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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바돌로메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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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10월호>

1572년 8월 스물한 번째 날에 피비린내나는 극악 무도한 잔인한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를 단 한번에 뿌리뽑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그 전에는 프로테스탄트가 부분적으로만 박해를 받았을 뿐이었다. 프랑스의 왕은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인 나바(Navarre) 왕자와 자기의 자매 사이의 결혼을 거짓으로 제안했다. 이런 무분별한 결혼이 8월 18일 그 결혼을 위해 세워진 높은 무대 위에서 보오본 추기경에 의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들은 주교와 함께 호화스런 만찬을 들었고 파리에서 왕과 함께 마셨다. 이로부터 4일 후 의회에서 돌아오다 왕자(콜리그니)가 양쪽 팔에 총을 맞았다. 그는 그때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군이었던 모르(Maure)에게 말했다. “오 나의 형제여, 나는 지금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참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위해 내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네.” 비담(Vidam)이 그에게 도망하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곧 베미어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나중에 그 장군보다 더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특정한 신호에 따라 파리 전역에서 군인들이 갑자기 살륙을 시작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군을 살해하고 그들은 그를 창문을 통해 거리로 던졌으며 그의 머리를 잘라서 교황에게 보냈다. 그에게 여전히 분노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그의 팔과 각 지체를 잘라서 3일 동안 거리를 끌고 다닌 후에 시 밖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 뒤에 그들은 수많은 존경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살해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평민들을 학살했다. 먼저 삼일만에 그들은 만 명에 달하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시체들은 강으로 던져졌고 강한 급류와 더불어 피가 거리를 흘렀다. 강은 곧 피로 물들었다. 그들의 지옥같은 분노는 너무도 거대해서 그들의 극악무도한 종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의심이 가는 모든 로마 카톨릭 교도들까지 살해했다. 이런 파괴는 파리에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오렌스(Orleans)에서는 천 명의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살해되었고 로렌(Rouren)에서는 6천명, 멜디스에서는 2백명이 감금되고 그 후에 한꺼번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리용(Lyons)애서는 8백명이 학살되었다. 여기서 부모에게 매달린 어린이들과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안고 있던 부모들이 칼과 피에 굶주린,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라고 칭하는 자들의 맛좋은 음식이 되었다. 여기서는 3백명이 주교의 집에서 살해되었고 사악한 수도승들은 그들이 매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거스토보나에서는 사람들이 파리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프로테스탄트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서 개혁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나서서 감옥에 넣고는 그런 후에 야만스럽게 그들을 살해했다. 아바리콤, 트로이, 토울로우스, 로엔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도시에서 도시로, 시골로, 읍으로, 온 나라 전체에 걸쳐 그와 똑같은 잔인성을 실행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대학살의 확실한 증거로써 한 양식있고 학식있는 로마 카톨릭교도가 쓴 다음의 흥미있는 서술을 특별한 타당성을 가지고 여기에 제시한다.
“젊은 나바르 왕과 프랑스 왕의 자매의 결혼식(그가 말하기를)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모든 찬사의 말들과 우정을 돈독하게 하는 말들과 사나이들 사이에서 하는 모든 신성한 맹세들이 여왕 캐더린과 왕에 의해 아낌없이 남발되었다. 그 동안 궁정사람들은 축제와 연극과 가면 무도회만을 생각했다. 마침내 성 바돌로매 전야 12시에 신호가 내려졌다. 즉각적으로 모든 프로테스탄트 집의 문들이 강제로 열려졌다. 콜리그니 장군은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일단의 암살자들이 그의 방으로 돌진해왔다. 베스메(Besme)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구이에스 집에서 종으로 길러졌었다. 베스메 장군의 가슴에 칼을 꽂았으며 또한 그의 얼굴을 칼로 그었다. 베스메는 독일인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를 데려간 후에 로체슬러가 사람들이 그를 매달아 사지를 찢기 위해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브레탄 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이세의 젊은 공작인 헨리는 브로이스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후에 카톨릭 연맹을 형성시켰으며 이 끔찍한 도살이 끝날 때까지 문에 서서 ‘베스메! 다 됐나?’라고 크게 소리를 쳤다. 이 말에 즉시 악당들이 시체를 창문으로 던졌으며 콜리그니는 구이세의 발에서 숨을 거두었다.“
“델리그니 백작도 또한 희생되었다. 그는 열 달 전에 콜리그니의 딸과 결혼을 했다. 그의 용모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악당들이 그를 살해하기 위해 왔을 때 그들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그러나 더욱 야만스러운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들이닥쳐서 살해했다.”
“그 동안 콜리그니의 모든 친구들은 파리 전역에서 암살되었다. 남녀 어린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되었으며 모든 거리는 숨이 끊어지는 시체들로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사제들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서 살인자들의 우두머리들에게 가서 친척이나 친구들도 봐주지 말라고 그들을 훈계하였다.”
