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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이단의 교리적 망상”-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및 네피림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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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9월호>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역의 은사들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것”에 있다(엡 4:12,13). 그 이유는 의의 종으로 가장한 거짓 교사들이 온갖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도처에 거짓 교리의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엡 4:14). 이러한 거짓 교리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이 올바른 교리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거짓 교리들 사이를 오가며 안정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온갖 교리의 풍조 속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세월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위한 강한 군사로 성장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교리적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이 교리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한 가지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바른 성경을 통해 바른 교리를 정립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책망과 바로잡음, 의로 훈육하는 것 등의 영적인 유익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것들로 알맞게 다듬어진 사람들은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없다.
특히, 한 지역 교회를 담당하는 목자들은 성도들을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을 바른 교리로 양육시킬 책임이 있다. 성령께서는 이 점을 강조하시기라도 하듯, 목회서신에 해당되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 『교리』라는 단어를 무려 17회나 기록하셨다. 마지막 때에는 양심이 화인을 맞은 위선자들이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딤전 4:1)을 따라 거짓 교리들을 양산하고 퍼뜨릴 것인데, 모든 성도들은 이것들이 교회 내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선한 교리』(잠 4:2)와 『건전한 교리』(딤후 4:3)를 따라 『말씀과 경건에 따른 교리』(딤전 6:3) 안에 굳건히 서서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딤전 4:1) 또는 『다른 교리』(딤전 1:3)와 『이상한 교리』(히 13:9)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 교회의 현실은 그러한 거짓 교리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로서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싸울 만한 바른 성경과 바른 진리를 그 손에 『가지고』(엡 6:17)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기독교 신문 크리스챤신문, 2004. 08. 02. 7면.
의 전용관 부장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베뢰아, 16년간 감추어진 실상과 진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및 네피림의 정체(창 6:1-4)”에 대해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베뢰아 이단의 김기동 목사가 내놓은 이단적 교리가 마치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난제 해결의 실마리라도 되는 양 심층 취재 분석해 놓았던 것이다(하지만 그는 이 구절에 관해 미시적인 자구해석에만 빠지지 말 것을 권고하는 가운데, 통일된 해석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창세기 6:1-4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는 죄성 때문인데, 여기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유(은유)적으로 해석하여 혼란만 가중시키는 학자들의 무지가 한몫을 하고 있다. 전부장은 이 구절들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누구인가? 둘째, 사람의 딸들이란 누구인가? 셋째, 하나님의 딸들과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짝은 왜 없는가? 넷째, 하나님의 신은 무엇인가? 다섯째,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인가? 여섯째, 일백이십 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일곱째, 네피림과 그 자손들은 누구인가?” 특히, 첫 번째로 제시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한 문제는 나머지 여섯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에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들의 정체”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까지 연구해 왔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에 현 기독교계에서는 그들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욥기 1:6과 2:1의 천상회의에 등장하는 천사들”과 “경건한 계보의 셋의 자손들”이라는 해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밖의 해석으로는 “고대 근동의 배경에서 신격화되다시피 했던 왕족들,”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하는 나쁜 왕들이나 지주들,” “다른 신을 섬기는 카나안 사람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있기에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다. 다만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두 가지 해석 중 “경건한 계보의 셋의 자손들”이라는 주장은, 지면상 “성경에는 경건한 계보가 나타난 적이 없다”는 말로 그 주장이 비성경적임을 일축해 놓겠다. 피터 S. 럭크만,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말씀보존학회, 1998), pp.189-199 참조.
그렇다면 전자의 해석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기동 목사가 내놓은 거짓 교리를 바로잡는 가운데 제시하도록 하겠다.
과연 김목사가 내놓은 망상적 교리는 어떤 것들인가?
첫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영적 존재인 아담의 자손들, 곧 영을 가진 최초의 사람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담이 최초의 사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육신과 혼만 있는 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사람들 창세기 1장 26,27절에 창조된 사람을 말한다.
은 2장 7절에 나오는 ‘생령’과는 달리 하나님의 생기 곧 영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생물학적 유전은 가능하지만 영적인 유전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자체가 여섯째 날 모든 동물을 만드심같이 흙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몸과 혼으로 구성된 완전한 인격적 존재였습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다만 영적인 요소가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김기동, 마귀론, (도서출판 베뢰아, 1988), p.63.
“아담 이전 사람들은 영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할 필요 없이 동물적으로 그냥 살다가 죽었으나” 김기동, Ibid., p.65.
그는 이들의 존재에 대한 근거 구절로 창세기 4:14을 제시한다. http://bereapress.co.kr, 도서출판 베뢰아, 베뢰아 용어 해설 - 네피림.
이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날 때에 있었던 상황으로, 그가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리이다.』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내용이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 당시 성경에 제시된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카인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김목사는 이 구절에서 카인이 만나기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영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1:27,28은 창세기 2:7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또한 아담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2:7의 앞에 나오는 문맥을 읽어 보라. 아담 이전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는 주 하나님께서 땅 위에 비를 주시지 않았으며 또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음이더라』(창 2:5).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상황 속에서 최초의 사람, 곧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다(창 2:7). 아담 이전에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창세기 4:14을 해석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른 후에』(창 4:3)와 아담이 130세 무렵에 셋을 낳았다는 점(창 5:3)을 감안해 보면 카인이 그러한 살인을 저질렀을 당시에 그 땅에는 상당히 많은 아담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p.159.
어쨌든 아담 이전에 또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해석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김목사의 망상의 나래는 끝이 없다. 영이 없는 사람들이 창조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생기”(개역성경)를 불어넣으셨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바로 아담이었던 것이다. 당시로서 아담은 영을 가진 최초의 사람이었기에 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이 땅에 충만한 사람 중에서 아담 하나를 뽑았으니 그 아담은 얼마나 개화된 인간이었겠습니까? 김기동, 마귀론, p.65.
