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주석 분류
『히브리서』는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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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4월호>
신약성경에는 특별히 어려운 세 개 의 책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이다. 보통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들 하는데, 사실 요한계시록은 믿기에 어려울 뿐이지 기록되어 있는 대로 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다. 계시록의 모든 예언들은 사실이며 성경에서 해석해 주고 있기에 그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 년”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천 년”이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무천년주의 이단 이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기록된 그대로 믿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그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의 기간으로 받아들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그러나 문자적 해석으로도 잘 해결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이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 세 책에서 걸려 넘어진다. 그 이유는 이러한 책들이 하나의 “경륜”(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영 방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경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시대면 율법시대, 은혜시대면 은혜시대, 이렇게 하나의 경륜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율법들은 구약 율법시대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오는 제사법이나 의식법들을 신약시대의 규례로 가져오지 않고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라고 생각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또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13권의 바울서신은 교회시대를 향한 서신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온 교리들과 명령들은 현 교회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에 앞서 말한 세 권의 책들은 각각 두 개의 경륜이 한 데 섞여 있다.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고,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과 교회의 경륜 사이에 있으며, 히브리서는 교회와 대환란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을 가리켜 “과도기적 책”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 즉 교회시대에 맞추려는 성향이 강하다. 구약의 율법까지도 교회에다 적용하려고 한다.
어느 정도 세대 구분을 한다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기본적인 구분은 한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나눌 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 안에 있는” 구약적인 책들을 대하면 곧바로 넘어지고 만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하면 그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말씀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과 상반될 때 발생한다. 로마서는 분명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는 말씀을 대하며, 히브리서에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히 6:4-6).
이같이 서로 상반되는 구절들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대립하는 곳이다. 일면으로는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오류를 범한 이유는 바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의 차이를 모르기 떄문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부분은 더 철저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한 구절을 떼어 내서 그 부분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문자적 해석이란 그 말씀이 어떤 시대에 사는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냐 하는 것까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책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 참조). 히브리서는 “마지막 날들”(last days, 히 1:2)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마지막 날들”이 언제인가는 히브리서 1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이 기간이 교회시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는 교회시대와 대환란의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래서 어떤 구절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렵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강조하는 한편, 과거 출애굽 당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안식의 땅으로 들어갔듯이 미래에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삼아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히브리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히 3,4장).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 광야에서 떨어져나갔듯이, 미래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들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이 “유대인서”가 아니라 “히브리서”라고 되어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믿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히 5:12-14; 6:1-3), “성령의 동참자”들이다(히 6:4).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여 언제든지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에게 과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떨어져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 따라서 믿음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 이어 12장에서는 인내라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믿음과 행위를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필수적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환란 때의 성도들을 돌봐 주시리라는 것은 천년왕국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하신 산상설교에서도 강조된다 (마 6:25-26).
히브리서가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 책이라는 말은 환란시대뿐 아니라 교회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에서도 교회시대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 9,10장과, 믿음을 강조하는 11장, 그리고 성도의 행실을 강조하는 13장 등이다. 특히 9,10장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의 속죄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인 우리가 든든히 붙들 수 있는 부분이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단번 속죄와 양심의 정결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 근원적인 힘이 된다. 또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기에 고난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은(히 2:17,18; 4:15,16)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구절들조차 유대인들에게 적용이 가능하며, 12장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경륜들을 구분하는, 세대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을 많이 담고 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저자에 관한 문제이다. 문제시 되는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히브리서 13장의 결말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문체가 같다는 것이고(『...은혜가 너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히 13:25),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2장까지의 내용이 다른 서신들과 문체나 내용면에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대신해서 누가나 아폴로나 심지어 프리스킬라까지 그 저자로 제시하곤 하는데, 이러한 대안들을 증거할 만한 구절들은 없다. 오히려 1611년 <킹제임스성경>은 이 책의 제목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통원문을 보존하고 있던 동방정교회는 처음부터 이 책이 바울서신이라고 믿었으나 서방교회는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전통적으로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의 신학자들이 그 사실을 비평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 책이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단 이 책의 대부분이(13장을 제외하고) 바울서신과 내용이나 형식에서 다른 것은 그 기록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갈라디아서 1:16-17에 보면, 그는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갈 1:12).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12장까지는 초기에, 13장은 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1장에서 12장까지는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서신서들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유대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교리로 가득 찬 다른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한 후에 기록된 13장은 그 서신서들과 동일한 관점과 형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히브리서는 저자에 관한 문제로부터 본문 각 구절들에 이르기까지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평을 받아올 뿐만 아니라 많은 오류를 자아내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롬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