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주석 분류
침례인 요한과 왕국의 거부
컨텐츠 정보
- 11,190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1월호>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은 왕국이 거부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말씀의 증거와 표적을 통해서 왕국복음을 선포하셨지만, 7장에서 경고하신 말씀대로 말씀을 가로막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들로 인해 백성들은 왕을 거부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왕국이 거부당했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이후로는 왕국복음을 전파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왕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그 왕이 요한복음 19:15에서 완전히 거부당하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왕국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러나 마태복음 11,12장은 왕국복음이 진행되는 연속선상에서 왕국이 어떻게 거부당하는지를 보여주며, 특별히 그것이 한 세대를 마무리하는 침례인 요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11:13). 그러면 침례인 요한은 과연 누구인가?11:1-3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시기를 마치신 후에 그들의 성읍에서도 가르치며 전파하기 위하여 그 곳을 떠나시더라. 그때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주께 말씀드리기를 “당신이 오실 그 분이시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침례인 요한은 감옥에 있다. 그가 감옥에서 어떻게 죽었는는 마태복음 14:1-11과 마가복음 6:21-28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의 때가 끝나며 동시에 한 세대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선 침례인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역시 표적으로써 증거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일들을 다시 요한에게 전하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절)
11:7-10 『그들이 떠나간 후,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더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더냐? 아니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더냐? 보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니라. 이것이 그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니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네 면전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서 너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대로 침례인 요한은 선지자였다. 그리고 보통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 사실은 11절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었느니라.』는 예수님의 진술에서도 명백해진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연약한 사람도 아니었고, 왕궁에 있는 사람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부드럽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μαλακοΐς”(말라코이스)라는 중성어로, 고린도전서 6:9에서는 “여자 동성연애자”로 번역된 말인데, 이 말을 통해 왕궁에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침례인 요한은 선지자이다. 선지자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임무를 띤 선지자로, 그는 선지자 엘리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임무는 왕이 오시기에 앞서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왕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마3:2).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선 말라키 3:1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말라키 3,4장은 “주의 날”에 대한 예언으로, 그 구절은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말라키 4:5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누가복음 1:17에서 침례인 요한에 대해서 주의 천사가 말할 때 말라키 4:5,6을 인용한 것으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침례인 요한은 다시 올 선지자 엘리야였다. 이 사실은 또 마태복음 17:11-13에
서 예수님께서 침례인 요한을 엘리야로 묘사한 것을 보아도 확실시된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한정짓기에는 그의 위치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침례인 요한 자신의 진술이다. 그는 요한복음 1:21에서 “네가 엘리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엘리야라 하셨는데, 그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는 서로 모순되는 진술이 나타난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이 더 옳으므로 침례인 요한이 틀린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도 강조해 왔던 “왕국”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말라키 3:1에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의 길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임하시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3에는 말라키 3:1과 더불어 이사야 40:3의 예언을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변개된 성경에서는 마가복음 1:2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라고 변개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 구절은 말라키와 이사야, 둘 다를 인용한 것이기에 “선지서들에”라고 기록되어 있는 킹 제임스 성경이 옳은 것이다), 이 이사야 40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주의 날”과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이다. 또 말라키 4장은 “주의 크고 무서운 날”(말4:5)에 대한 예언으로, 왕국이 임하기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민족을 심판하시는 사건과 관계있는 장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즉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 임하기 직전에 와서 주님의 왕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천국이 임했었는가?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제자들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했지만 결국 그 때에 천국은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국이 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모두 가지고 보는 이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초림과 재림이 구분되지 않았고, 단지 “그의 오심” 하나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약적인 구원의 개념을 몰랐으며, 단지 자기들의 왕, 메시야께서 오셔서 그 분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만 알았던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1:10,11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되며, 신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는 초림에 관한 부분만 인용하든가, 아니면 초림에 관계된 것으로 바꾸어서 구약을 인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침례인 요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위 에서 설명한 관점으로 보게 되면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의 각각 엇갈린 진술을 해결할 수 있다. 침례인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 엘리야였다. 그는 “천국”이 오기에 앞서 “천국”의 길을 예비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때 천국이 임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되어 갔다. 왕이 나타났고 왕께서 친히 가르침과 표적으로 자신의 왕되심을 전파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왕국은 임하지 않았다. 왕이 거부된 것이다. 그리고 왕국은 2000년 뒤로 연기되었다. 엘리야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주의 크고 두려운 날”, 즉 심판의 날 이전에 나타나야 한다. 초림 때는 심판의 날이 아니었다. 이것은 재림 때 있을 일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엘리야는 재림 때 다시 나타나야 한다. 그 엘리야가 바로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만약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때 “주의 날”과, “천국”이 임했을 것이고, 침례인 요한은 완전하게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림이 연기됨으로써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가 되지 못했다. 성령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아시기에 말라키 4:5,6의 예언을 조금 바꾸어서 누가복음 1:17에서 인용하시는데, 『그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지고...』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며, 이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14에서 증거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그 사실을 받을 의향만 있다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가 바로 그 사람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한된 의미로 엘리야였다.
