한 패턴에 따라 발생했다).
한 카톨릭 국왕(루돌프 2세, 1576- 1612)이 프로테스탄트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깨뜨렸다.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도들은 만약 그들의 맹세가 카톨릭 “정치파워게임”이나 정치적 책략과 관련된 것일 경우 그 맹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베네딕트 수도원장(렐리)은 사법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바바리아 근처에 있는, 인구의 85%가 프로테스탄트인 한 마을로 카톨릭 종교 퍼레이드를 벌이도록 명령했다(아일랜드, 인권운동, KKK 등을 염두에 둘 것). 이 행렬이 공격을 받자(1607)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은 교황을 위해 그 마을(도나우워스)을 점령하고 바바리아에 예속시켰다. 그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몰수하고 그 교회에다 예수회 회관을 세웠다. 그리고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그러나 교황 이노센트 10세(1644-1655)는 모든 국가간의 모든 조약에 들어있는 모든 반카톨릭적 조항들은 무효라고 선언해 버렸다. 그러니까 카톨릭 당국의 이익과 세계지배를 위한 카톨릭의 전략에 유익하지 못한 조약 내용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가장한 이 살인마 집단은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 “교회는 종교로 인해 인간을 괴롭히는 그 어떤 행위도 그리스도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으로 그것을 징책하는 바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교회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모든 학교와 교회를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30년 전쟁을 시작한 그 “교회”이다(이 전쟁으로 6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30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라이네즈와 살메론이라고 하는 두 명의 예수회 학자들이 1649년부터 잉골슈타트의 바바리아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1748-1830)로 그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창설자라고 한다. 바이스 하우프트 자신도 예수회 출신이었다. 예수회 출신 피터 카니스는, 로마는 더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술책을 써서 바바리아를 로마 동물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대학과 단체를 세웠고 그의 책에다 “논쟁없이 명백한” 성경 본문들을 잔뜩 인용하였다. 이 속임수에 수천 명이 넘어가고 말았다. 몇 년이 안되어 잉골 슈타트에 있는 그 대학교는,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는 그 곳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바바리아 주민의 모든 고등교육 수혜자는 로마 카톨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570년 그라즈 마을은 98%가 프로테스탄트였고, 단 두 세대만이 로마 카톨릭이었다. 예수회는 챨스 대공(1573)을 설득해서 이 곳에 카톨릭 대학을 세웠고 그 대학과 그의 궁궐에는 오직 카톨릭 교도만을 직원으로 채용하였다. 1586년 이 예수회 대학은 대학교가 되었고(뉴오를렌즈에 있는 로욜라 대학교처럼) 카톨릭 교도들의 충분한 수가 “교육받은 계층”을 형성할 정도가 되자 이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곧이어 이들은 그라즈 시의 주민은 카톨릭 교도만이 될 수 있다는 법을 제정 공포하였다(히틀러의 뉴렘베르크 법). 1599년 페르디난트는 그라즈에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채플을 폐쇄시켰고 800 여 명의 프로테스탄트 지식인들을 고향에서 축출시켰다. 그러니까 예수회의 활동을 용납하면 당신의 고향과, 지방과, 국가는 평화를 박탈당하는 셈이다(물론 당신이 이미 로마 카톨릭 교회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르네 데카르트는 라플레체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두 실체”이론(기계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채택하였고 데이비드 흄은 기계적 실체 하나만을 수용했다. 예수회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승인했다. 이는 그가 루터와 칼빈에 대항하는 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가 성경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예수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중 기준을 갖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용납할 수 있다.
