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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궁핍 속에 순교한 스머나 교회 시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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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0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스머나 교회 시대의 시작 -
사도들의 시대였던 에베소 교회 시대는 사도들이 하나둘씩 순교함에 따라 저물어갔고, 바야흐로 스머나 교회 시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장례용 물품인 “몰약”(요 19:39)이란 뜻을 가진 “스머나” 교회 시대는, 그 의미처럼 성도들의 죽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였다(행 12:1,2).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스테판이 순교한 지 10년째가 되던 해였다고 한다. A.D. 54년에는 빌립이, A.D. 60년에는 마태가, A.D. 72년에는 다대오라고 불리던 유다가, A.D. 74년에는 셀롯이라 불리던 시몬이 순교했다.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맛디아, 안드레, 베드로, 바돌로매, 도마, 그리고 바울도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사도들은 성난 이교도들에 의해 두들겨 맞고, 돌에 맞고, 채찍으로 맞고,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달렸으며 참수당했다.
스머나 교회 시대의 첫머리는 이러한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순교했던 이들이 장식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Igna- tius)와 폴리캅(Polycarp)과 같은 사람들이 그중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은 순교의 순간에 보여 준 담대함으로 귀감이 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원형 경기장에 던져졌을 때 사자 우리로 먼저 가서 사자들에게 나오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그는 바울과 같은 “순교 편집증” 환자였다(cf. 행 14:19,20). 폴리캅은 화형대 위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주님을 섬긴 지 86년이 흘렀어도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날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꾸했다. 이에 화형이 집행됐지만, 어쩐 일인지 불길은 그를 전혀 태우지 못했다. 결국 화형 집행을 명한 호민관은 그를 칼로 찌르라고 명령을 번복해야 했다.
사도들과 그 뒤를 따른 성도들의 순교는 복음 그 자체를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필자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끔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에 대해 증거를 대보라고 따져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본 증인들은 오백 명이 넘습니다(고전 15:6).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한 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의 말씀이 이른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재패했던 로마는 이 소식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소식을 전파했던 것입니까? 그 일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도 없는 거짓말을 목숨을 걸고서 전파하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었다는 것 외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분의 부활을 전파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며,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일은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것입니다.”
- 사도들이 다녀간 이후의 일들 -
사도들이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유럽의 회당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힘있게 융성하며 세력을 얻었다(행 19:20). 곳곳에서 복음에 순종한 사람들은 지역 교회를 형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사역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이를 감당하기에 사도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역을 나누어 맡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도들은 어떤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양무리를 돌볼 수도 없었다. 일종의 “선교사”요 “순회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수배되어 쫓기기 일쑤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지역 교회를 형성하고 나면,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를 담당해 줄 신실한 형제를 감독(목사)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교회의 감독들(혹은 영향력 있는 성도들) 중 사도들로부터 직접 사역을 이어받아 에베소 교회 시대와 스머나 교회 시대에 걸쳐 사역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교회사가들은 이들을 “속사도(Apostolic Fathers)”라고 부르곤 한다. 앞서 언급했던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도 이에 해당하며, 각각 안티옥과 스머나의 감독이었다. 이 외에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히에라폴리의 파피아스(Papias) 등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속사도”라고 분류하는 사람 중에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사역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희박한 경우도 많고, 사도들과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진 배교자들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로서 하는 교회사 연구란 학자들의 자료를 편집하여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힌 악의적인 편집, 거짓 자료, 학계에 퍼진 근거 없는 낭설을 뚫고, 그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적하는 일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학자”들의 말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잡으라』(살전 5:21).
“속사도”들이 퍼뜨린 거짓 교리들 중에는 치명적인 것들도 꽤 있었다. 워커(Walker)에 따르면 로마의 클레멘트는 “사도직을 계승한” 직분들이 로마 교회에 존재했음을 시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후일 교회사를 관통하는 거악(巨惡), 곧 교황 제도의 씨앗이 되었다. 반면 안티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각각의 교회에 하나의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권위는 다른 권위에 간섭받지 않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 “사도직 계승”에 관한 한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바른 성경과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로마”가 아닌 “안티옥”을 통해 전수되었음을 상기해 봄직하다.) 교회사 초기 성도들은 대부분 이그나티우스처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성령님께서는 당시의 성도들이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찾아냈다.”며 칭찬해 주시기 때문이다(계 2:2).
- 성경의 정경 확립 -
거짓을 배제해 내는 분별력은 사도들이 사역한 직후에 살았던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 거짓 사도들(고후 11:13)이 진짜 사도들을 음해하고, 사도들을 사칭하는 자들이 서신을 위조하여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살후 2:2,3) 등 속임수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을 사칭하는 자들은 구약 시대부터 늘 있었지만(렘 5:31; 14:14; 29:9) 이때에는 그런 자들에 의한 혼란이 더욱 극심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넷은커녕 전화도 없던 시대는 사도 바울을 통해 계시된 교회 시대의 경륜이 전파되는 일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교회 내에 신약성경의 일부만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떤 글이 성경이고 어떤 글이 아닌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소위 “위경”(Pseudepigrapha)과 “외경”(Apocrypha)을 위시한 거짓 문서들까지 돌아다니며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섭리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분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사도들의 서신들과 기록들을 간수해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인정하실 글들은 지역 교회들 내에서 계속해서 회람하고 필사하며 전수되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유실되게 하시거나 잘 사용되지 못하게 하심으로 배제시키셨던 것이다. “디다케,” “클레멘트 서신,” “허마의 목자” 등 소위 “속사도들의 문헌”들은 이 시기에 기록되었으나 성도들에게 성경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사도들을 사칭한 자들에 의해 기록된 “도마복음,” “안드레행전,” “바울묵시록” 등의 문서들도 그러했다. 심지어는 사도가 기록한 문서라고 해도 항상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cf. 골 4:16).
에베소와 스머나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그들이 인식한 상태였든 그렇지 못한 상태였든 간에 “성경”이 될 문서들을 열심히 필사하고 읽고 인용하고 전파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해 성경의 66권을 확정해 주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이 퍼가모 시대 때에 있었던 “제3차 카르타고 공회(A.D. 397)”에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교부들”은 그들의 글을 쓸 때에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성경이 아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했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른 원문 계열의 성경인 구시리아 역본과 구라틴 역본은 스머나 교회 시대 초기(A.D. 120-150)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에베소 교회 시대에 영감으로 기록되었던 신약성경은, 뒤따르는 스머나 교회 시대부터 이미 섭리적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