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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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4월호>

5. 세베루스(Severus)로부터 시작되는 다섯번째 박해(A.D.192)
한 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심한 발작증세에서 회복되어가던 세베루스는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지한 군중들의 편견과 분노 그리고 진부한 법조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발휘하였다. 기독교의 확산은 이교도들을 놀라게 했으며, 우연히 발생된 재앙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케케묵은 중상이 A.D.192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맹위를 떨쳐도 복음은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또 사나운 적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복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만 하였다. 이 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로마 군주들에게 항복했더라면 로마 황제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목자였던 빅토(Victor)는 A.D. 201년 즉, 3세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순교당하였다. 세레누스와 헤론(Heron), 그리고 헤라클리데스(Hera clides) 등도 참수당하였다. 라이스(Rhais)는 그녀의 어머니 마르셀라(Marcella)와 마찬가지로 끓는 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후 불에 태워졌다. 라이스의 자매인 포타이니에나(Potainiena)도 라이스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때 군대의 소속장교였으며 그녀의 형집행에 참석했던 바실리데스(Pasilides)는 후에 개심하게 되었다.
장교였던 바실리데스는 로마인의 우상에게 선서를 강요당했다. 그때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우상에게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당혹한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재판관 앞에 불려갔으며 투옥되었다가 지체함 없이 참수당하였다.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예절과 그리스도교로 교육받으며 자랐다. 리용에서의 박해에 관한 많은 부분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추정된다. 그는 순교당한 감독 포티누스(Pothinus)의 뒤를 이었으며 훌륭한 예의 범절로서 자신의 교구를 다스렸다. 그는 이단교리에 맞서 강력하게 싸웠다. A.D.187년 그는 이단 교리에 대적하는 괄목할만한 책을 썼다.
이제 박해는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으며 지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으며 그들 중에 가장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는 언급할 것이다. 22살의 결혼한 여인이었던 페르페투아(Perpetua)와 함께 고난당했던 텔리스타스(Telicitas)는 노예였다. 이 때 고난당했던 다른 죄수들 가운데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세쿤둘루스(Secundulus) 그리고 사투어(Satur) 등이 있다. 그들의 형이 집행 되던 날 그들은 원형 경기장으로 인도되었다. 사투어와 사투르니누스, 그리고 레보카투스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태형을 당하거나 맹수들에게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
사냥꾼들이 두 줄로 열지어 서있고 그 사이로 이들을 달려 가게해서 지나갈 때 사냥꾼들이 그들을 심하게 채찍으로 때렸다. 펠리시타스와 페르페투아는 옷이 벗겨진 채로 미친 소에게 던져졌다. 그 소는 첫번째로 페르페투아를 공격하여 기절시켰고 다음으로 펠리시타스를 공격하여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그들을 군대 장교인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칼로 살해하였다. 레보카투스와 스투어는 맹수에게 의해 순교하였다. 사투르니누스는 참수당하였으며 세쿤둘루스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 일은 A.D.205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스페라투스(Speratus)와 다른 12명의 형제들도 참수당하였고 안도클레스(Ando- cles)도 프랑스에서 참수당하였다. 안티옥의 목자였던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 piades)는 고문으로 많은 시련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남겨 두셨다. 로마의 명성 높은 집안의 젊은 숙녀였던 세실리아(Cecilia)는 바레리안(Va- lerian)이라는 신사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그녀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이후에 그녀의 형제들은 참수당하였다. 이들을 집행장소로 인도하던 장교도 후에 같은 운명이 되어 고난 받았다. 그들은 세실리아를 옷이 벗겨진 채로 끓는 욕조 속에 오랜 시간 동안 들어가 있게 한 후, 칼로 머리를 베여 죽게 하였다.이 때가 A.D.222년이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칼리스투스(Calistus)는 A.D. 224년에 순교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던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로마의 감독 울반(Urban)도 A.D.232년에 같은 운명을 맞는다.

6. 맥시무누스 통치 하에서의 여섯번째 박해(A.D.235)
A.D.235년은 맥시무누스의 통치 중간기이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총독이었던 세레미아누스(Seremianus)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극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 기간에 순교한 첫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폰티아누스(Pontianus)와 그의 후계자 안테로스(Anteros)이다. 안테로스는 온 가족과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자인 팜마치우스(Pammachius)와 로마 원로였던 큐리투스(Quiritus) 등의 행적을 수집함으로써 통치자를 화나게 하였다. 로마 원로 싱플리시우스(Simplicus), 그리스도교 목자였던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등은 타이버(Tuber)에 던져졌으며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처녀였던 마르티나(Martina)와 고위 성직자였던 힙폴리투스(Hippolitus)는 야생마에 묶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끌려다니다가 순교하였다.
이 박해 기간동안 맥시므누스에 의하여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없이 살해 당하였으며 알아 볼 수도 없도록 매장되었고, 때로는 50명 또는 60명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없이 한 구덩이 속에 매장 당하였다.
A.D.238년에 포악한 군주 맥시무누스가 죽고 고르디안(Gordian)이 그 뒤를 승계했으며 그의 통치기간과 그의 후계자 필립(Phillip) 재임 기간 동안 교회는 10년 이상 박해의 피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A.D.24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이교도 제사장의 사주로 무자비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황제도 모르는 가운데 저질러졌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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