“반면에 아담은 몇몇 사람 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인 한 사람을 드디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김기동, Ibid., p.65.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1:27,28에서 창조된 사람이 곧 창세기 2:7에 언급된 바로 그 사람(아담)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김목사는 이 둘을 구분하여 창세기 1:27,28의 사람이 영이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도 영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혹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고후 4:4, 골 2:9, 히 1:1-3)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는데, 골로새서 2:9에 따르면,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신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신격(Godhead)』이라 함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형태로 삼위 하나님의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언급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각각의 “위(격)”에 해당하는 영, 혼, 몸을 의미하게 된다. 즉,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몸, 혼, 그리고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7에서 『땅의 흙』인 몸, 『살아 있는 혼』의 혼, 『생명의 호흡』인 “영” 모두를 갖고 있는 아담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살아 있는 혼』이 「생령」으로 변개되어 있기 때문에 김목사로 하여금 아담이 “최초의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그토록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최소한 아담의 후손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런 규칙 없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교리적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범죄하기 전에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눅 3:38)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 모습대로』(창 5:3) 그 후손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그들의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다(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그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 영이 거듭나야 한다(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 요 3:1-13). 바로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곧 믿기만 하면 그 죽은 영이 살아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데 이는 그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 중에는 거듭난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물로부터 구원받았던 노아의 가족조차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다시 김목사의 두 번째 망상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후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사람의 딸들은 아담 이전의 영이 없는 존재들의 후손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영적인 존재인 아담의 후손들)과 사람의 딸들(영이 없는 육적인 존재들)의 결합으로 “네피림”(개역성경)이 태어났으며, 이로 인해 순수한 영적인 혈통은 사라져 가고(창 6:3) 이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영적인 혈통을 유지하고 있던 노아의 가족만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멸하셨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김목사는 이러한 “네피림”을 영이 없는 존재로서 아담 이전의 사람들과 동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크리스챤신문, 7면.
이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창 6:3, 개역성경) 바른 성경에는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라고 번역되어 있기에 김목사의 해석과 같은 망상을 주장할 수가 없다.
라는 구절에서 「나의 신」을 아담에게 최초로 부여했던 “생기”와 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순수한 영적인 혈통은 “네피림”으로 전락하여 영이 없는 존재로 회귀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불순한 결합으로 영이 없는 존재들이 태어났으며 “네피림”의 히브리어 단어에 들어 있는 의미와 맞물려 그들은 타락해 버린 존재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네피림”(nephilim)은 히브리어로 “타락한 자들”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바른 성경에는 창세기 6:4에 쓰인 단어가 “네피림”으로 음역되어 있지 않고 “거인들”(giants)이라고 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유의해 보면 그런 주장은 망상임이 금새 드러난다. 성경은 그러한 존재들이 홍수가 있었을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도 존재했다고 말씀한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존재는 분명 홍수 이후에도 존재했다. 만일 김목사의 주장대로 홍수로 인해 “영이 없는 육적인 존재들”이 모두 멸절했다면, 어떻게 그 이후에도 그들은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노아의 순수한 영적인 혈통이 “변이”라도 일으켰단 말인가?
사실 이러한 모든 망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바른 해석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롬 1:3,4).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린다(요 1:12).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눅 3:38). 하지만 이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구약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홍수 직후 쓰여진 책인 욥기(욥 1:6; 2:1)에 잘 정의되어 있다. 이들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창조된 “천사들”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움을 찬양했던 자들이다(욥 38:7).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나(유 6) 이 땅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을 취했는데, 이 불순한 관계 속에서 이상한 “거인족”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홍수 이후에도 존재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그 “거인들”을 대면했다(민 13:33, 신 3:11, 수 17:15, 삼하 21:16,17, 대상 20:4 등). 이 타락한 천사들은 현재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갇혀 있다(유 6).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사람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고, 120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시는 가운데(창 6:3) 홍수로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말씀보존학회 간>를 참고할 것).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22:30을 근거로 “생식할 수 없는 천사가 어떻게 후손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반박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역성경에 『하늘에 있는』이란 단어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성이 “중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위치가 “하늘”이기 때문이다(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천사들은 항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천사들이 타락하여 이 땅으로 내려올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또한 김목사는 히브리서 1:5을 근거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김기동, 마귀론, p.67,83.
그러나 이는 히브리서 1:5이 문맥적으로 의도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 구절은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더 월등한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시편 2:7과 사무엘하 7:14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모두 영원한 왕국과 보좌를 약속받은 그 “아들”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 내용 중에서 초림에 해당되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태어난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바로 그 아들께서는 재림 때에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약속들은 천사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가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편적인 지식은 바른 지식이 아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지식의 증가’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그 말씀을 닫고 그 책을 봉하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릴 것이요 지식이 증가하리라.” 하더라』(단 12:4). 거침없이 증가하는 지식의 양상들은 ‘정보 홍수’나 ‘지식 경영’이라는 말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적인 지식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급기야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버리고 상대적인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불신은 무지를 낳게 되고, 거짓 교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기는커녕 상대적인 진리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을 통해서는 항상 성경을 배우려고 노력해도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다(딤후 3:7).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견해를 마치 성경적 진리인 양 이리저리 섞어 놓아 수많은 교인들을 파멸과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혼란의 창시자는 사탄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고전 14:33). 바른 성경이 없으면 바른 교리를 정립할 수 없고 바른 교리가 정립되지 못하면 바른 영적인 교훈들을 얻을 수가 없다. 바른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없으면 교리적인 혼란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심지어는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다음과 같은 권면에 주의하도록 하자.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딤전 4:1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