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총론 분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배우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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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2월호>
성경을 변개시킨 사람들과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변개를 정당화하고자 여러 이론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삭제하거나, 첨가하거나, 대체시키는데 근거를 제시하려는 의도로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영감 받지 않고 개념이나 사상에만 영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부각시키며 확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세부적인 진술들이 각 복음서마다 다르다는 것을 예로 들어 영감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개념 영감설이나 목적 영감설을 주장합니다.물론 이론의 여지없이 사복음서의 기록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차이들은 무슨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그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실한 기록을 하지 못한 기록자들의 잘못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 기록에 영감을 주신 성령님의 분명한 계획과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외에 다른 어떤 이유가 제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는 진리 아니면 거짓 둘 가운데 하나만 있을 뿐이며, 진리와 거짓이 혼합된 것 역시 거짓으로 판명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복음서에 차이가 드러나는 원인이 첫 번째 이유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에 일부가 삭제되고, 첨가되고, 대체된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라면 “성경”은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글자도 삭제나, 첨가나, 대체되어서는 안 되며, “성경”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 가운데서도 귀중한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가 어떤 잘못, 즉 기록자들이 각기 기록하는 부분에 관해서 부주의했거나 망각했다는 것에 기인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차이들 가운데는 그것들이 진정으로 모순이나 오류라고 입증된 단 하나의 예도 없기 때문이며, 둘째, 그러한 차이들을 주의 깊게 공부할 때 사복음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기록된 것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여러 경우에서와 같이 사복음서에 제시된 성령님의 분명한 계획과 의도를 인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성경의 한 자 한 자가 영감 받은 것이지, 단 한 글자도 결코 인간의 판단이나 생각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영감에 관한 논의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복음서의 기록자에게(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가운데 한 사람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등에 관해서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개의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각각의 분리된 기록과 설명에 특별한 목적이 있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같은 관점과, 같은 문체와, 같은 단어들로 같은 행적들을 기록했다면 계획된 의도와 목적을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사복음서가 단어 하나하나에 영감받지 않았고, 세부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기록자
들이 그들의 기준에 따라 기록했다면(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유기적 영감설과 개념 영감설에 따라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현재 사복음서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차이점들은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기록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러한 차이점들을 제거하고 일치시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같은 부분을 기록할 때에 누가는 마태복음을, 마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요한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함께 비교해서 이전에 기록된 것과 맞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사복음서의 기록이 전혀 인간적인 기준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단 하나의 글자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감으로 기록했던 복음서의 기록자들과, 필사자들이 오늘날의 학자들보다 사복음서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그러한 차이점을 알고서도 왜 그대로 기록했겠습니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면 그 문제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특별한 측면을 각각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서, 마가복음에서는 “종”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인자”로서,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같은 말들을 들었으며, 같은 행동들을 목격했음에도 각각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글에 배재시킨 내용과 기록한 내용이 구분되어 있으며, 그들 기록의 독특한 관점과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완전한 조화를 이룬 기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분명한 목적과 의도 없이 왜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을 통해 복음서를 기록하셨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논란 없이 기록하도록 하실 수 없었겠습니까? 이제 그 증거들을 각각의 복음서에서 발견한다면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 은혜를 통한 구원의 교리에 대해 온전한 설명을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과 구원에 대해서 쉽게 말씀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마태복음에서는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구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마태는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며, 지상에 있고, 다윗의 보좌에 앉을 왕이 제시하는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연관된 원리들과 법칙들에 관련이 있는 가르침과 사역들에 대해서 기록하며, 그와 연관된 관점으로 기술하도록 인도받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다는 것은 마태복음 2:2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렇게 왕으로 오셨기에 산상설교를 통해(마 5-7장)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셨고, 그 외에 12가지 천국의 비유들(마 13,18, 20,25장)이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복음전파와 연관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천국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서 전할 때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마10:5-7).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셨습니까? 왜 이렇게 기록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이 이와 같은 특별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처럼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는”(I AM)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출3:14)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는”(I am) 길이요, “나는”(I am) 선한 목자요 등등의 “나는”(I am)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6:35; 8:12, 58; 10:7,11,14; 11:25; 14:6; 15:1).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을 기록함으로써(요1:48; 2:25)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4:9).
