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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 교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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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6월호>
- 죽은 교회 -『사데에 있으면서 자기들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들』(계 3:4)에게 주어진 것을 빼면, 사데 교회에 대한 내용 중에는 칭찬이 없다. 주님께서 이 교회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혼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에 있어서는 형편없었다.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제도화된 절차에 맞춰 일요일을 교회에서 보낸 뒤에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고,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과 구주에 대한 감사로부터 터져 나오는 생동감 있는 찬송 소리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 세속 권력을 초월한 교황권 -
암흑시대가 도래한 원인이 가짜 성경과 가짜 교회의 등장 및 확산 때문이었다면, 그 시대가 정점에 이른 원인은 그 둘의 확산 주체라 할 수 있는 교황권이 초월적으로 부상한 데 있었다. 물론 교황의 수위권은 교황 레오와 그레고리오 1세 이후로 (특히 서방 교회들에게) 절대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A.D. 1000년 이전에도 세속 권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지난날 교황이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함에 따라 “황제의 머리에 관을 씌워 줄 권위는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 천명된 바 있었으나, 그것은 상징적이었을 뿐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무게 추가 세속 쪽으로 기울어 있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을 알렸을 때만 해도(A.D. 962), 여전히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 선출에 황제의 입김이 작용했고,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그러나 11세기를 기점으로 권력의 무게 추는 반대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A.D. 1077)이다. 이 사건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주교의 서임권은 황제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촉발되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의 지지에 힘입어 교황을 폐위함으로써 맞섰고, 교황은 역으로 황제를 파문했다.
황제 자신은 그레고리오가 “거짓된 성직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파문 결정이 내려진 것 자체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든 제후들이 “파문”이라는 명분을 활용하여 자신을 압박해 왔을 때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앙집권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제후들은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이 진압되는 것을 보며 황제의 권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실제로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제후들은 파문을 철회받지 못한다면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황제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카노사 성에 머물던 교황을 찾아갔다. 교황은 왕복도 벗고 맨발로 알현을 청하는 황제를 눈 내리는 성문 바깥에 무려 3일간 세워 두고서야 파문을 철회해 주었다.
- 클뤼니 운동 -
교황이 황제를 능가하거나 적어도 황제가 두려워할 권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10세기에 발흥한 “클뤼니 개혁”이라 불리는 수도원 개혁 운동 덕분이었다. 혹자는 이를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부흥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권력 투쟁”이었다. 당시에는 권력가들이 성직을 매매하거나 친인척을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땅)을 수탈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설립자인 아키텐의 공작 기욤 1세는 이와 같은 부조리에 염증을 느껴서, 설립자인 자신조차 수도원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뒀다. 수도사들이 그런 세속적인 일들에 휘말리지 않고 “내(기욤) 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데 전념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권력자에게도 구애를 받지 않고 오로지 “사도적 계승권”을 갖고 있는 교황의 통제만을 인정하는 클뤼니 수도원이 세워졌고, 이 클뤼니 수도원에 소속되거나, 그들과 동일한 사상을 공유하는 수도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신성로마제국의 봉건 체제 하의 세속 권력자들 사이에서 불가능했던 완벽한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가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가능했던 것이다. 후일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수도원 부원장 출신이었고, 뒤를 이어 교황이 된 파스칼 2세도 젊은 시절 이곳에 몸담은 바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서임권을 용감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클뤼니 운동에 참여한 자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속 권력에 비대칭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러니까 세속 권력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회와 수도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세 암흑시대의 권력 구조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개편되었던 것이다.
클뤼니 운동은 자명하게도 금욕, 독신주의, 형식주의 등을 강조하는 “수도원주의”의 확산을 가속화했고, 교회를 회칠한 무덤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레고리오 7세 이전까지만 해도 결혼한 로마카톨릭 사제가 성무를 집전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레고리오 7세는 기혼 성직자들의 성무 집행을 아예 금지했다.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그들이(마태복음 8:14에 따르면 베드로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독신생활을 강제했던 것은 세속 권력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지역 영주들과 혈연관계로 엮인 성직자들은 교황이 아닌 봉건 귀족들의 편에 설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마귀들의 교리(딤전 4:1-3)를 교회 안에서 강제했던 것이다.
- 십자군 전쟁 -
카노사의 굴욕으로 서임권 투쟁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당하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교황과 황제는 서로 “대립 왕”과 “대립 교황”을 세우는 파국으로 또다시 치닫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황제가 반란군을 쳐부수고 로마를 점령하여 복수에 성공했다(A.D. 1084). 황제와 교황 사이에 벌어진 서임권 투쟁은 앞서 언급한 교황 파스칼 2세 때까지 엎치락뒤치락 이어졌다.
상황이 위와 같다 보니, 당시 교황들은 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투쟁의 종지부를 찍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바로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도움을 청해 온 것이었다. 동로마는 서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수백 년간 명맥을 이어왔지만, 신흥 세력인 셀주크 제국과의 전투에 대패하여(A.D. 1071) 소아시아 영토 상당 부분을 내주고 존립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로마는 그 모슬렘 “이교도들”을 몰아내 달라고 “형제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동로마가 군사적 실권자들이 아닌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선택했던 것은 어떤 왕 하나를 설득하는 것보다 그 영향력이 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동로마 황제의 판단은 적중했다.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에서 공회를 소집하고 탁 트인 들판에서 모슬렘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성지순례자들의 실정에 대해 일장연설을 토해 냈다. 셀주크 투르크는 국가 차원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백성이나 여행자를 박해한 적이 없었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교황은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성전”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것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 학살, 약탈 따위를 밥 먹듯이 자행하는 까닭에 늘 지탄의 대상이었던 서유럽 기사들에게는(당시의 기사들은 후대에 윤색된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구원” 혹은 “명예 회복”이란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었다.
연설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연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Deus vult)를 외쳤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참전을 맹세했다. 교황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싸우러 나갈 이들은 “십자가”를 옷이나 방패 따위에 새기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유럽 각지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이바지할 “십자군”이 모여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A.D. 1096). 이렇게 해서 교황은 말 한마디로 초국가적 군대를 거병하여 원정을 떠나게 할 수 있는, 초월적인 권력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2세의 정치적 노림수는 장기적으로 볼 때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있었던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은 제1차 원정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성지”를 무력으로 탈환하지 못했고, 오히려 “순례길”을 가는 동안 닥치는 대로 “형제들”을 수탈하여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공분을 샀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십자군은 “성지”를 향해 진격하지도 않게 되었고, 심지어 돈 때문에 “기독교 왕국”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은 본래의 목적에서 한참을 벗어나 성경대로 믿는 “이단들”을 사냥하는 데 십자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십자군의 패배, 도덕적 해이, 변질은 “교황의 무오함”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의문은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피범벅으로 “붉게”(사데) 만든 자들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