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왕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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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3월호>

지난 호에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그 영광의 보좌를 계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계보와 함께 다루었다. 마태복음 1장의 계보의 위치와 그 계보의 순수성, 그리고 그 계보는 왕적 메시야의 계보(Kingly Messianic Line)라는 것을 밝혔다. 이번 호에서는 마태복음 2장을 중심으로, 그 분의 탄생이 위대한 왕의 탄생이라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2:1,2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니, 보라, 동방으로부터 현자들이 에루살렘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 분께 경배드리러 왔노라.”고 하니라.』

마태복음 2장의 큰 주제는 왕의 탄생이다. 1장에서 우리는 왕께서 나타나시는 모습을 그의 족보를 통해서 살펴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왕의 씨를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하셨는가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순수한 왕의 계통을 통하여 이제 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것처럼 영광스런 왕의 입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은 말 구유에 누우신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장에서는 초라한 말 구유가 묘사되지 않고 왕과 관련하여 예루살렘과, 왕이 받으시는 경배가 묘사되어 있다.
2절에서, 동방으로부터 온 현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을 찾는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 그들은 왕을 찾았다. 여기서 동방의 현자들이 왕을 찾는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당시 동방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유대인의 신앙이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았다는 사실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창세기 9:26에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할뻔 했던 아비멜렉은 꿈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었고, 예레미야 40:2-5에서 바벨론의 군대대장 느부살아단도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알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캇넷살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았다(단 4장). 이쯤되면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우기 공부를 했을 만한, 동방으로부터 온 현자들이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예언들을 알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동방으로부터 온” 현자들은 20세기의 후천년주의 학자들이나 무천년주의 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다니엘이 동방에 있었을 때 기록했던 다니엘 9장을 알고 있었다. 느헤미야 2:1에서 아닥사스다 왕(445-446 B.C.)이 칙령을 선포한 때로부터 계산해 봤을 때, 그리스도께서 승리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정확한 날짜가 다니엘 9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정확한 정보는 로버트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의 “다가오는 통치자”(Coming Prince)나 라킨(Larkin)의 “다니엘(주석)”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민수기 4:43과 사무엘상 2:35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이전에 30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자들이 왜 민수기를 공부하지 않았겠는가? 민수기에서는 유대인의 왕을 나타내기 위해 한 별을 말하고 있다(민24:17). 이것은 왕에 대한 별이고 그것과 연관해서 “홀”(sceptre)이 언급되어 있다. 단지 그들은 평범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몰랐을 뿐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오신다는 것을 알았다.

2:3,4 『헤롯왕이 이 말을 듣고 온 예루살렘과 더불어 놀라서 백성의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함께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혼란케 하는 자(trouble-maker)”이시다. 그는 평화의 통치자(사9:6,7)이시지만, 그가 세상의 악을 멸하시고 왕으로서 다스리시기 전까지는 그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아니라 “혼란케하는 자(trouble- maker)”이다. 그의 탄생의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엔 소동이 일어났고, 그가 태어나자 베들레헴에선 아이들의 대량학살이 있었다(마2:16). 그는 세상의 사람들은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 하셨지만(요3:16), 세상을 미워하셨기 때문에(요일2:15,16) 그는 세상의 악이 제거될 때까지는 여전히 “혼란케 하는 자”로서 계신다. 지금도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요15:18,19). 세상과 그리스도인은 결코 일치될 수 없기에 성경대로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혼란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헤롯이 몹시 놀라서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대답은 요한복음 7:27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들은 미가서 5:2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헤롯에게 말했으면서도 요한복음 7:27에서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요한복음 7:42에서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그를 거부하고 있기에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그들의 왕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헤롯은 새로운 “왕”을 죽이기 위해서 현자들에게 자세히 묻고 그들을 보낸다.

