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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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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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4월호>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새롭게 태어난 다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난 사람이 그가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영원한 생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으며 그 영생은 결코 사라져 없어 버리거나 죽거나 그로부터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을 주시면서 그에 대한 보답을 바라시지 않는다. 즉 주고 나면 빼앗지 않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심이니라』(롬11:29). 이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생이기 때문이라』(롬6:23) 이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는 세상 종교, 제도화된 교회, 그리고 오순절 계통의 은사주의자들의 경험으로부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구분시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거듭나서 자기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아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카톨릭, 유대교, 신교, 도교, 불교, 브라만교, 힌두교, 모슬렘교 등 세상 종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세상 종교들의 특징은 그 어느 신봉자라도 그들이 죽을 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현저한 차이점 때문에 이러한 세상 종교의 신봉자들은 어느 누구라도 권위 있게 죽음 이후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호의에 의한 절대적인 영생의 확신에 관하여 글을 쓰지 못한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호의로) 받아들이셨고』(엡1:6), 우리를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다』(롬3:29). 이는 자기 믿음을 평안, 사랑, 찬양 등 자기 경험에 의존하여 자기가 죽었을 때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모르는 사람과, 육신적인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에 근거하여 새롭게 태어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과의 영원한 차이점이다. 거듭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도와주려고 할 경우 구원의 확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 피의 속죄를 증거 하기보다는 그들의 경험을 나누는 것을 중시하여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요일5:13)라고 말씀하신다.
구원받는 것은 기적적인 변화이다. 이 기적이 당신의 생애 가운데서 일어났는가? 아니면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 기적은 소위 성령이 임하여 흐느껴 울거나, 이상한 말을 지껄이거나 온 몸에 소름이 끼치거나 머리카락이 쭈뼛 서거나 경이로운 스릴을 느끼거나 하는 ‘느낌’이 결코 아니다. 갑자기 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든지, 피를 흘리는 것 같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혹은 교리적으로 당신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결혼했는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결혼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둘 중 하나다. 사람은 구원받았든지, 아니면 구원받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아니면 밖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결혼한 사실을 안다. 내 아내와 같이 살고 있고, 결혼 서약을 하였고, 혼인 신고를 하여 정부가 이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고 현재 그와 함께 살고 있으며, 삼위일체 가운데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서명하시고 보장하신 서류, 즉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당장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교사들과 목사들이 계속하여 그들을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속에서 혼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모독(불경스러움)이라고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소경인 자신들을 인도한 소경 지도자들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지도자들은 그들이 어 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들조차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죽을 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성직자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보다 더 하나님에 대하여 모독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경스런 것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죽을 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종교적 지도자에게 월급을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한 지도자가 어떻게 확신 있게 “당신이 죽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만일 사람이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이런 사람들이 구원을 의심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아무리 옳은 행위를 많이 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를 계속해야만 하고 그 수준을 맞추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행위의 수준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라면 구원받는 사실을 모르는 것에 대해 이해가 된다.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당신이 야고보서 2장과 히브리서 6장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면 결코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는 모를 것이다. 구원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 그들 자신의 행위를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믿는 사람들이다. 구원은 선물이다(엡2:8).이 선물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소유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소유하신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버림받지 않게 된다. 그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받지 못했으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거짓 종교인들을 다루는 성경구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뼈와 살의 한 부분이다(엡5:30).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정확한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롬8:29).
이상 말한 것들은 구원론에 관한 중요한 교리이다. 당신이 이 사실을 몰랐다면 그것은 경험에 의존한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다. 이제 당신이 올바른 교리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당신에 대해 상당히 언짢아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믿지 못하는 부분을 당신이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최종권위로 자기의 경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째로 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그의 몸과 뼈와 살의 한 부분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과 당신이 갑자기 죽게 될 경우라도 즉시 하늘로 간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제도화된 종교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과의 차이점이다. 구원은 영생이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끝이 없다.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그는 현재부터 시작하여 영원토록 구원받은 것이다. 그를 영생에 참여하게 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10:28). 바울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세나 권세나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누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카톨릭 신자? 유태교 신자? 신교 신자? 도교 신자? 불교 신자? 물론 아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행위에 의존한다.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모슬렘교도? 공산주의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물론 아니다. 이들 역시 구원의 수단으로 행위를 의존한다. 의롭게 되기 위해 ‘자기 의’를 의존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 자신의 양심이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증거 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한 뜻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카인이 대답하였다. “저는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왜 내가 너를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창세기 4장). 왜 주께서 카인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은 그가 노력하여 얻은 채소를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은 피를 드리는 것이었다. 육신의 생명은 피에 있다(히17:11).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주신 양무리의 피에 있었다. 카인이 해야만 했던 일의 전부는 아벨에게 한 마리의 양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 그는 너무 교만하여 양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그러지 못한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아는가? 그는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행한 행위를 의존하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으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지 못한다. 자신의 양심이 아직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바치지 못했다고 자신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한 잔의 술이나 한 조각의 빵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죄 없는 사람에 의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성된 완전하고 유효한 피의 대속이다.

죄인으로서는 이 일을 이룰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 성경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요일5:13).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3:36).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대로 믿는 거듭난 많은 사람들은 왜 구원받았는지를 알고, 성경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은 왜 구원받았는지를 모르는가?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확신의 근거에 있다. 우리의 확신이 감정에 근거할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의 감정은 변한다. 사탄은 우리의 감정을 조정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든다. 예를 들면 사탄은 성령을 모방하거나, 성령 침례를 모방하거나, 아니면 사도 시대의 은사들을 모방한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확신하는 것으로 감정만을 바라본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감정은 날씨와 같이 변덕이 심하다. 건강, 날씨, 주위 환경, 조건 등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로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이는 사실과 전혀 아무 관계도 없다. 또한 구원받은 것처럼 느끼면서 일어날 수도 있다. 구원받지 못했다면 이는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실제적으로 감정적인 전율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와 관련된 아무런 느낌도 없다. 사람들은 각기 모두 다른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