“프랑스의 사령관 카바네스는 무식하고 미신적인 군인이었는데 그는 종교의 분노를 격정의 파티에 접목시켜서 파리의 전 거리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그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피를 흘려라! 피를 흘려라! 피흘림은 5월처럼 8월에도 건전한 것이다.’ 이러한 열정의 삶의 기록들이 그의 아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임종시에 그의 향동들에 대한 일반적인 고백을 했다고 했다. 사제가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성 바돌로메의 학살은 언급하지 마세요?’ 이 말에 타바네스는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나의 모든 죄들을 씻어 줄 칭찬받을 만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이 거짓 종교의 영을 북돋을 수 있다!”
“왕의 궁전이 주요한 도살장명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바르의 왕은 루브레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가솔들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게 침실에서 살해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도망하면서 군인들에 의해 쫓기며 궁전의 몇 개의 방들을 통과하면서 왕의 대기실까지 이르렀다. 나바르의 헨리의 젊은 아내는 무시무시한 소요소리에 잠이 깨어 무서워하며 그의 배우자와 그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공포에 질려 반은 죽은 채로 침실에서 도망쳐 그녀의 형제인 왕의 발 앞에 엎드리고자 했다. 군인들이 즉시 뒤따라 왔으며 공주의 눈 앞에서 그들을 뒤쫓아 그녀의 침실로 숨어들어갔던 사람을 살해했다. 창으로 부상을 입은 다른 두 사람이 여왕의 발에 쓰러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피범벅이 되었다.”
“드 라 로체포켈트 백작은 젊은 귀족으로 온화한 기품과 공손함과 대화하는 데 있어서의 특이한 기품으로 인해 왕의 호의를 크게 받았다. 그 날 그는 즐거움 속에서 최상의 기쁨과 용솟음치는 상상력과 함께 11시까지 그 날 밤을 보냈다. 군주는 다소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일종의 동정심의 발로에서 두서너번 그에게 집에 가지 말고 루브르에 머물라고 했다. 백작은 자기 아내에게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왕은 더이상 그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를 가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선언하셨음을 내가 보노라.’고 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그는 살해되었다.”
“열광적인 박해자들의 분노에서 도망한 프로테스탄트는 극히 드물었다. 이들 중에 약 열 살 정도의 어린아이인 라 포스가 있었다. (후에 그는 유명한 드 라 포스 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구조된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과 그는 앤쥬 공작의 군인들에 의해 모두 포위되었다. 이 살인자들은 이 세 사람에게 들이닥쳐서 닥치는 대로 그들을 쳤다. 이 때 그들 모두는 쓰러져서 차곡차곡 쌓였다. 비록 죽은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가장 어린아이었던 그는 단 한 방도 맞지 않았으며 다음 날 도망쳤다. 그리하여 그의 생명은 놀랍도록 보존되었으며, 85년 동안 지속되었다.”
비참한 희생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물가로 도망쳤다. 어떤 이들은 센느 강을 너머 성 저메이네의 교외로 헤엄쳐 갔다. 왕은 강이 내려다 보이는 자신의 창에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종들 중의 하나가 이런 목적을 위해 장치해 둔 카빈총으로 그들을 쏘았다. 반면에 살륙의 와중에서도 동요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여왕은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살인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살륙된 자들의 죽어가는 신음 소리에 웃음을 보냈다. 이 야만적인 여왕은 격동하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으며 이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그녀의 담을 바꾸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조처가 있은 지 며칠 후에 프랑스 궁정은 그것을 법의 형태로 변명코저 했다. 그들은 중상으로 대학살을 정당화시키는 체 했으며 사령관을 공모 혐의로 비난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의회는 쿠리그니에 대한 화상을 반대하도록 위탁받았다. 그의 죽은 몸은 몬포콘 교수대에 사슬로 매달려 있었다. 왕은 이 놀랄 만한 모습을 보기 위해 직접 갔다. 그의 아첨꾼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충고하면서 시체의 악취에 대해 불평했다. 그는 ‘죽은 적의 냄새가 참으로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성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은 다음과 같이 새겨진 문구와 함께 바티칸의 왕의 홀에 그려져 있다. ‘교황은 콜리그니의 죽음을 승인한다.’
이 무시무시한 학살은 단순히 파리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유사한 명령이 프랑스의 모든 지역의 영주들에게 궁정으로부터 내려졌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약 십만명의 프로테스탄트가 그 나라의 전역에서 조각조각 찢겨졌다. 단지 두세 명의 영주들만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이 둘 중의 하나인 오버언의 영주인 몬트오린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왕에세 보냈다.
“폐하, 저는 제 지역의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죽이라는 폐하의 인장이 있는 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폐하를 너무나도 존경하기 때문에 그 편지가 가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명령이 사실이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지만) 저는 폐하를 너무나 존경하기 때문에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로마에서는 그 기쁨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들은 하루를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고 그들이 고안해낼 수 있는 모든 기쁨의 표현들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로레인의 추기경에게서 그의 불경건한 메세지 덕택에 1000 크라운을 받았다. 왕은 또한 모든 위그노들이 멸절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하루를 지키라고 했다.
