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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제롬에 대한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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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0월호>
존 후스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개혁자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바로 그곳의 대학에서 수학했고, 또 유럽의 몇몇 신학교들, 특히 파리,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쾰른(Cologne),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롬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들에 정통하게 되었는데, 남다른 근면성을 지녀 각고의 노력 끝에 영어에 통달한 후 그 중 여러 작품들을 모국어로 번역했다.제롬은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위클리프의 지지자임을 공언했다. 위클리프의 교리들이 보헤미아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인 데다 후스가 그것들의 주된 촉진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위대한 개혁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1415년 4월 4일, 제롬은 후스가 죽기 약 석 달 전 콘스탄스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이 대중에게 알려져 공회가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음 날 콘스탄스에서 1마일 떨어진 황제의 도시 이베를링(Iberling)으로 이동했다. 그는 거기서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안전 통행권을 주는 조건으로 공회 앞에 서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공회에도 의뢰해 보았지만 허사로 돌아가 보헤미아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제롬은 허소(Hirsaw)에서 슐츠바흐(Sultsbach) 공작의 한 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제롬을 손에 넣은 슐츠바흐 공작은 앞으로 할 일들을 편지에 적어 공회에 보냈다. 공회는 공작에게 감사를 표한 후 제롬을 콘스탄스로 즉각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제롬은 긴 쇠사슬 족쇄에 채워져 끌려갔고, 도착하자마자 혐오스런 지하 감옥에 넘겨지고 말았다.
마침내 공회 앞에 끌려온 그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항변하여 혐의를 풀기를 원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별안간 다음과 같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짐승 같은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난 340일 동안 감옥을 옮겨 다니며 감금되어 있으면서 비참이란 비참, 궁핍이란 궁핍은 모조리 다 맛보았도다. 내 적들에게는 온갖 고소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도, 정작 나에게는 최소한의 방어 기회도 주지 않으니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당신들은 내가 내 재판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단 한 시간도 주려 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쏟아진 중상모략은 곧이곧대로 다 믿었다. 내 교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이단으로 제시했고,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기도 전에 믿음의 적으로 간주했는가 하면, 박해에 대한 내 생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미리부터 나를 사제들을 박해하는 자로 낙인찍어 버렸다. 당신들은 지금 총공회를 열고 있으니 당신들이 중추가 되어 이 온 세상이 위엄과 지혜와 신성함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당신들은 사람이며,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더 고결한 지혜를 추구할수록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어리석게 빗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항변하는 대의명분은 나 혼자만의 명분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대의명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대의명분이며, 후대의 권리에 영향을 줄 대의명분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험이 내 안에서 직접 이루어지려 하고 있도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제롬은 자신의 혐의가 읽혀 내려가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요약되었다. ① 그는 교황의 위엄을 비웃은 자이다. ② 그는 교황을 반대하는 자이다. ③ 그는 추기경들의 적이다. ④ 그는 고위 성직자들을 박해하는 자이다. ⑤ 그는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이다.
제롬에 대한 재판은 그가 고소를 당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치러졌고, 제롬의 혐의를 지지하는 증인들이 심문을 받았다. 죄수는 자신을 방어할 준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340일 동안 빛도 들지 않는 혐오스런 지하 감옥에 있으면서 그 흔한 하루 세 끼도 먹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준비되었다는 말이 통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활기가 조금만 부족해도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불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백은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또 마치 모든 장서들이 구비된 도서관이라도 옮겨다 놓은 것처럼 교부들과 고대 저자들의 글들을 인용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가 가슴 뭉클한 웅변을 어찌나 의기양양하게 펼치던지 완고한 열성을 지닌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미신에 사로잡힌 마음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눈치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사실에 바탕을 둔 증거와, 위협과 중상이 지지하는 증거를 훌륭히 구별했다. 또 그의 삶과 행실의 방향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시했고,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사색하는 것은 진리를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식별하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대적들을 당당하게 경멸했는데, 만약 그가 조금만 허점을 보였다면, 그들은 그로 하여금 덕과 진리의 대의명분을 철회토록 했었을 것이다. 그는 후스에게 찬사를 보내기 시작하며 자신도 그의 영광스런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선언했다. 그 뒤 위클리프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교리들을 간단히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진술로 결미를 지었다. 즉 그의 의도는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거슬러 무엇을 개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불만을 토해냈던 성직자들의 타락에 반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며, 또 이에 덧붙여 그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은, 원래 널리 선행을 행하며 자선을 베풀 의도였던 교회의 재산이 눈의 만족, 성대한 잔치, 멋부린 제의(祭衣)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과 신앙 고백에 여타 치욕을 가져오는 데에 천하게 쓰이는 것은 분명 불경건한 일이라는 것이다.
재판이 끝나자 제롬은 동료 순교자 후스에게 내려졌던 것과 동일한 형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그는 교황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시민들의 손에 넘겨졌으나, 그 자신이 평신도였기 때문에 강등 의식은 치를 필요가 없었다. 준비된 붉은 마귀가 그려진 종이 모자가 머리에 씌워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참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실 때 그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이 모자를 쓸 것이다.”
그가 믿음을 부인하리라는 희망 하에 이틀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이 기간 동안 플로렌스(Florence) 추기경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 쏟아 부었으나, 제롬은 자신의 피로 그 교리에 인장을 찍기로 마음을 굳히고서 너무도 담대하게 죽음을 맞아들였다.
제롬은 형장으로 가는 길에 찬송가를 몇 곡 불렀다. 후스가 불탔었고 자신도 그렇게 처형될 바로 그 지점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화형대를 부둥켜안았다. 그들이 나뭇단에 불을 붙이려고 등 뒤로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내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불이 붙었다. 제롬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처럼 삼켜 들어오는 불길의 고통에 찬송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불길 속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외침이 들려 왔다. “불길에 휩싸인 내 혼을 그리스도께 바치나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