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구약의 교훈 분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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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4월호>

그리스도인은 거리 설교나 개인 구령 현장에서 완고한 불신자들의 눈총을 받는 일이 꽤 있지만, 교회나 성당 등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조롱과 반대에 부딪힐 때가 상당수 있다. 그들은 “나도 교회에 다니는데요...”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렇게 적나라하게 설교하면 안 된다며 훈수를 두기도 하고, 타인에게 민폐가 된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이는 그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만 했을 뿐 거리 설교자요 지옥 설교자셨던(막 9:43-49)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이들 또한 구원받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씁쓸한 마음이 든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기만 하다가 지옥으로 가는 현실 속에서, 2천여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불현듯 떠오른다. 『또 선지자 엘리사의 때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외에는 그 중 아무도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눅 4:27). “제사장들의 왕국”이자 “거룩한 민족”(출 19:6)이 되어야 했을 이스라엘에는 문둥병을 치유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림몬의 집”에서 우상을 숭배하던(왕하 5:18) 시리아 출신의 “나아만” 장군만 치유를 받은 것이다.

이와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매주 하나님에 대해 들으면서도 정작 구원받지 못하는 교인들과 달리, 오히려 “교회 밖”에서 성경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채 살았던 죄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구원받는 양상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나아만은 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왕하 5:1)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 의장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 성경은 그에 대해 의도적으로 『그가 또한 힘센 용사였으나 문둥병자였더라.』(왕하 5:1)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아무리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너희는 사람에게 의존함을 그치라. 그의 호흡은 그의 콧구멍에 있으니 그가 존중받을 것이 어디에 있느냐?』(사 2:22)

한편 나아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그의 집안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해 있던 이스라엘 출신의 소녀 종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가 그녀의 여주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주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이는 그 선지자가 그의 문둥병을 고칠 것임이니이다.” 하니』(왕하 5:3). 평상시라면 한낱 종에 불과한 소녀의 말이 시리아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일이 없었겠지만, 문둥병을 해결할 뾰족한 방도가 없었던 시리아 조정에서는 그 여종의 말에 경청했고 나아만를 위시한 일종의 사절단을 이스라엘에 파견했다(왕하 5:4-6).

이로써 나아만은 “구원을 위한 첫 단추”를 아주 잘 끼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능력으로는 “죄”(“문둥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롬 3:23,24). 죄인들이 흠모할 만한 어떤 아름다움도 없이(사 53:2) 오신 분의 말씀과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고전 1:26-31) 통해 전파된 복음과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들 앞에서 “교만한 마음”이 꺾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진정으로 불행한 사람은 “어려움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번영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은 그들을 멸망시키느니라』(잠 1:32).

이제 “불치병”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겸손해진 나아만은 주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을 수용하기만 하면 치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사람들에게는 항상 큰 걸림돌이 되는데,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그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기를 “가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회복되고 네가 깨끗게 되리라.” 하자 나아만이 노하여 돌아가며 말하기를 “보라, 나는 그가 반드시 내게로 나아와 서서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으로 병든 부위를 쳐서 문둥병을 고치리라 생각했노라』(왕하 5:10,11).

우리가 사는 이 교회 시대에 “깨끗해지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롬 3:25)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진리에 대해 나아만처럼 화를 낸다. “예수님만 믿으면 어떤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요? 그렇다면 선한 행위들은 모두 쓸모없다는 얘기인가요?”

한편 나아만의 종들은 그의 어리석은 생각에 대해 아주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그 선지자가 당신께 어떤 큰 일을 하라고 명하였다면 당신은 그 일을 하지 않았겠나이까? 하물며 그가 당신께 ‘씻어 깨끗해지라.’ 한 것이리이까?” 하더라』(왕하 5:13).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봉사 활동 100시간을 채워야 한다.”라고 하셨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동의하고 행했을 것이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받게 해 주시겠다는 이 “파격적인 조건”을 거부할 까닭이 있겠는가? 사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고집쟁이들”인 것이다.