자신의 몸값으로 상당한 돈을 냈던 사람들도 즉시로 살해되었다. 보호와 안전에 대해 왕의 약속을 받았던 몇몇 도시들은 그 약속을 근거로 왕의 장군들에게 자신들을 내 주자마자 목이 잘려나갔다.
보덱스에서는 설교 중에 카톨릭교도들에게 살륙하라고 충동질을 하곤 했던 악한 수도승의 부추김으로 264명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상원의원이었다. 비슷한 신앙심의 또 다른 우애단체가 메인의 아겐디컴에서 유사한 학살을 행했다. 거기서 종교재판관들의 사탄적인 제안으로 시민들이 프로테스탄트에게 돌격해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그들의 교회를 무너뜨렸다.
구이세 공작은 브로이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군인들에게 약탈품에 달려들며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거나 익사시키도록 했다. 이 말에 그들은 나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더럽힌 후 그들을 살해했다. 거기서 그는 미레에 가서 똑같은 폭동을 며칠 동안 자행했다. 여기서 그들은 카세보니우스라는 관료를 발견하고 그를 강에 던졌다.
안쥬에서 그들은 관료인 알비아커스를 살해했으며 많은 여인들이 더럽혀지고 거기서 살해되었다. 그들 가운데 두 자매가 있었는데 그들 아버지 앞에서 추행을 당했다. 암살자들은 그들을 볼 수 있도록 벽에 묶어 놓은 후 그들과 그 아버지를 살해했다.
투린의 장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했음에도 곤봉으로 잔인하게 두들겨 맞았으며 옷이 벗겨지고 강에서 거꾸로 매달렸다. 그가 죽기 전에 그들은 그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강에 던졌으며, 그의 심장은 창에 꽂아 시로 가져왔다.
바레(Barre)에서도 극악한 잔인성이 행해졌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극심한 분노로 그것을 씹기도 했다. 성으로 도망했던 사람들은 항복했을 때 거의 모두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티스콘 시에서는 팔과 다리를 자른 후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스포츠로 여겨지기도 했다. 방문객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그들은 때로 “사람들이 저렇게 잘 뛰어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펜나에서는 그들에게 안전을 약속한 후 삼백 명을 학살했다. 알비아에서는 주일에 45명이 학살되었다. 논네에서는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이 전개되었다. 남녀가 조건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고, 거리는 슬픈 외침소리가 울렸으며, 피가 흐르고 집들은 파렴치한 군인들이 던진 불로 화염에 되덮여 있었다. 한 여자가 숨어있던 곳에서 남편과 함께 끌려 나와서 먼저 잔인한 군인들에게 추행을 당한 후에 그들은 그녀에게 칼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강제로 그녀 남편의 내장을 찌르게 했다.
사마로브리지에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에게 평화를 약속한 후 백 명 이상을 살해했다. 안티시도에서는 백 명이 살해되어 강으로 던져졌다. 오리언즈에서는 감옥에 투옥된 백 명이 분노한 군중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지옥의 분노에서 기적적으로 도망해서 로첼레로 도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 거룩한 악마들에게 굴복했던 이들이 얼마나 부당하게 대접받았는지를 보면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에 용기를 얻어 그와 같이 행동을 했다. 로첼레를 쳐부수기 위해 왕은 프랑스의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일곱 달 동안 그 곳을 포위했다.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의 거주자들을 거의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아로 그들은 18,000명이 죽었다. 산 자들이 매장하기에는 죽은 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들은 벌레와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관을 교회 뜰로 가져와서 그 안에 누워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음식은 그들이 풍족했을 때는 몸서리치던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사람의 살, 내장, 배설물과 가장 혐오스러운 것들이 진리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의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와 자유의 가치가 없었다. 매번 공격 때마다 포위자들은 용맹스러운 환대를 받았고 132명의 장군들과 그에 어울리는 부하들의 수를 들에 죽은 채로 남겨 두었다. 마침내 이 포위는 왕의 형제인 앤쥬 공작의 제안으로 끝이 났다. 그는 폴란드 왕으로 선포되었고 지쳐버린 왕은 쉽게 승낙했으며 좋은 조건들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
이 모든 무시무시한 대학살에서 기껏해야 두 명의 복음의 일꾼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비극적인 고통은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다. 필립 드 둑스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일이 그 나머지 일들을 조명해 줄 것이다. 악당들이 이 순교자를 그의 침실에서 살해한 후 그들은 그의 아내에게로 갔다. 그녀는 조산원의 도움을 맏아 곧 아이를 분만할 예정이었다. 조산원은 그들에게 최소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칼자루를 이 가련한 여인에게 밀어 넣었다. 분만을 하고자 애쓰면서 그녀는 곡물창고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쫓아 거기까지 가서 그녀의 배를 찌르고 거리로 던졌다. 떨어지면서 아이가 죽어가는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카톨릭 부랑자들 중의 하나가 이 아이를 집어서 찌르고는 강으로 던져 버렸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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