요한복음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계시되었던(고후12:2-4, 엡3:3)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후에 쓰여진 유일한 복음서입니다. 육신으로 오신(요1:14) 영원하신 하나님(요1:1)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왔으나, 그 분의 백성이 거부한 이후에 세상 모두가 그 분의 이름을 믿는 순간 은혜의 근거 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사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요1: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은혜의 교리들이 풍성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분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오셨으나 그들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이 복음이 즉시 모든 이에게 열렸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라고 규정된 초대(마10:5,6; 15:24)가 아닙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복음이 요한복음에 제시된 것입니다(요1:12). 요한복음 1:2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그 분의 백성인 유대인들만이 아니다) 이처럼 사랑하셔서』(요3:16).
이와 같이 복음서는 각각의 특별한 관점과 목적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가르침과 사역들이 기록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말씀의 조화 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사역들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각 기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조화롭게 계시하셨고, 또한 성도들이 그것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없이 문자적인 차이를 단지 모순이나 오류로 판단하거나,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꾼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딤후2:15).
학자들이 사복음서의 차이를 모순과 오류라고 말하거나, 글자 하나하나가 영감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시대를 거쳐 오면서 난해 구절로 분류되어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계보에 관한 구절들에서도 각각의 복음서 기록자들이 성령님의 특별한 의도하심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차이점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계시하셨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분명히 확인함으로써 기쁨을 맞볼 것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대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보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가문 계열을 따라 요셉과 같은 계보에 들어 계시다는 것입니다(마1:1,6, 16,17, 눅2:4).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연관하여 다윗의 법적인 상속자임을 나타내며, 이는 마태복음의 첫 시작에 정확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라』(마1:1). 둘째, 이 계보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마태복음이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야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며,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주님의 계보나 탄생에 대해서조차 전혀 언급이 없으며, 처음 30년의 생애에 대해서도 완전히 지나쳐 버리고 갑자기 그리스도께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소개하면서 공적인 사역을 바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겠습니까?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서 기술하기 때문에 계보와 탄생, 또는 사역 이전의 생애에 대한 어떤 설명도 배재하고 사역에 대해서 기록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더욱 주목할 것은 “곧”, “즉시” 등의 용어가 반복해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으로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막10:45).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같이 주님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름들을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과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계보는 아담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성령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를 인자로서 기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특별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누가복음의 계보는 마리아의 계보라는 것입니다(눅2:23-38). 이는 그녀의 아버지인 헬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눅3:23-24).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왕의 계보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누가복음의 계보는 마태복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끝나지 않으며, 이스라엘과의 관계만을 설정하지 않고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까지 올라가며, 약속된 여자의 씨임을 나타냅니다(창3:15).
요한복음도 마가복음처럼 계보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마가복음이 그 계보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즉 신성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계보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영원부터의 기원을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첫 시작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요1:1). 이제 사복음서를 보다 깊이 공부하면 얼마나 조화롭게 기록되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태복음에는 산상설교를 기록하신 반면(마 5-7장), 누가복음에는 기록하지 않으셨으며 대신에 평지에서 행해진 유사한 또 다른 설교를 기록하셨습니다(눅6:17-49).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계보를 기록하시는 반면, 누가복음에는 다른 의도 하에 그리스도로부터 아담과 하나님까지의 계보를 기록하셨습니다(눅3:23- 38). 마태복음에는 시력을 회복한 두 명의 소경들에 대해 기록하시는 반면(마20:30), 같은 상황인데도 마가복음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을 기록하셨습니다(마10:46). 또한 마태복음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기록하셨지만(마5:20, 24:17-21),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기록하고 계십니다(요3:36).
이제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들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인도아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깊은 것들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 수 있으며, 전에 얻지 못했던 복음서의 완전함과 조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경험의 한도 내에서” 성경을 기록했다면 결코 이러한 완전함과 조화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복음서의 차이들은, 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영감 받아 기록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