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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궁핍 속에 순교한 스머나 교회 시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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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4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열 차례의 박해 -
“스머나”라는 이름이 장례용품인 “몰약”이란 뜻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요 19:39), 스머나 교회 시대는 박해와 죽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주님께서도 스머나 교회가 “열흘” 동안 환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계 2:10), 이는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자행했던 열 차례의 박해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박해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인 네로에 의해 자행되었다(A.D. 67). 네로는 당시 로마에서 일어난 큰 화재를 수습하면서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웠는데, 이때 약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바울과 베드로 또한 이즈음 순교했다. 두 번째 박해는 로마 제국의 제11대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도미티안)에 의해 일어났다(A.D. 81). 이때는 일단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에 넘겨지면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정되었으며, 사도 요한이 팟모 섬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세 번째 박해는 로마의 “5현제” 중 둘째이자 제13대 황제인 트라야누스(트라얀)에 의해서 일어났다(A.D. 108). 이 시기에 시민권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완고함”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라는 법이 공표되었다.
네 번째 박해는 “5현제” 중 마지막이자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자행되었다(A.D. 162). 그는 제국 전역에 전염병이 돌자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칙령을 선포했고, 이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마녀사냥”했다. 이때의 박해로 프랑스 리옹에서 약 5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저스틴 마터도 이즈음 순교했다. 다섯 번째 박해는 제20대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한 것이었다(A.D. 192). 클레멘트는 “많은 순교자들이 매일 타 죽었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목베임을 당했다.”라고 당시의 박해에 대해 설명한다. 이 시기에 리옹의 감독 이레내우스가 순교했다. 여섯 번째 박해는 초대 군인 황제였던 막시미누스(막시무스) 트락스에 의해 일어났다(A.D. 235). 막시미누스는 전대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유화적이던 그간의 정책노선을 철회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재판정에 서 보지도 못한 채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기 위해 특별히 왕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을 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이 더더욱 와 닿는다(딤전 2:1,2).
일곱 번째 박해는 데키우스(데시우스)에 의해서였다(A.D. 249). 당시의 로마는 국내외의 사건사고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데키우스는 이를 “신의 진노” 때문으로 규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교도적 제사 행위에 참여하고서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에 불복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체포되었고 순교하기도 했는데, 오리겐도 이때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여덟 번째 박해는 발레리아누스(발레리안)에 의해 자행되었는데(A.D. 257),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공민권을 박탈했으며, 집회를 금지하고 모든 감독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아홉 번째 박해는 아우렐리아누스(아우렐리안) 통치 하에서였다(A.D. 274).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돌려주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라는 갈리에누스(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의 칙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 숭배를 로마의 통일된 종교로 만들고자 했으므로 기존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초기에는 (다소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대놓고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권력 기반이 다져졌다고 여겨지자 갈리에누스 칙령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총독들에게 명령을 보내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가 명령이 시행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 박해는 다른 박해들보다 비교적 덜 잔혹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이자 최악의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디오클레시안) 때 있었다(A.D. 30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호감을 보였고, 이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장기간 지속된 평화 속에서 꽤 큰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졌던 사위의 설득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정책을 변경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이때의 박해를 세간에서는 “대박해”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든 교회와 성경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고,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에게서는 그 직을 박탈했다. 또한 약 10년간 이어진 이 박해에서 약 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으며, 고문, 투옥, 추방된 성도는 약 2만 명에 달했다.
- 박해의 결과와 교훈 -
스머나 교회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에게, 주님께선 오히려 너희들이 부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계 2:9). 주님을 위해 “참았던”(딤후 2:12) 이 시기의 성도들은 유업과 면류관(계 2:10)을 얻어 하늘에서 부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통해 땅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았다(요 10:10). 이는 그들의 비문(碑文)이 이교도들의 그것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교도들은 현세에 대한 아쉬움, 신들에 대한 원망, 불가지론, 허무함 등을 그들의 묘비에 남겼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갔던 지하 교회이자 무덤인 “카타콤”에는, 그 어떤 원망이나 슬픔도 없이 오직 찬양과 승리의 간증만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셋째 하늘에 있는 이 성도들이 현재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려다본다면 어떻겠는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고 지키려는 그 어떤 열정도 없고 그 일을 위해 박해를 받아본 일도 없는 자들이, 큰 교회 건물을 지어 놓고 으스대면서 스스로 “나는 부요하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계 3:17). 어쩌면 그 부패한 신앙의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cf. 계 3:16).
아무리 통제해도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고 “전염병처럼” 복음이 퍼져 나갔던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그 대적들에게나 한 가지 교훈을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즉 “박해”로는 믿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솝 우화 “해님과 바람의 내기”에서 나오는 나그네가 그러했듯이, 풍파가 거셀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품은 믿음을 굳세게 지켰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저버리도록 만들었던 것은 오히려 박해가 끝난 뒤의 “햇볕정책”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교회 시대를 다룰 때 자세히 논할 것이다).
- 거짓 교리의 침투 -
스머나 교회 시대에 관해 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순교의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제대로 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머나 교회 시대의 혼란을 틈타 사탄은 거짓 교사들(벧후 2:1)을 “그리스도인인 양” 순교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우상화함으로써 그들이 가르쳤던 거짓 교리를 널리 퍼뜨렸다. 예컨대 장차 교회사 내내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할 명분이 될 교리인 “유아세례”는 이 시기에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아세례의 교리가 보편화된 것은 나중 일이었지만, “침례(세례)를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식의 거짓 교리가 저스틴 마터, 이레내우스, 오리겐과 같은 “훌륭하신 순교자님들”을 통해 제시되었고,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스머나 교회 시대에 침투한 거짓 교리들 중에서 특별히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모독에 대해서 콕 집어 말씀하셨다(계 2:9). 이들은 소위 “대체 신학”을 주창하는 자들인데, 곧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이신 주 예수를 거부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셨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약속과 축복이 교회에게 넘겨졌다고 이야기하는 자들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1세기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바나바 서신”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민족이라는 논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저스틴 마터도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할례란 유대인들의 도성이 불타게 되며 그들이 홀로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표식이라고 했다. 터툴리안도 할례란 유대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표적이라고 했다. 오리겐은 “한 수 위”였는데, 그는 히브리 철학과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해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성경을 이교도들의 시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들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교회에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회복되리라고 말씀하셨지만(롬 11:25-29), 이에 반하는 비성경적인 해석이 성경에 “까막눈”이던 후대의 로마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 결과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거나 추방당했다. “자칭 유대인들”의 거짓 교리는 지난 2천 년간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앞으로 대환란 때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혹자가 “교파 간에 성경 해석이 조금 다른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화합”과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생각은 물러 터지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발상일 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