결국 고집을 꺾은 나아만은 종들의 조언에 따라 엘리사의 말을 받아들여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 깨끗해졌다. 이제 감사함과 마음의 부담을 동시에 갖게 된 나아만은 그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시인했고, 하나님과 그분의 종인 엘리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받아 줄 것을 강권했다(왕하 5:15).

한편 그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국왕을 수행하다 보면 우상을 섬기는 신당에 들어가 어쩔 수 없이 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에 마음이 괴로웠던 나아만은 염치 불고하고 하나님께 용서도 구했다(왕하 5:18).

이 시대에도 어떤 죄인이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되면 곧바로 당면하는 문제들이 이런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당장은 끊기가 쉽지 않은 죄들이 “마음의 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문제에 관한 정답은 그러한 죄들로부터 “성별을 결행하는 것”이다(고후 6:14-18).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당장 성별을 결행하라고 언급하기보다는 『평안히 가라.』(왕하 5:19)라는 답변만 했다.

때때로 이제 갓 구원받은 노숙자 중에는 “술을 끊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라며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권면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이나, 또다시 술을 먹게 될 때 하나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으라는 조언이 전부인 것이다(고전 11:31,32, 요일 1:9).

만일 그런 사람에게 “용서에 관한 교리”는 뒤로하고 “거룩함에 관한 교리”만 강조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 내야 한다고 압박을 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양심이 마귀의 정죄를 이겨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뒤틀리다가 종국에는 죄를 정당화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요일 1:8,10).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응당 잘못된 일이지만, 그와 같은 죄책감에만 시달린 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시간마저 무기력하게 날려 버리는 일은 더더욱 잘못된 일이다. 끊기 어려운 죄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우리는 그 문제를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히 9:14). 오히려 그렇게 할 때 그러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엘리사는 끝까지 나아만의 예물을 받지 않았다. 이는 선한 간증을 남기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돈을 받고 병을 고쳐 주시는 분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는 우려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탐심으로 인해 이러한 간증을 파괴했다. 말하자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이 아직은 멀리 가지 않았을 때 그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전언이라고 거짓말하면서 은과 옷을 챙긴 것이다.

이처럼 마귀는 갓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의 행보를 파괴하기 위해 다른 성도의 육신적인 비행을 이용한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면 ‘선지자라는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왕하 5:16)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번복하는구나.’ 하면서 실망하거나 게하시를 의심할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은 오히려 게하시에게 강권하여 그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줘서 보냈다. 이 죄로 인해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문둥병자가 되었다.

자, 나아만이 그렇게 관대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은혜로 굳건해진 마음”(히 13:9)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 나머지 누군가에 대해 실망하거나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분께 갚아 드릴 기회만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형제들 간의 관계에서는 『차라리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라는 성경의 권면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다른 성도들의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의도나 속마음에 대해서 주제넘게 의심하거나 판단하면(롬 12:3, 고전 4:5,6), 설령 그 판단이 옳다 해도 “사탄의 계략”에(고후 2:10,11) 걸려들기가 십상이다. 당시에 나아만이 찜찜한 마음으로 물건을 내주었다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 하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내보일 기회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어찌했든 간에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에 대해서만 집중한다면, 이런 종류의 “사탄의 계략”은 저절로 분쇄될 것이다.

한 죄인이 이제 막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이처럼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편과 마귀의 편 사이에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진다. 이제 주님께서 공중으로 오셔서 교회 시대를 끝내실 휴거의 날이 임박했기에 이와 관련된 싸움 또한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 시대에 거리 설교나 구령 현장에 있는 성도들은 피 말리는 심정 속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나아만 당대에 이스라엘의 조정이 그러했듯이(왕하 5:7), 현대의 제도화된 교회들은 진리에 관한 한 그 수준이 형편없고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도 모르기에 이런 긴박한 사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구비되는 것은 너무나 절박한 현실이다.

어디에선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나아만 같은 “문둥병자”가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원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죄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부주의로나 준비가 안 된 모습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친다면, 은혜의 시대에 구원받지 못한 결과 대환란으로 들어갈 죄인들의 모든 원망이 우리에게 쏟아진다 한들 우리는 그 어떤 변명도 댈 수 없을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