1550-1890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있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대한 정치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들 국가들은 로마의 종교적 파시즘에 철저히 얽매여 있었기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국민의 5% 이상도 형성되어 본 적이 결코 없다. 미국이 퓨리탄적 지역교회 정부, 복음적 각성운동, 인디안의 선교, 수천 명의 이민들의 성경적 기독교로의 회심 등을 거치는 동안, 멕시코, 중미 및 남미는 완전한 영적 암흑에 머물렀다. 물론 이것은 카톨릭에 의해 초래된 영적 암흑이다. 카톨릭 십자가와 원주민의 부두교 십자가가 나란히 걸렸고, 죽은 거인들에게 드리는 기도와 죽은 성자에게 드리는 기도가 뒤엉켰으며, 산타마리아호가 산살바도르 항에 도착하기 200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사용해 오던 염주와 묵주 등이 카톨릭 묵주와 같이 사용되기도 했다. 마야, 잉카, 아즈텍 족들이 만들어 놓은 형상들과 카톨릭 형상들이 나란히 선반에 놓였고, 성경에 대해서는 어찌나 무지했든지 남미의 정통 카톨릭 교도 중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나오며 그가 얼마 동안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날까지 10명도 안될 것이다. 하일즈-앤더슨 학교의 국민학생들이(1980) 멕시코의 모든 주교와 대주교들보다 재림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콜롬부스는 자신이 발견한 두 곳의 이름을 예수님을 위해 “산살바도르”(San Salvador)와, 마리아를 위해 “산타 마리아 데 라 꼰셉시온”(Santa Maria de la Concepcion)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카톨릭 교도로서 “우리의 거룩한 믿음”을 전파하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종교심을 입증이라도 하듯 콜롬부스는 프란시스코파 승려들을 서인도제도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독자 여러분은 “우리의 거룩한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이해하여야 한다(Our Sunday Visitor, 주 1-4를 볼 것). 왜냐하면 콜롬부스와 그가 동반한 프란시스코 종파가 퍼뜨린 “거룩한 믿음”은 A.D.500-1500년, 즉 암흑시대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미 미주 대륙 전체를 스페인의 카톨릭 국왕에게 개인 소유로 준 바가 있었으므로 - 이로써 화란, 영국,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 아일랜드 등은 식민지 획득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 교황은 그의 충실한 심복 페르디난트에게 서인도제도, 하와이 및 그린랜드를 주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모든 인간 위에 권위”를 갖고 있으므로 그 누구의 나라든, 대륙이든(그 주민과 함께)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다. 만약 이것을 두고 단지 “시대정신”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황 피우스 9세의 주도 하에 열린 바티칸 공회와 레오 13세(1878-1903)의 위대한 교서에 대해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두 신사양반은 로마 카톨릭 교회는 미술, 음악 및 모든 정치가와 통치자들의 교육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법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과, 어휘와, 행동을 지도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그 어떤 정부(미국을 포함하여)도 그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그 어떤 수도승이나, 수녀나, 사제나, 주교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시대정신”은 (알렉산더 5세 1492, 클레멘트 10세 1676) 교황들의 과대망상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교황무오설(1870)은 교황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황 자신에 의해 선포되었다.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해서 모두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콜롬부스의 “거룩한 믿음”의 본질이다. 바로 이것이 하비에르의 “선교여행”의 특징이기도 했다. “거룩한 믿음”이란 카톨릭 당국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는 신약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카톨릭의 가르침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 속에는 교부들이 왜곡한 진리들, 위조된 문서들, 교황의 명령과 교서들, 공회, 반성경적 전통, 구원은 교회에 복종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때 교회란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카톨릭 지도층을 말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선언들에 대한 평가가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해 경건하고 헌신된 생활을 하고 있는 카톨릭 평신도들(이들은 속기 쉽고, 고지식한 사람들이다)에 의해 “비방”이라고 간주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생활과 태도를 카톨릭 지도층도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카톨릭 당국은 전세계를 절대적인 지배 하에 두려는 파시스트 전체주의 국가이다. 