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교회 분류
제1과 교회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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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5월호>
본 「지역 교회」 코너는 피터 S. 럭크만 목사의 책 <지역 교회>(The Local Church)의 핵심 내용을 편집하여 정리한 것이다.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지역 교회에는 여덟 명의 회원이 있었다. 교회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불러냄을 받은 모임”(에클레시아, e]kklhsi;a)이라는 뜻이므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참된 교회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 아래에 있는 세상 체계 “바깥으로” 불러냄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교회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정 짓는다. 즉 스스로가 속해 있는 세상 체계(코스모스, ko;smov)로부터 분리되고(부정적이다), 고립되고(부정적이다), 성별되도록(부정적이다) 하는 “바깥으로”의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다면, 그 지역 교회는 성경적인 조직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다원주의 사회”의 문제를 “어루만지기 위해 손을 뻗어” “지역 사회 프로젝트”에 대해 “관여”하거나, “교회와 세상 간의 현대적 대화”를 “요구”하는 일이란 신구약 어느 성경과도 무관하다. 그런 자들은 카를 마르크스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해방 신학”은 그 누구도 무언가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요 8:20-40). 교회가 “평등권”을 필요로 하는 “억압받는 대중”이 있는 곳에서, “소수민족 집단”을 위해 “사회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개념은 성경적인 교회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던 짐 존스1)의 교회가 성경적 교회와 동떨어졌던 것만큼이나 말이다. 덧붙이자면 짐 존스의 교회는 늘 연방, 지역, 에큐메니컬, 뉴스 매체 등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그는 주 정부와 연방 정부로부터 종교 활동에 관한 한 모든 종류의 면허를 발급받아 소지하고 있었다.
[1)수백 명의 신도들과 함께 집단 자살한 사이비 교주(역자 주)]
“교회”란 무언가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 체계 바깥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노아가 불러냄을 받았던 까닭은 그 세대가 곧 익사하게 될 것임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의 전파자』(벧후 2:5)였으며, 일곱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다음으로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아브라함과 그의 친족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임”을 불러내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혼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친족들이 동행했다. 아브라함이 불러냄을 받았던 까닭은, 바벨은 “혼란”이라는 사실과, 세미라미스와 님롯을 신격화하여 달과 태양을 숭배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라”는 과거 그 지역의 아랍인들이 섬기던 달 신이다.)
그다음으로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아예 “교회”라고 명명되기까지 한다. 스테판이 『광야의 교회』(행 7:38)라고 불렀던 그 교회는 틀림없이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세상 체계, 곧 이집트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던 까닭은, 인류의 창조주시며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살아 계신 한 분 참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께서는 거룩하셔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증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약 200만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지역 교회였다. 금송아지들을 만드는 부목사, 산 채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집사회, 투덜대고 불평하기를 40년이나 계속하는 회원들이 있는 상황에서 주일학교에 그같은 “역대급 등록 인원”이 몰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목회”에 대해 배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모세를 보라. 모세는 이사야 63:11에서 “양무리를 맡은 목자”라고 불린다. 신약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형제들 사이에서의 불화, 사모에 대한 비평(민 12장), 목사의 부재에 대한 불평(출 32장), 물질적 공급의 부족, 후미를 노린 공격(출 18장), 권위를 탈취하려고 하는 교회 내의 가짜 형제들(민 15,16장), 죄지은 교회 회원들을 죽이시는 하나님, 교회의 문제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목사, 육신적인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청년들, 아예 세상 체계로 돌아가 버리고자 하는 욕망, 지도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부족 등등 모든 것이 거기에 다 모여 있다.
다음으로 “불러냄을 받은 모임”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임의 회원 가운데 하나는 불신자로 드러났고(도마), 다른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저주하고 맹세했으며(베드로), 교회의 회계 담당자는 마귀였다(유다 이스카리옷, 요 6장). 앞으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이후에 형성될 “그리스도의 몸”은 이 제자들로 구성된 지역 교회를 통해서 태동했다. 그 안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이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엡 5:30)인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모임이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시요, 유대인의 메시아시며,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데 있었다. 그 지역 교회는 오순절에 유기체적이고 살아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고, 그때로부터 그들의 부르심은 주 예수께서 유대인의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세상의 구주이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 죄를 제거하는 피의 속죄를 이루셨다는 사실 또한 증거해야 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이후로 “지역” 교회를 지칭하는 데에 107회 가량 사용된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적이고 영적인 “몸”을 지칭하는 데 쓰인 것은 10회뿐이다(엡 1:22, 골 1:18, 고전 12:27,28, 딤전 3:15 등).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교회들은 “지역 교회”이다. “침례교 신부주의자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교회 시대의 초기에는 “몸”의 모든 구성원들(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동일한 “지역” 모임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역 모임이 곧 “몸”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가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상황을 한 가지 가정해 보자. 어느 날,사도 바울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성경침례교회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교회에게”라고 쓰인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이 편지는 누구에게 보내진 것인가? 답을 내놓기 전에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가장 먼저 편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설 이는 로마에 있는 대주교이다. 마태복음 16:16-18이 하나의, 참된, 거룩한, 사도적인, 또 기타 등등의 수식어를 갖다 붙인 로마카톨릭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면서 편지를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수신자가 잘못되었는가? 좋다. 그렇다면 캠벨주의자들이 그 편지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그 마태복음 16:16-18이 바로 자신들의 교회라고 말할 것인데, 바톤 스톤과 알렉산더 캠벨이 1800년대에 그들이 세운 교회들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지었으니,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자신들이 그 편지의 주인이라고 할 것이다. 수신자가 또 잘못되었는가? 좋다. 그렇다면 누가 그 편지를 가져야 하는가? 침례교회인가? 그렇다면 어느 침례교회인가? 침례교회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그룹인가? 남침례교인가? 아니다. 그들은 배교하지 않았는가? 좋다. 그럼 원시(하드쉘) 침례교인가? 아니다. 그들은 거짓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가? 좋다. 그러면 프리윌 침례교(Free Will Baptist)인가? 아니다. 그들도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자, 이제 말해 보라. 독립침례교회들만이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주님의 “신부”인가? 자,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그들 가운데 어느 쪽인가? 세계침례교친교회(WBF) 쪽인가, 아니면 성경침례친교회(BBF) 쪽인가? 교회를 성경적으로 운영하기에 어떤 친교회에도 소속되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인 침례교회들은 또 어떤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교회”가 바로 자기네라고 실랑이를 벌일 모습을 상상하자면 비디오 가게에 가는 것보다 더 흥미롭지 않은가? 자, 만약 “에베소에 있는 교회”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의미한다면, 하나 이상의 지역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다. 달라스에는 500개가 넘는 지역 교회가 있고, 포트워스에서는 그 수가 600개가 넘는다. 펜사콜라에서는 지역 교회의 수가 130개가 넘는다. “펜사콜라에 있는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신 차리라. 이 말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언급일 수밖에 없다. 어느 지역 교회에 속했든지 간에 “펜사콜라에 있는 거듭난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침례교 신부주의자들은 성경을 엉망으로 만들고서는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단만을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독점적인 지위로(아담에게 있어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엡 5장) 드높이고, 그 동네에 있는 모든 구원받은 장로교인, 감리교인, 카톨릭 신자, 성공회 신자, 심지어 자신들이 교리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노선을 따르는 침례교도들까지 모두 “어린양의 혼인식”에서 시중이나 들 거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해리 트루먼이나 지미 카터의 시중을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