2:9,10 『그들이 왕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는데, 보라,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어린 아이 있는 곳 위에 와서 멈춘지라. 그들이 그 별을 보고 심히 기뻐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소위 말하는 “성탄절”의 시간적 차이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누가복음 2장의 마굿간 사건과 마태복음 2장의 “동방 박사”사건을 동일하게 생각한다. 많은 “크리스마스 캐롤”들이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사건 사이에는 적어도 1년 이상 약 2년 이하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9,11,13,14,20의 “어린 아이(young child)”라는 낱말을 주목하라. 그리고 누가복음 2:12,16의 “아기(babe)”라는 낱말을 주목하라. 성경에서 “아이(child)”라는 말은 단지 “어린이”, 또는 “자녀”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어린 아이(young child)”나 “아기(babe)”라는 말은 나이의 개념을 분명히 한, 덜 어리고 더 어린 아이를 묘사할 때 쓰인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어린 아이”와 누가복음의 “아기”는 시간적 차이가 있으며, 마태복음의 “어린 아이”는 누가복음의 “아기”보다 얼마 더 자란 아이이다. 누가복음 2장에서 목동들이 왔을 때 “아기”는 마굿간 “구유”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어린 아이”는 “집”에 있었다(마2:11).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그녀의 정결례를 위한 제물을 드릴 때, 그들이 매우 가난했으므로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으나(눅2:24),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황금이라는 예물을 받았을 때, 그들은 부자가 되어서 이집트로 여행할 여유가 생겼다(마2:11). 더우기 마태복음 2:16에서 헤롯이 죽인 어린 아이들은 두살 이하의 아이들로서 그 간격이 약 2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별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 나타났고, 그 때 목동들이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갔으며(눅2:15-20), 현자들은 그 때부터 출발하여 약 2년의 기간 동안 여행을 해서 예수께서 계셨던 “집”에 도착해 경배드렸고, 그때 예수께선 이집트로 피하셨으며 베들레헴에 있던 어린 아이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이후 처음으로 순교를 했다. 이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이는 만 한 살이 지나 만 두 살이 되지 않은 나이셨다. 그리고 현자들이 약 2년에 걸쳐서 여행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중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2:11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서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어린 아이를 보고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현자들이 엎드려 “경배(worship)”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는 경배했다는 말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목동들이 경배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그때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을 왕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기록으로 볼 때 그들은 단지 보았고(눅2: 15),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렸을 뿐이다(눅2:20).
그러나 마태복음의 현자들은 그 어린 아이에게 ‘경배’했다. 그리고 경배받는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라 분명히 ‘어린 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로마 카톨릭의 그림장이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경배한 것이 아니다. 경배는 엎드려 발에 입맟추는 행위인데, 대부분의 로마 카톨릭들은 교황과 마리아에게 그같은 행위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가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있는 어린 아이”에게 경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자들이 가져온 예물들은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주님의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인정하는 예물들이다.
황금은 왕을 위한 것이다(왕상10:16 -21). 금은 성경에서 가장 가치있는 보물로 여겨진다. 성소에서 사용되는 기명들은 모두 금으로 입혀졌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다. 금은 왕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물이다. 그러므로 금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한다.
유향은 제사장과 관련되어 있다(출30:34-48). 제사장은 향을 피우며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임무를 맡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임무를 맡으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제사장”(King- Priest), 또는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제사장이시라는 것이다. 그의 예표는 스카랴 6:11에서 여호수아이며(그의 이름은 예수와 같다), 그의 또 하나의 유형은 멜키세덱이다. 그는 살렘왕이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히7:2).
다음으로 몰약은 그의 선지자이심을 나타낸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액체이며, 그것은 슬픔과 탄식과 눈물과 죽음에 관계된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으로 오셨을 때 선지자로서 죽으셨다(신18:15-17, 마21: 11). 이 분은 왕-제사장-선지자(King- Priest-Prophet)이시다. 그의 지상생애 때에 처음과 마지막에 받으신 것이 몰약이었으며(막15:23), 몰약은 그 분의 선지자 사역을 위해서 예비된 예물이었다.

