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부흥과 개혁 분류

너희 묵은 땅을 파 일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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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6월호>

영국 런던에서 찰스 스펄전이 목회했을 당시에, 그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에 관한 설교를 몇 주에 걸쳐 계속한 적이 있었다. 견디다 못한 한 성도가 스펄전에게 "왜 목사님은 계속 회개만 설교하십니까? 도대체 그런 설교를 언제 그만두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면서 "당신이 죄에서 돌이킬 때까지 설교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완성된 속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다. 더 이상 죄인으로서 지옥에 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들로부터 성별하여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구원받고 나서도 여러 가지 죄들과 육신의 일들과 세상의 오염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를 받고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며 영적인 활력이 전반적으로 쇠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앙생활에 기복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성도의 성장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된다. 19세기의 신실한 복음전파자였으며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던 찰스 피니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판에 박힌 영적 생활을 한다고 느낄 때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만 집중했는데, 기도와 금식을 하면서 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그렇게 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때때로 침체될 수 있기 때문에 쇄신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죄를 간과하시지 않는 하나님

그 이름이 "거룩"이신(사 57:15)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 어떤 양보도 없으시다. 주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눈을 가지셨기에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고 죄악을 볼 수도 없으시다(합 1:13).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 그처럼 악하고 더럽고 극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죄로 삼으시어(고후 5:21)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죄를 심판하셨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서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적당히 눈감아 주시고 교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자기기만이다. 성도의 마음과 생활에 죄가 발견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를 통해 역사하실 수 없으며 성령님의 능력은 그를 통해 나타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공부한 말씀과 전파된 설교를 통해 죄들이 드러났다면 당장에라도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는 나쁜 버릇을 걷어차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적인 행보를 취한다 해도 그 성도를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1,2).

인정하지 않는 위선

그런데 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타락하는 것보다 더 극심한 악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 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패역하고 타락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렘 3:6-11). 북왕국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왕국 유다까지도 멸망하게 만든 "치명적인 악," 곧 높이 들린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그들을 향해 내리쳐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죄악의 마지막 한 방울은, 자신의 죄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려는 "위선"이었다. 인정했다면 자백하고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고, 돌이켰다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간구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서슬 퍼런 심판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비단 2,600여 년 전의 이스라엘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을 잃어버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 역시 자기 안에 죄들이 들어와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막히고, 성령님께서는 그러한 성도들 안에서 온전하게 충만해지실 수 없게 된다. 『주 너의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것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타국인들에게로 네 길을 흩어 버린 것과 너희가 내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네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 주가 말하노라』(렘 3:13).

무기력함의 원인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생각하면 주께서 내게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죄악들이 청소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정결한 비둘기와 같으신 성령님께서 그 성도들 안에 충만히 거하실 수 있겠는가? 썩은 육신의 일들을 청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통해 왕성하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을 잃어버렸음에도 전혀 마음에 애통함이 없다면, 그것 자체가 그 성도가 깊은 침체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몇 가지 정해진 종교적인 기준들이나 만족시키는 가운데 미지근하고 식상하며 무기력한 신앙생활로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윗이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당신이 그 사람이니이다.』(삼하 12:7)라는 지적을 받았을 때 반응했던 것처럼 해야 하는데, 곧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고 책망하실 때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하지 말고 『상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시 51:17)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안일함의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통회하는 마음으로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부복해야 하는 것이다.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우뚝 솟은 분, 그의 이름이 거룩이신 분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여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는도다』(사 57:15).

어떤 죄들이 주님의 얼굴을 가렸는가?

성경은 죄들의 목록을 여러 곳에서 제시하고 있다. 마음으로 짓는 죄들의 대표적인 사례들이 있는가 하면(막 7:20-23), 이방의 죄인들이 물 마시듯 자주 짓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하는 죄들이 있고(롬 1:21-32), 성도들이 성령님을 거슬러 육신을 따를 때 나오는 육신의 일들도 있다(갈 5:19-21). 또한 교회 시대의 마지막 배교의 날에 나타나는 죄악의 현상들도 나온다(딤후 3:1-7). 사탄은 죄를 각양각색으로 둔갑시켜 성도들을 물들이고 있다. 그래서 피터 럭크만 목사님도 <럭크만 주석성경>의 『부록 53, 무엇이 죄인가?』에서 간교한 형태로 스며드는 죄들에 대해 명시한 바 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라. "내 안에 햇빛 같이 따사롭고 어머니의 보살핌처럼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려 버린 죄들이 있지는 않은가?" 바로 그 죄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쓴 뿌리,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원한 그리고 증오와 멸시를 품고 있지는 않는가? 쉽게 신경질을 내고 분노하며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염려하고 초조해 하면서 하나님을 불신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능력과 경험과 가치를 높이는 가운데 자신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들지는 않았는가?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없고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 이를테면 애인, 친구들, 취미, 안락함, 세상에서의 성공 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는가?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그 잘못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지 않은 적은 없었는가? 가정과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겨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적은 없었는가? 탐욕이나 더러운 생각들을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TV, 스마트폰, 인터넷 등에 쓰는 시간이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더 많지는 않은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이후 황급하게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는가? 혼들에 대한 영적인 부담감을 잃어버렸으면서도 그런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지는 않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의 향을 꺼트리지는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터득하려는 열망이 식지는 않았는가?

종이와 펜을 옆에 놓고 성경을 열라. 죄들을 보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앞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곰곰이 읽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버린 모든 죄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종이에 적어 보라. 죄에 관한 한 절대로 관대해서는 안 된다. 굳어진 마음 밭을 깊이 파고 죄악으로 뭉쳐진 단단한 흙덩이들을 깨트려라. 『너희 자신에게 의로 심고 자비로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파 일구라. 이는 지금이 주를 찾을 때임이니, 그가 오셔서 너희에게 의를 비처럼 내리실 때까지라』(호 10:12).

참된 부흥을 위한 준비

부흥을 간절히 원하는데 왜 부흥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죄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충만한 역사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죄에 너무 심하게 물들어 있어서 그러한 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거나, 설령 알고 있다 해도 그 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성장도 개혁도 변화도 도전도 기도의 응답도 찬송도 감사도 없는 주된 원인이다. 성도 개인의 부흥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는, 성령님을 슬프시게 해 드렸던 모든 죄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그 죄들을 판단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죄들을 찾아내고 애통해 하며 그것들을 판단하고 제거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진전도 있을 수 없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소서. 내게 무슨 악한 길이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고 올리브나무처럼 푸르며 강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싱그러운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요 10:10, 고후 8:9, 엡 3:8).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한, 죄와 악을 척결하는 "부정적인 과정"이 "긍정적인 열매"보다 늘 앞서는 법이다. 즉 영적인 축복에 앞서서 죄들을 모두 도려내는 진정한 참회의 값 지불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A.W. 토저는 이런 요지의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미 없는 식상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Rote).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영적으로 판에 박힌 생활을 하게 된다(Rut). 이렇게 영적으로 고착된 지점에 빠지게 될 때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그대로 방치되어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이고(Rot), 또 하나는 그 고착된 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적인 부흥을 갖는 것이다(Revival)."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패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부흥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 보라.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 3:19).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