11:11-13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었느니라.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모든 선지서와 율법은 요한까지를 예언한 것이라.』
그러나 침례인 요한은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서 메시야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예언한 선지자이며, 그의 길을 예비하는 “왕의 선두주자”이고, 더욱이 그에 의해서 한 세대가 종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까지를 한 세대로 나누어 놓으셨는데, 이것은 세대주의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구약이 몇 개의 세대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잠시 접어두고, 그 앞에 어떤 세대가 있었든지 침례인 요한으로 끝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문맥상 주제가 “천국”이므로 세대의 구분도 천국에 맞추어 생각해보자. 본문에는 천국과 관련하여 세 개의 시대가 등장하는데, 13절의 요한으로 마쳐지는 세대로서 천국이 예언되는 시대와, 11절의 천국이 드러나는 시대(우리는 이것을 천년왕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과도기적인 세대로서 12절에서 묘사되는, 천국이 폭력으로 탈취되는 시대이다. 두번째 과도기적인 시대는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라고 제한시킨 것을 보아 분명히 나누어지는 한 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것은 이 과도기적인 시대는 교회시대가 아니다. 교회는 아직 계시되지도 않았고 교회는 분명히 천국이 아니므로, 이 시대는 교회시대를 생략한 또 하나의 과도기적인 시기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당시를 말하며, 이것은 같은 관점으로 왕국이 전파되던 시기인 십자가 사건 때까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도기적 시대는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천국이 폭력으로 탈취되며,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천국을 차지하는 것인데, 이 “폭력”이라는 말은 전혀 긍정적인 의미의 힘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해서 “열심”있는 사람들이 천국을 차지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복음으로 인한 천국의 확장”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적용한 결과이며, 이러한 오류는 마치 계시록 6:2의 흰 말 탄 자의 승리를 복음의 확장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천국이 불법자들에 의해 탈취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기간은 지극히 짧은 과도기적인 기간으로서, “폭력을 쓰는 자들”이란 당시의 힘있는 자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천국의 도래를 막고 있는 위선자들이며(마23:13) 거짓 선지자(마7:15), 개, 돼지(마7:6)라고 누차 폭로하셨다. 이스라엘이 왕을 거부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이들에게 있다. 그들은 왕국을 거부하고 대신 그 천국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로는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진심은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표적을 보기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어떤 표적이든지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마12:38,39). 왕이 왔으나 거부되었고 불법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1:12의 상태이다. (누가복음 16:16은 좀 다르다. 거기에도 세대 구분이 되어 있기는 하나 그 시대는 교회와 관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확장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설교하기 원하는 자는 누가복음 16:16을 사용하기 바란다.)
11:16-17 『그러나 내가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친구들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애통하여도 너희가 통곡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거꾸로 해석하여, 침례인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 세대는 춤추지도 않고 통곡하지도 않으며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이 틀린 것은 이어지는 18,19절의 문맥만 보면 알 수 있다. 피리를 불고 애통하는 자들은 악한 “이 세대”이며, 춤추지 않았던 자는 먹지도 마시
지도 않았던 침례인 요한이고, 통곡하지 않았던 자는 먹고 마시던 인자이시다. 물론 예수님은 탐식하지도 않으셨고, 술을 즐기지도 않으셨다. 이것은 그들의 모함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인 것은 사실이다. 침례인 요한은 이 악한 세대를 위하여 춤추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선 그들의 위선적인 금식과 규례에 동조하지 않으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으셨다(마9:10). 그리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느니라』(마9:13; 12:7).
11:20 『그 후 주께서는 자기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하기 시작하시더라.』
코라신과 벳새다가 책망받은 이유는 그들에게 행했던 권능을 투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회개했을 것인데 코라신과 벳새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이유로 카퍼나움은 소돔과 비교되어 책망받고 있으며, 같은 관점으로 12:39-41에서 이 악한 세대가 니느웨 사람들과 비교되어 책망받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이방 성읍들보다 더 책망받는 이유는 기다리던 왕이 표적을 행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서도 왕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메시야 왕을 거부한 그들의 죄는 투로와 시돈의 우상숭배의 죄보다, 소돔의 성적 타락의 죄보다 더 크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은 지속적으로 거부되어졌다. 12절에서 폭력으로 탈취되는 천국, 14절의 이 사실을 받을 의향이 없는 모습, 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한 것, 20-24절의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모습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 이스라엘이 완고한 민족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사람들에게로 관심을 돌리신다(물론 이 이후의 장들에서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메시지는 계속 나온다. 여기서는 왕국의 흐름 속에서 관점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왕인 “인자”(the Son of Man)의 모습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인 “천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로서의 모습도 종종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부분이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말씀이지만 교회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는 죄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또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주님의 짐은 지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이 말씀은 10:38과도 연결이 되는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리라.』고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지만, 주님과 함께 지는 그 짐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옛 성도들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라 나서는 군사로 서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이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는가? 죄짐을 진 자는 누구나 주님께 나아가자. 그러면 주님께서 쉼을 주신다. 불교에서도 “혼의 쉼”을 말하고 있으나,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지킬” 때 쉼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분께 가기만 하면 쉼을 얻을 수 있다. 그 이후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배울 수 있다(1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2장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왕을 거부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