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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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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9월호>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7,13).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갈망”이다. 아기들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면서 나를 달래라고, 젖을 달라고, 놀아 달라고,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자세를 바꿔 달라고 끊임없이 보챈다. 영적 생명이 탄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혹자가 주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그 살아난 영과 결합하여 한 영을 이루신다(고전 6:17). 우리 안에 “새 사람”이 형성되는 것이다(골 3:10).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듭남,” 곧 육신의 출생 이후에 다시금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하셨다(요 3:6). 이러한 영적 출생이 있고 나면 전에는 없던 갈망이 꿈틀대게 되어 있는데, 즉 전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성경을 읽지 않아도, 죄를 짓고서 그냥 넘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은 종교인으로서 습관적으로 했을지 모르는데, 이제는 원해서 하게 된다.
성령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영적인 일들을 갈망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시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자”라고도 불리시는데(요 14:26), 이에 대응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htov)는 “곁으로 불러낸 자,” “돕는 자”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세상에 우리를 유기하고 떠나 버리시지 않고,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신하도록 도우신다. 거듭난 성도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후 13:5). 성령님께서 그 새로운 출생에 대해, 즉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는(요일 5:1) 사실에 대해 증거하시기 때문이다(롬 8:16).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부른다.
익숙함에 속아 잊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러한 관계성은 대단한 특권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이었다(엡 2:12). 따라서 전능하신 창조주께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일이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응당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악한 아비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기까지 하셨다(눅 11:9-13). 전에는 받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면, 이제는 받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따르도록 돕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요 16:13). 그렇다고 해서 거듭난 성도가 아무런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잘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실 때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씩 바로잡혀 가다 보면, 반드시 진리의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주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구약에는 이 일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 있다. 당신은 성소 안에 있는, 빵을 차려놓은 상 맞은편에 금촛대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이 금촛대는 하나의 중심 가지에서 양쪽으로 가지가 셋씩 뻗어 나와 총 일곱 개의 등불을 밝히도록 한 기명인데(출 25:32), 이는 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일곱 영』(계 4:5)으로도 표현되는 성령님을 상징한다.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사 11:2).
성막의 금촛대에서 타오르는 불은 성소 안의 유일한 광원(光源)이었다. 이 그림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빵”이 잘 차려져 있다고 해도 성령님을 상징하는 촛대의 불이 없다면 그 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큰 오해를 갖고 있다. 어떤 “직통 계시”를 통해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성령님께서는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즉 성경의 말씀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고전 2:13). 성령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다른 기록된 말씀과 비교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나도록 하시는 분이시지, 성경에 전혀 기록된 바 없는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일도 도우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도 않는다고 고백했다(롬 7:18). 우리의 육신은 “열매”라고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간음, 음행, 더러운 것, 음욕 등의 일들만을 생산해 낼 뿐이다(갈 5:19-21).
따라서 아무리 잘해도 육신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육신은 늘 성령을 거스른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겠느냐고, 저런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재미없게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살 것이냐고 우리에게 묻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육신을 억누르거나 윽박지르면서 육신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다. 육신적으로는 납득도 되지 않고 하기도 싫은 일일지라도, 그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내어드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롬 6:11-14). 그러면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유, 절제로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갈 5:22,23), 육신을 통해 역사하는 죄는 힘을 잃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다.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성령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정말로 고마우신 분이시다.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롬 8:26).
인간에게는 서먹한 사이일 때보다 오히려 소중한 사이일 때 더 쉽사리 상대방을 슬프게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위해 주시는 성령님을 너무도 쉽게 슬프시게 해 드린다. 심지어 그럴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도, 돕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으시기에, 마음은 더욱 숙연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슬퍼하실만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엡 4:30). 이후로는 성령님께 슬픔이 아닌 기쁨만을 안겨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며, 우리의 질그릇 안에 계신 “보물”(고후 4:7), 곧 성령님을 “성령의 열매”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