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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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7월호>

이 글은 필자가 경험한 인간 관계를 적은 것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밝혀둔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와 능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아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고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성경에서 보증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기록된 책이다(딤후 3:16).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말이다. 인간이 이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님이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사람은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요 16:13). 따라서 누구라도, 또 그 어떤 것으로도 성령이 내주하시는 그 사람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면 잘 믿는 사람이고, 의심없이 믿는 그 사람이면 우리는 그를 신실하다고 말한다. 성경을 믿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성경에 없는 것을 실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가장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거짓되이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배교는 이 믿음을 떠나 버렸거나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체할 때에 생겨난다. 믿음을 떠나 버렸거나 믿음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과 상대하여 그 사람의 생각대로 따라가 주시겠는가? 믿음없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기뻐해 주시고, 성경의 원칙에 위배되는 기도에도 응답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신 진리의 하나님이시겠는가? 잠시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그런 하나님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도의 신들은 인간의 발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람이 고행을 하고 지성으로 섬기면 복을 내려주고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막연한 종교심리일 뿐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사람이 스스로 붙인 명칭에 있지 않고 그가 성경대로 실천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성경대로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선교사라 하고, 목사라 하고, 신학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들의 명칭대로 인정해 줄 수는 없다.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멋대로 행하면서 그 일에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때문에”란 꼬리표를 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첫째 자기가 믿는 성경이 옳은 성경인가 틀린 성경인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며, 변개된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마 24:35)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잠 1:7; 9:10). 두려워하는 체하지 말고 실제로 두려워해야 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마 16:24, 막 8:34, 눅 9:23).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과 특권을 박탈당한다 해도 지금처럼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믿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지 모르면서 제멋대로 믿는다고 나서며, 자기의 배를 위하고 자기 영달을 위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설치는 사람들을 몇 사람 소개하려고 한다. 구영재, 이준승, 김재근이 그들이다.

1. 구 영 재

이 자는 자칭 선교사이다. 이 자야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파는 자이다. 스위스에 주거지를 정해 놓고 돈 없으면 한국이나 미국에 와서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는 개혁가(?)로 행세한다. 그가 로마 카톨릭을 비평하는 목적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하기 이전에 누구나 알고 있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비행을 지적하여 자기의 입지를 돈독히 해 보려는 데 있다. 그래야 동냥질을 할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는 로마 카톨릭처럼 어린아이에게 물 뿌리고 자신도 물 뿌림을 받고, 물 뿌림의 교리를 추종하면서도 로마 카톨릭을 비평하고 있다. 새벽 미사, 금요 금식 철야하는 행위의 종교를 추종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면서도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필자는 구영재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도 역시 필자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자가 필자를 인신공격하고 다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선교사였다면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구령사역에 충실하든지, 아니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주님의 강력한 군사로 세워 주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를 견고히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든지, 아니면 집회를 열어 일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필자의 신상이나 헐뜯고 다니고 있으니, 이런 자가 누구의 선교사인가? 그런 일을 하는 자도 선교사라 하는가? 그것도 “선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비참한 친구가 로마 카톨릭만 헐뜯다 보니 신물이 났는지, 메뉴를 하나 더 첨가한 것이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비판하는 일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박만수 전도사와 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짜 스위스제 선교사는 박만수 성경이 좋다고 홍보하러 다니며 동냥질을 하는가본데 그 성경은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것을 성경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도 없으며, 찾는 사람은 더더구나 없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작렬하는 태양이라면 그 태양 빛 아래서 일회용 라이터 불이 무슨 빛의 역할을 하겠는가! 하나님이 그런 인간들의 장난에 놀아나시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선교사 자격은 없다 해도 자칭 선교사라 했다면 선교를 해야 하고 선교를 할 능력이 없다면 선교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 한다. 구걸을 먹고사는 수단으로 삼고 하나님의 일꾼을 헐뜯는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은 결코 선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필자가 이 자를 대면해서 나를 아느냐고 물으면 이 자가 뭐라고 하겠는가? 선교사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해 얼마나 엄격하신 분인가를 먼저 알기 바란다.

하나님은 쓰레기 차에 향기로운 장미꽃 다발을 실어 보내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임명하시고, 쓰시는 사람에 의해서만 수행된다. 자기 배(롬 16:18)를 위하여 복음을 이용해 먹는 자를 성경은 “개”와 “돼지”라 부른다(벧후 2:22, 마 15:26). 이런 자가 그리스도인이겠는가?

2. 이 준 승

성경침례교회가 설립된 것은 1992년 4월 12일이었다. 이 자는 이 교회의 창립 요원이요, 펜사콜라성경신학원 제 1회 입학생 9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성경침례교회는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성경대로 믿는 독립침례교회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교회들은 모두 성경대로 믿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성경침례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의 기조 위에 세워진 최초의 신약교회이며 성경의 교리를 준수하고 실행하는 최초의 신약교회이다.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교리와 활동은 곧 이 나라 성경대로 믿는 신약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교단 교회가 아니며, 성경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치적인 교회이다.
이준승은 최초의 교회 파괴자이다. 인간적 친분으로 힘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여 분파를 만든 자이다. C.C.C 부총순장이었던 이 자는 거기서 함께 온 그의 동료들을 데리고 나가 교회란 것을 만들어 교회놀이를 하고 있다. 자칭 목사라고 하며 처음에는 영등포침례교회라 하더니 이제는 영등포교회로 바꾸었다. 필자는 이 자를 사랑했고 개인적으로 정분도 깊었다. 그러나 필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우선이고, 인간관계는 그 다음이다. 우리 교회에는 “신실한 사람이 존경받는 교회”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필자와 교제하기 원하는 사람의 조건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신실하면 된다. 필자와 교제하기 원하는 사람은 필자에게 친절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신실하면 된다.

