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교회 분류
교회와 국가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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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7월호>
B.B.평론은 현재 우리 나라 신학의 흐름을 파악하여 교계에서 이름난 설교자들이나 학자들의 글을 매회 한 편씩 선정하여 성경적인 관점으로 논평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호에 다루어질 주제는 “국가와 교회”로서, 제시되는 자료는 월간 「목회와 신학」(두란노서원) 1993년 6월호에 게재되어 있는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를 논한다」라는 제목의 권두 좌담에서 선택했습니다. 〈참석자: 김원배(기장신학연구소), 박정진(한신대), 유석성(서울신대)〉 - 편집자 주교회와 국가, 이 두 기관은 2000년 교회사상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교회가 국가에 의해 박해받기도 하며 반대로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기도 하면서 타협과 배재가 이루어지는 동안 여러 신학자들은 그 관계를 정립시켜 교회의 나아갈 바를 밝히려 하였다. 역사상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 문제에 직면했고 130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항상 대두되었다. 특히, 최근 제 7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더욱 두드러진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문제는 신학계와 교계에서 여러가지 관점으로 다루어지며 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문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잘못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영방침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모든 영역에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치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이 범하는 두 가지의 오류는 첫째 현대 국가에 대해서 구약의 신정국가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과 둘째 칼빈주의식의 ‘하나님 주권 사상’을 적용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으므로 지금 이 세상의 통치자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장신학연구소 김원배 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하나의 이념공동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비루, 곧 중동의 어중이 떠중이로 떠도는 노예들의 백성들이었는데 그러한 노예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그들은 단지 약속된 땅에서 공동의 야웨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파동맹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야웨통치와 관련해서만 국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p.32).
김원배 소장은 구약 이스라엘의 신정국가를 모델로 삼아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의 국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전체적인 통치의 섭리와 관련해서 특별히 뽑으신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정하셔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사실 이스라엘의 시작은 김원배 소장이 말한 것처럼 노예 상태에서가 아니었다), 그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그 민족을 통하여 세계 구속을 이루려 하셨다. 이스라엘은 우리를 포함한 이방민족(국가)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특별한 민족으로 위치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개념을 현대 이방국가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의 입장을 살펴보자. 박정진 교수(한신대)는 “개혁파 교회의 그리스도 왕권 통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부터 출발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이원적인) 두 가지 통치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내원과 외원으로 표현되는 이중원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p.35)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세상이 하나님의 왕국과 세속왕국의 두 가지 나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세상 나라의 중심에 서서 역동적으로 세상을 통치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빈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칼빈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이어받았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왕국과 구별하여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영적인 왕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단순한 영적인 왕국이 아니라 세속왕국에도 영향을 끼치는 왕국이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왕국”을 교회에다 두셨고, 교회가 날로 확장됨으로써 “천국”이 넓혀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영적 왕국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상 군주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그들도 영적인 “왕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교회의 우두머리가 세속왕국 마져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도 같은 관점에서 제네바 개혁을 하였는데 그는 하나님 통치의 “당위성” 안에서 “교회법”으로 제네바 도시를 다스렸다. 그럼으로써 그는 한 모델국가를 실현하려 하였는데 이것을 소위 “교회국가”(Church-State)라 한다. 그의 엄격한 교회규칙은 시 의회를 통과하였고, 소위 “정의”가 실현되었는데, 1542년에서 1546년까지 화형에 처한 사람이 58명, 추방당한 사람은 76명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교회가 그러한 일을 했었고 더우기 교리가 좀 다르다고 형벌을 받은 자도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명백하게 또 하나의 종교재판의 모습이었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여 교회의 순결을 지키며 순교당한 믿음의 선진들은 그들의 적들에 의해 항상 “분리주의자”(Separatists)로 불렸다. 그들은 4세기의 도나티스트며 8세기의 폴리시안이며 11세기의 왈덴시안이고, 16세기의 재침례교도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연합과 통일성을 파괴시킨다는 죄목으로 어거스틴과 중세 음녀교회와 심지어 개혁주의자들에게 까지도 박해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방침을 알았던 자들이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나 ‘왕국’이 아님을 알았던 자들이며, 이 세상의 신이 사탄인 것을 알았기에 교회의 순결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자들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시다(요18:36). 오히려 현재 이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자 신은 사탄이다(요14:30; 고후4:4). 칼빈주의는 근본적으로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와 연결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이것은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영방침을 무시한 결과이다.
다음으로 대두되는 문제는 “저항권”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문제인데, 이점에있어서 유석성 교수(서울신대)는 몇가지 비성경적인 실수를 한다. 먼저 그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계시록 13장에서 끝까지 견디는 환란 성도의 모습을 현시대의 폭정에 저항하는 교회의 저항권의 모습으로 그려넣는다(p.34).
이어서 유석성 교수는 현대신학자 본 훼퍼의 정치신학을 결론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국가가 잘못되면 교회는 예언자적 기능을 다하여 국가에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본래적인 기능인 국가가 질서와 공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정치 비판적인 예언자의 기능을 잃으면 안됩니다”(p.38)
유석성 교수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본 훼퍼는 하나님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현실을 통하여 세상의 현실로 들어왔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이 오신 이 세상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라고 보았습니다”(p.37), “예수님의 경우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정치적 재판으로 죽으셨고 본 훼퍼도 바로 살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다보니 정치적 사건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습니까?”(p.38)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영방침을 아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죽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였고(마1:21),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딤전2:4). 그는 하늘로 오르시면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은 하셨어도(마28:19-20), 세상 제도를 변화시키라는 명령은 하신 적이 없다(행1:6-8).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국가를 대할 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것들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롬13:1),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 『...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를 하되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근엄한 가운데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려함이라』(딤전2:1-2).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일단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의무들, 곧 납세의 의무, 병역의 의무 등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국가가 교회를 박해하거나 그에 준하는 일을 할 때는 그에 관해서 불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법(교회법이 아닌)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개혁이나 정치개혁을 외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정의 자체를 위해 투쟁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회 변혁을 위해 기도한다(예를들어 1.1.1.기도운동). 하지만 우리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목적은 디모데전서 2:1,2의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는 이사야나 아모스 같은 예언자가 아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국가의 압력도 지지도 받을 필요가 없다. 교회와 국가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교회-국가”의 연합이 있어서는 안된다. 세속적인 어떤 세력도 교회를 간섭할 권한이 없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세력을 가져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단지 국가는 세상제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세우신 기관일 뿐이다(벧전2:13-15).
세상 제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후천년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이 정치권에 서게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계에도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내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개역성경에는 ‘지금은’이라는 말이 삭제되어있다)』(요18:36). 지금 이 세상의 통치자는 사탄이다(요14:30). 그가 통치하는 이상 이 세상에 공정한 국가는 결코 없을 것이다. 미래에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올 것이고 세상 나라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계19:15, 20:4; 단2:44).
지금까지 다루었듯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사람들의 커다란 문제는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방침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되었다. 그들의 글을 읽다보면 성경을 통한 논증이라기 보다는 몇몇 신학자들의 말을 통한 논증일 뿐이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부족연합의 이념공동체였다느니, 정치신학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통치하실 것인지 알았던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교회와 국가를 분리해서 생각하였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국가에 의해 때로는 교회에 의해 순교당했다.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은 누가 권세를 잡았든지, 국가에서 교회의 위치가 어떠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야말로 “의의 통치”가 실현되는 때이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안다. 정치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함으로 그 말씀을 자신들의 사고 속에 정립해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