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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쇠락을 막고 부흥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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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오랜 기간 우수한 결과를 냄으로써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학교를 “명문 학교”라 일컫는다. 앞서 “정도”(正道)를 걸어간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 길에서 정진한다는 측면으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수많은 성도의 피 흘린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기에, 그 이름에 대한 자부심 자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문제는 때때로 그 이름 뒤에서 추악하게 썩어 버린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몇 해 전, 미 국무 장관과 FBI 국장 등을 배출한 미국의 한 명문 기숙 고등학교에서 전통을 핑계 삼아 후배 여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한 남학생이 기소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그간 선배 남학생들이 이런 일들을 상호 경쟁적으로 벌여 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던 적이 있다. 오랫동안 선배들이 쌓아 올린 학교의 명예를 일신의 욕망을 위해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또한 그러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의해 그 위상을 영광스럽게 드높였던 이스라엘이, 제사장 엘리의 때에 이르러서는 제사장들이 성막 문에 모인 여인들과 함께 동침하고, 그에 대한 책망도 귓등으로 듣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삼상 2:22-25).
“인간 쇠락의 법칙”은 시대와 대상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러면 이 법칙을 거슬러 이전 세대만큼, 아니 이전 세대보다 더 잘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배교의 시대이자 마지막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이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절박하기만 한데, 그래서 필자는 그 쇠락의 법칙을 깨고 부흥을 일으켰던 사무엘과 그 주변 인물들을 비교함으로써 “영적 쇠락을 막고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늙고 피동적인 제사장 엘리>
이스라엘이 영적 쇠락의 길을 걷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당대의 영적 지도자였던 제사장 “엘리”에게 있었다. 비록 엘리는 아주 민감한 영적인 감각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당시 아이였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으로 오인하여 세 번이나 그를 찾아왔을 때, 다시 음성이 들리거든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하라.』(삼상 3:9)라는 조언을 줄 정도의 감각은 있었다. 또한 죄를 지은 자기 아들들을 책망하기도 했다(삼상 2:22-25).
그렇다면 엘리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매사에 열정 없는 태도를 보인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심히 늙어 있었던 것이다(삼상 2:22). 음행한 아들들을 책망할 때, 엘리에게는 그 죄를 저지하거나 처벌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하지도, 그 죄가 “음행”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지도 못한 채, 단순히 『그런 짓』(삼상 2:23)이나 『좋지 않은 소문』(삼상 2:24) 정도로만 말한 것이다. 죄를 지은 자식들을 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키지도, 율법에 따라 돌로 치지도 않았다. 엘리의 책망은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마치 낮잠에 취한 사람이 날아드는 파리를 쫓기 위해 손을 휘젓듯이 아무런 “살상력”도 없었다.
한편 어린 사무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아들들의 음행과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엘리로 인해 그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삼상 3:11-14). 이를 전해 들은 엘리는 이렇게 반응했다. 『그분은 주시니, 그분께서 좋으실 대로 행하실지라』(삼상 3:18). 이것이 얼핏 훌륭한 반응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엘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크게 뉘우치지 않았다. 악한 왕의 대명사인 “아합”조차 그와 그의 집안에 심판이 선포되었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몸에 두를 줄 알았거늘(왕상 21:17-29,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유보하셨음), 엘리는 그저 체념해 버린 것이다. “내리막길”은 바로 이런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고후 4:16)져야 한다. 영적으로 아무것도 갈급한 것이 없고, 혼을 쏟아 놓는 간구도 없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되는 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피 흘린 발자취”의 맥을 끊는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라(삼상 2:31).
<주님을 모르는 엘리의 두 아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피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횡령하는 젊은이들로 자라났는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주된 원인은 제사장 엘리의 “잘못된 태도”에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의 종을 보내어 “내놓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아 가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제물들을 가져오게 했다(삼상 2:12-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두 아들을 가리켜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라, 그들은 주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2)라고 말씀하신다. 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사람을 “다 아시지만,” 그분의 이름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는 그런 자들에게는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경고하신다.
인간관계에서도 단순히 “들어 본 적만 있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데, 현 교회 시대에도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거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요 1:12). 수많은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채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주로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데 있으므로, 혹 자신도 그렇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종착지도 이와 동일한데, 곧 그분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멸망하게 되고 영원히 불타는 것이다(살후 1:8,9).
엘리의 아들들 역시 그러한 결말을 맞았다. 그들이 목숨을 잃었던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가 진영 안에 있기만 하면 패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삼상 4:3). 하지만 홉니와 피느하스가 하나님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허울뿐인 제사장이었듯이, 궤를 가져다 놓았다는 허울이 파멸을 막아 주지는 못했다. 결국 엘리도 그 충격으로 죽었고 언약궤 역시 적들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로써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이카봇』(삼상 4:21), 즉 영광이 떠나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전을 가진 영적 지도자 사무엘>
성경은 어린 시절의(삼상 3:1) 사무엘이 주를 알지 못했다고 말씀한다(삼상 3:7). 사무엘이 겨우 젖을 뗐을 무렵 하나님께 바쳐진(삼상 1:24-28) 이후로 에봇을 입고(삼상 2:18) 주님을 섬겼지만(삼상 2:11), 아직은 “형식”만 갖추었을 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전무했던 것이다. 그러했던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신 방법은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삼상 3:21)시는 것이었으며, 특별히 사무엘에게는 『그분의 말씀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삼상 3:19) 해 주셨다.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누군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연 으뜸이다(딤후 3:16,17).
그렇다면 왜 홉니와 피느하스는 이렇게 되지 못한 것일까? 그들도 사무엘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성장 환경 속에서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의 하나로 말씀을 들으면서 컸을 텐데 말이다. 이에 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이것이다. 『이는 그들이 지식을 싫어하며 주를 두려워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라』(잠 1:29).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들은 말씀을 간직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은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저 편안하게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면서 전혀 유념하지 않는다(겔 33:30-32). 그러면 주님께서도 굳이 막지 않으시고 말씀들을 모두 땅에 떨어뜨리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런 사람에게는 애당초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구경하기조차 힘든 “귀한 보석”처럼 되고 만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이런 백성들이 즐비했다. 『당시에는 주의 말씀이 귀하여, 환상[vision]은 나타나지 않았더라』(삼상 3:1). 이처럼 아무런 “비전”(vision)도 없이 “조명”이 꺼져 버린(삼상 3:3) 백성들로만 가득했던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잠 29:18).
그러나 “이카봇” 이후 약 21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있었던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히 보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정곡을 찔러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는 모습에서 돌이켜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라고 책망했다. 열매는 곧바로 나타났으니,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우상을 버리며 회개했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쓸어버리시어 선지자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 7:3-14).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꽤 시간을 썼는데도 여전히 앞으로 무엇을 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면, 말씀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점검해 보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반드시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태도로 살지 않았다면 “눈앞이 캄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눈앞의 작은 한 걸음조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거나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을 살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겠는가?(눅 16:10)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말씀”과 “그 말씀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성도”가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에는 더 이상 전국적인 규모의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없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나 국지적으로는 부흥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부흥은 꼭 필요하다. 이는 성도들 대부분의 영적 상태가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영적 상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스스로 신실하다고 자부하는 신학대학과 교회들이 모두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영적 쇠락을 막고 개인과 지역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피동성과 형식주의를 벗어 버려야 한다. 또한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들이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비전을 온전히 성취해 내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