당신은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에 관해 쓴 글들과 자신들의 주교의 출판 허가를 받아 “반대불가”(nihil obstat)라는 표식과 함께 발행한 자료들을 읽어 본다면 우리의 평가가 “비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회심한 인디안들은 그 어떤 신약 지역교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국의 지배에 굴복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회심한 모든 인디안 성도들은 모두가 “제사장”(벧전2:38)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사장직”(카톨릭의 사제직)에서 제외되었다. 인디안들은 성체성사, 고해성사 및 “종부성사”는 허락되었으나, 1590년까지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복음”과(갈 1:8-10 혹은 고전 15:1-6의 복음이 아닌) “기독교 메시지”를(엡 3장, 갈 4장, 딤전 2장, 계 17장이 아닌) 전파한 카톨릭 선교사는 바돌로매 델라스까사스였다(1474-1566). 그는 끊임없이 스페인의 카톨릭 교도들에게 저항하는 인디안 혁명가들을 대하게 되었다. 까베사 데 바까는 인디안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이유로 카톨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스페인으로 소환되었다. 카톨릭 선교사들 중에는 베르날 보일, 뻬드로 데 꼬르도바, 마르께스 데 비야로보스, 마린데 발렌시아, 토마스 오르티스 등이 있었다. 예수회는 1550년 신대륙에 모습을 드러내고 1572년 멕시코 시티에 이주해서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이것은 수도를 로마 카톨릭으로 확고하게 지배하여 이미 위축되거나 완전히 파괴된 다른 종교단체들의 “종교적 권리들”까지 완전히 차지하고자 채택된 전략이었다. 꼬르테스는 프란시스코파 사제들이 백만 명 이상에게 침례를 주었다고 선언하였다. 1586년경 한 카톨릭 신자는 거의 구백만 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자랑하였고, 훌리안 가르세스라고 하는 뜰라스깔라의 주교는 1년에 15,000명의 멕시코인들에게 침례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겐트의 피터는 하루에 14,000명에게 침례를 주었다고 자랑했고, 교황 바오로 3세(1537)는 이 모든 침례는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고집불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Bible Believers / 61
여기서 우리는 교황, 프란시스꼬파, 미사책, 도미니크파, 예수회, 까르멜파, 어거스틴파, 카톨릭 액션, 작은 형제들, “ 하나님의 성 요한파” 등과 같은 카톨릭이 말하는 “침례”가 무슨 뜻인지 확고히 해야만 한다. 이들에게 있어 침례란 물뿌림(water sprinkling)을 뜻하고 모든 카토릭 출판물(nihil obstat)의 공식 신조와 교리적 선언을 보면 물침례는 곧 성령에 의한 중생과 동의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카톨릭 선교단이 침례를 준, 900만 명의 성경을 거부하는 이교도들은 물뿌림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이들에게 물을 뿌려 준 그 교회는 그 날 이래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비방해 왔다(무엇이든지 믿어 버리는 그런 경향을 성경적 “믿음”과 혼동한 결과였다). 배교한 침례교도인 라토레는 죠지아 주와 플로리다 주에서 카톨릭 선교사들이 남미에서 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영국의 해악으로 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대체 영국의 해악이 무엇인가? 그는 이에 대해 입을 다문다. 그들은 결코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해악”은 킹 제임스 성경과 모라비안 및 경건파 선교사들과 더불어 전개된 웨슬리와 휫필드(두 명의 영국인)의 설교였다. 바로 이것이 “해악”이라고 언급된 그것이었다. 만약 그 누구라도 영국의 “해악”때문에 예수회가 선교회를 세우지 못한 그 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으면 플로리다 주에 세워진 100개의 지역교회를 살펴보면 된다(세인트 피트, 마이아미, 잭슨 빌, 파나마시티, 탐파, 포트 마이어즈, 데이드시리, 포트월튼, 레이크 시티, 사라소타, 하이네즈 시티, 오를란도, 펜사콜라, 탈라하세 등). 이들 교회들에서는 성인 성도들이 침수에 의해 침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이 설교되고 있다. 반면 상파울로, 멕시코시티, 두랑고, 마나과, 과달라하라, 탐피코, 까라카스, 보고따, 리마 및 오악사카 등에 가면 A.D.1000년 경에 유행하던 검은 후드를 착용한 사람들이 여전히 피가 없는 피를 마시고 “침례”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3:5을 침례로 생각하면서 이교도 아이들에게 물을 뿌려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