이 자가 나간 후에 우리의 통장에 이 자의 명의로 일금 100,000원이 입금된 것을 발견하였다. 필자가 처음으로 그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얼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래도 그에게 양심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됐던 간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즉시 그 돈을 돌려보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안 일이었지만 그 돈은 다름 아니라 우리 교회 한 형제가 예배 시간에 준비해 온 헌금을 흘린 것을 이준승이 주어서 착복한 것인데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도둑질한 돈이었던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락한 성품을 입고 태어나게 되었다.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거듭나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거듭난 후에도 자기 부인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타인이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된다(고전 11:31). 필자가 그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은 그의 허물을 공개해서 창피를 주자는 의도가 아니라 위의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다.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는 것은 뜻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역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쓰시는 사람이다.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성경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하지 않는다. 그는 떡과 고기만 보면 아무데서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시작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자기가 속해 있던 교회를 파괴시키고 데리고 나간 사람들을 인간적 유대로 형성해서 교회를 하지 않는다. 교회란 하늘에 근거를 두고 시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파괴시킨 데 참여했던 패거리를 모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말 교회를 해야 한다면 자기가 복음으로 낳은 사람들을 모아서 할 일이다.

둘째,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인위적 증거로 목자의 소임을 맡지 않는다.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불러 쓰실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원칙은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인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해야 한다(고전 7:20,24). 그가 교회를 한다고 해서 하지 말라고 권위를 행사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닌 그가 속한 교회의 목자이다. 그 목자가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가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영적 권위를 대적하고 배격한 것이다. 이것이 그와 그의 무리가 지은 교회 파괴죄이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한 행위이다. 그런데도 그가 교회를 한단 말인가? 그는 과외도 할 수 있고, 노래방도 할 수 있으며, 탁구장도 당구장도 할 수 있으며, 트럭을 사서 확성기를 달고 야채 장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해서는 안된다.

셋째,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이편과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해서 저편과 손잡고 모의에 가담하지 않는다. 믿음은 신념인데 상황에 따라 신념이 바뀌게 되면 그것은 이미 신념이 아니라 쓰레기인 것이다.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 3:3).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교제에 있어서 외톨이가 된 그는 박만수 전도사에게 접근해서 그와 한 패를 이루어 엉터리 성경을 내놓고는 그것도 성경이라고 그것으로 개역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그런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자가 그리스도인이겠는가?

3. 김 재 근

이 자는 필자의 고용인으로 2년여 동안 함께 일했었다. 그는 구원받지 않고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거짓말, 도둑질, 지시에 대한 불순종, 낭비, 패짜기, 게으름 등 어느 한 가지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일하기를 포기하면서 김영균과 함께 교회 파괴를 획책했고, 또 실행에 옮겨 전주성경침례교회란 “교회”를 세워 목자 행세를 하고 있다. 마귀의 자식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그들의 증거들을 남긴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게 된다. 전주와 남원에는 우리 신학원 출신 형제, 자매들이 몇 명 있는데, 그는 그들을 대상으로 회유에 들어갔고 그들을 회유할 때 교회 파괴를 획책했던 일은 감추고 서울에서 전주를 버렸다고 선동하며 함께 뭉치자고 했던 것이다. 마치 강자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위로하며 살자는 식의 결합을 이룩했던 것인데 그의 계략은 정확히 먹혀들어갔다.

그는 교회를 어떻게 시작했는가? 가짜 선교사 백영훈을 데려다가 창립 예배를 드렸다. 자기가 속한 지역교회를 파괴하고 나서도 교회를 하려다 보니 그런 묘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예배에 김영균 등이 참여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 제국 이래 성경대로 믿다가 순교당한 사람들(A.D. 70-313), 즉 몬타니스트, 노바시안, 네스토리안, 도나티스트, 유카이트, 폴리시안, 보고마일즈, 카타리, 왈덴스에서 필라델피아 교회시대의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그런 식의 절차를 따라 세워진 교회는 하나도 없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들은 진리의 성령님께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칭 목사 이준승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박만수의 성경출판기념회에 김영균과 함께 참석했고, 즉시 전주에 와서 그 성경을 최종권위로 한다고 전도지에 써 넣었는데, 교인들이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성토를 시작한 것이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버리고 박만수 성경을 집어들었다가 혼줄이 난 후 그는 다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집어들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필자가 알고 있는 그는 교회의 목자를 한다고 나서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같은 사람으로 인해 성경적 교회와 사탄의 교회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또 그의 비성경적 입장을 성토한 남원에 사는 한 가정을 교회내에서 투표해서 내보내는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진리가 비진리에게 “사람 수”로 패배당하는 마귀적 발상이 신약교회라고 이름을 내건 교회에서 벌건 대낮에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매도하여 파문시켰던 바로 그 방법이었다.

맺는 말

이 글은 필자가 짐작으로 쓴 글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일이며 현상적으로 드러나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특히 그들의 가족들과 친구들, 또한 그들과 함께 믿음 생활을 했던 여러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의 일꾼인 양 행세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은 숨긴 채 그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자격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고 나설 때 마귀는 그들을 써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자들이 영적 분별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배제한 채 인간적인 관점을 앞세울 때는 늘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된다.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 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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