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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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암과 니콜라파의 교리”를 퍼뜨린 퍼가모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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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2월호>

- 제국의 분열과 니케아파의 승리 -

니케아 공회가 제국 기독교계에 “통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대와는 달리, 니케아 공회는 오히려 여태껏 국지적 규모로 벌어졌던 아리우스 논쟁을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켜 긴장과 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와 그 대변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는 추방을 면치 못했으나,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로 이루어진 범아리우스 진영이 아예 괴멸되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공회에서의 승리를 등에 업고 상대 진영을 폭력적으로 축출하려 드는 니케아파의 배타성이 제국 기독교의 통합을 저해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감독들에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허락할 것을 명하여 범아리우스 진영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복권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황제의 몸에 물을 뿌리는 영예”를 하사했던 인물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였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계속해서 침례(세례)를 미루고 있었다. 스머나 교회 시대부터 침투하기 시작했던 거짓 교리, “침례(세례)에 의한 중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로서는 “물 뿌림으로 죄가 용서된다면, 그 이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고, 혹여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해서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는 “묘수”를 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꾀가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어떤 간증도 없는 그를 지옥으로부터 구출해 주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난 뒤, 제국은 분열(분할)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에 분열된 뒤로 다시는 합쳐지지 못했다(A.D. 395).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부터 동ㆍ서로마의 분열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때로는 “정통파” 황제가, 때로는 “반(半)아리우스파” 황제가, 때로는 아예 이교도로 돌아간 “배교자” 황제가 황위에 올랐는데, 이처럼 일관성 없는 황제들의 종교적 입장과 그에 따른 정책 변화는 자연스럽게 교계의 혼란을 야기했다. 지면이 부족하여 상술(詳述)할 여유는 없지만, “정통파”를 자처하는 “니케아파,” 즉 “로마”카톨릭이 득세했을 때는 늘 적들을 물리적으로(!) 섬멸해 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때의 역사를 요약해 볼 수 있겠다. 특히 “독실한 정통파”이자 동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서로마의 통치자들과 함께 “데살로니가 칙령”(A.D. 380)을 선포하고 시행했는데, 이는 제국 내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기독교만을 합법화하고, “미치광이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한 처벌을 법제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듬해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회(A.D. 381)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함에 따라, 니케아파의 최종적 승리가 굳어졌고 “이단 사냥”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 무천년주의의 대두 -

범아리우스 진영이나 이교도 황제, 또는 니케아 진영을 표방하더라도 종교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황제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신실한 정통 신앙”을 가진 황제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폭압이 뒤따랐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이다. “정통파,” “반아리우스파,” “배교자” 가운데 가장 비성경적이었던 그룹이 “정통파”였던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에(고후 10:4), 제정신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설령 이단 종파를 만나더라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거절할 뿐(딛 3:10) 결코 죽이거나 세상 밖으로 쫓아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볼 때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물리적인 왕국이요 미래로 연기된 왕국인 “천국”과, 영적인 왕국이요 이 교회 시대에 전파되는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볼 수 있게 오는 나라가 아닌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눅 17:20,21)를 “힘으로”(cf. 마 11:12)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스머나 교회 시대에 활동했던 무천년주의자 오리겐이 가르쳤던 교리로서, 퍼가모 교회 시대를 거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어용 교회사가로서 황제에 대한 찬양 일색인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기술하기도 한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하늘의 왕국과 지상의 왕국은 서로 같으며, 황제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제국”인 로마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물 뿌림”을 받은 카톨릭 교회 회원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왕국의 확장”이라고 가르쳤다.

위와 같은 무천년주의 신앙을 체계화한 사람이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어거스틴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카톨릭 신자”라고 부르는데, 그는 성직위계제도(니콜라파의 교리), 마리아 숭배, 유아 세례, 연옥, 화체설 등 로마카톨릭의 근간이 되는 모든 교리들을 믿은 “완전체”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A.D. 426년 자신의 책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왕국의 역사”를 규명했는데,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늘 각각 하나님과 사탄에게 속한 “두 도성의 대립”이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 견해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구약의 신정통치 왕국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열왕기와 시편, 그리고 솔로몬의 책들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승리의 예언들을 교회에게 적용했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그러한 성경 해석상의 오류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명령들을 교회들이 문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 그들을 넘겨주실 때, 너는 그들을 쳐부수고 완전히 진멸시키며, 너는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어떤 자비도 보이지 말지니라』(신 7:2). 십자군 전쟁을 위시하여 로마카톨릭 교회가 벌인 모든 대학살극들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무천년주의 교리였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이스라엘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자칭 유대인들”은 반인륜적인 짓을 벌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게 되었던 것이다(cf. 요 16:2).

-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로마 교회의 부상 -

사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을 썼던 당시의 서로마는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4세기 무렵, 동방에서 온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훈족은 당시 라인강과 다뉴브강 너머에 자리를 잡고 살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했다. 게르만족은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야만스럽게 제국의 영토 안으로 넘어왔고, 그러한 과정에서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시가 약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A.D. 410). 이런 일이 있자 카톨릭 신앙에 대한 회의론이 피어올랐다. 주피터와 다이아나를 섬기던 시절에는 막강했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들이 한참 얕보던 이민족에 의해 유린당했으므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그에 대한 변명을 대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성이 반드시 로마 제국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더라도(A.D. 476) “로마”카톨릭은 여전히 존속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마련한 셈이다. 로마 교회는 패권국의 교체와는 관계없이 그 지배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두아티라 교회 시대 이후에는 아예 대관식까지 맡았다).

문제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주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이는 생각 외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침략자들”이 아니라 “이주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사치와 향락을 마음껏 향유하는 “로마인”이 되고자 그곳에 온 사람들이었지, 로마를 멸망시키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공석인 마당에 로마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로마 교회의 대주교까지 없어진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로서도 로마 교회와의 연대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교들이 내뱉는 라틴어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성경에도 까막눈이며, 당연히 구원받은 적도 없는 게르만족 민중들이 대거 “물 뿌림”을 받고 로마카톨릭 교회 안으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 신을 섬기던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이름만 “예수”로 바꿔 섬기면서도 “그리스도인” 대접을 받았고, 교회의 순결은 이제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로마 교회가 땅의 왕들과 음행함으로써 살 길을 도모한 결과였다(계 17:2). 성경은 현재는 바티칸 “시국”(city)이라는 이름으로 있는 그 자칭 하나님의 “도성”(city)을 우상 숭배자들의 도성, 곧 “바빌론”이라고 부른다(계 17:5; 18:1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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