2:14,15 『그가 일어나 밤에 어린 아이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서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여기서 인용된 구절은 호세아 11:1의 말씀으로,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은 이 구절(호세아)을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용하여 설교하곤 한다. 이 설명은 어느정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탄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불려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세상’(world, world system)을 상징한다(창12:12, 37: 36; 출1:11, 20:3; 신4:20; 렘46:25; 겔20:7; 계11:8; 왕상3:1, 11:5,8).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불려냄을 받은 민족’이라면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불려냄을 받은’ 사람,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그래서 설교자들 중에서는 출애굽사건을 성도의 구원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종종있다. “홍해를 건넌 것은 거듭남, 곧 구원이고, 광야생활은 시련과 은혜가 있는 성도의 삶이며,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안식이다.”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영적인 가르침을 받기에도 오류가 있으며, 정확한 교리적인 설명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으나, 이스라엘은 그 일부가 광야에서 끊쳐졌으며, 요단강 이후의 사건은 안식이 아니라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사사기를 읽으라).
호세아의 이 말씀은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 이상의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여기 마태복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집트로 피난가셨다가 돌아 오시는 사건에 적용된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한 ‘아들’이다(출4:2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도 위대하신 ‘아들’이시다. 또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종’인데(servant-nation / 사41:8), 예수 그리스도는 ‘종’인 아들이시다(Servant- Son / 사42:1-4; 52:13,14).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역사적으로 적용된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언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적용이 가능한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훈련받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대환란 기간이다. 민족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대환란기간 중에 다시 광야에서 훈련을 받는다(계12:6). 그리고 교회가 휴거되어 셋째 하늘에 올라갈 때,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완전한 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휴거를 말하는 것이고, 교리적으로는 재림 때에 대환란을 거쳐 천년왕국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

2:21-23 『그가 일어나 어린 아이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집트에서 나와 이스라엘 땅으로 오신다. 그러나 그는 유대땅으로 가시지 않고 북왕국 열지파에게 속하였던 갈릴리 지방으로 가신다. 그리고 갈릴리는 ‘이방인의 땅’으로 불린다(사9:1, 마4:15).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지만 유대인을 다스리는 것 이상의 사역을 갖고 계신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다루는 책이지만 때때로 이 책에서는 이방인과 교회에 관한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에서는 5명의 이방 여인이 그러한 경우이고, 2장에서는 바로 이 구절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이방의 빛으로 비추신다. 이것은 두 가지 경우인데, 이방인들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어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경우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왕으로 오셔서 온 이방을 자신의 발 앞에 복종시켜 통치하시는 경우이다. 물론 마태복음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고 전자는 암시로서 제시된다.
여하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 지방으로 오셔서 그곳을 고향삼아 사셨고(눅4:24),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려지셨다.

천사(angel)와 별(star)

마태복음 2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어휘가 있는데, 바로 ‘천사(angel)’와 ‘별(star)’이다.
‘천사(angel-αγγελος)’라는 말을 흔히 알고 있기로는 ‘전달자(messenger)’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천사들은 항상 전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은 않는다. 앙겔로스를 전달자로 알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고전적 헬라어(Classical Greek)의 영향인데,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전적 헬라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필로 등 이교도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헬라어이며, 이것은 오리겐이 성경을 변개시킬 때 사용했던 헬라어 인데, 이러한 고전적 헬라어의 의미를 신약성경의 의미로 가져온다면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된다.
성경에서 천사는 ‘전달자’ 이상이다. 구약에서 천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주의 천사를 보고 ‘주(Lord)’라고 불렀다(창19:18). 천사가 전달자로서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성경에서 천사는 나타나고자 하는 자의 ‘현현(appearance, appari- tion)’이다.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는 주의 현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천사는 항상 날개 없는 젊은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성경에서 별은 종종 “천사(angel)”와 관련되어있다(계1:20; 12:4; 12:9; 9:1). 계시록 9:1에서 별은 “그(him)”라고 말해지며, 더우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새벽 별(morning STAR)”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장에서 나타난 별은 ‘주의 천사’와 관련된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11마일도 채 안되는 거리를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추적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별은 현자들의 앞에서 그들을 인도했다. 아마도 그 별은 별의 모습으로 나타난 주의 천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정도 성장할 때 까지는 사람들에게 ‘주의 천사’로 나타나 인도하셨다. 그 천사는 현자들에게 나타났으며, 요셉에게 나타났고(마1:20), 다시 그들을 이집트로 내려가도록 지시했다가(마2:13)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했다(마2:19). 그리고 그 천사는 ‘주(The Lord)’의 현현(appearance, 또는 apparition)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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