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증거와 원문 성경 분류
70인역의 망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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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2년 08월호>
헥사플라(Hexapla)란 무엇인가?70인역을 평가할 때에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은 “헥사플라”(6란 성경)이다. 이는 학자들이 70인역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헥사플라는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를 “신학계의 불후의 명작”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신학과, 그러한 찬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70인역의 망상을 밝힘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변개시키는 원인과 근원이 되는 헥사플라에 관한 올바른 조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류만(Reumann)이나 베트스타인(Wettstein,1751), 그리스바흐(Griesbach,1774), 라흐만(Lachmann,1842), 트레겔레스(Tregelles,1857), 티쉔돌프(Tishendorf,1869),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prt), 카스퍼 그레고리(Casper Gregory,1890) 등과 같은 원문비평가들의 원조는 오리겐(Origen,184-254)이다. 오리겐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배회하던 북아프리카인이었다. 그는 철학에 심취했으며, 결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수정할 목적으로 전문 속기사와 필경사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의 전생애 가운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부합하지 않는 성경구절을 수정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18세기 이후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자 신학자들은 “위대한 번역가”, “시대의 선구자”, “최초의 위대한 과학적 성경 해석자”, “과학적 성경 대조자”, “최초의 위대한 성경 학자” 등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둘째, 그는 구령자가 아니었다. 셋째, 그는 정경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견해를 같이하지 않았다. 넷째, 그는 3학년 수준의 헬라어도 ‘해석할 수 없었다’. 그밖에도 오리겐은 웨스트코트와 홀트와 거의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리겐은 세례에 의한 중생과 “사도적 자질”로서 유아세례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로부터 사사받았는데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으로서 이교도 영지주의자인 판태누스(Panteanus,145-200 A.D.)의 계승자였다. 그러므로 무신론이 잠재하고 있는 영지주의 철학 학교에서 “기독교 신학과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이곳 학교에서는 지옥, 중생, 보혈의 능력, 성경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저술가들은 오리겐이 “유아세례”처럼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교리문답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젊은 오리겐은 클레멘트 밑에서 플라톤과 필로와 스콜라 철학 등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신학공부의 한 방법으로 이교도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서적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그는 신플라톤 철학의 창시자인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170-243) 아래서 수 년 동안 수학하였다. 마침내 오리겐은 제논(Zeno,310 B.C.), 소크라테스(Socrates,470-399 B.C.), 플라톤(Plato, 427-347 B.C.), 에피쿠로스(Epicurus,342-270 B.C.), 필로(Philo,20 B.C.- 50 A.D.), 요세푸스(Josepus,37-100 A.D.) 뿐만 아니라 웨스트코트(Westcott), 홀트(Hort), 틸리히(Tillich), 바르트(Barth), 브루너(Brunner), 교황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인정할 수 있는 성경을 만들어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7명의 필경사와 7명의 속기사와 함께 성경 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수고’로 인하여 ‘근본주의적인 신앙’은 물론 ‘헬라 철학자들의 철학’도 발견할 수 있는 변개된 성경이 만들어 졌다.
하나님에 대한 오리겐의 개념은 지극히 플라톤적이다. 이는 그의 로고스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았으며,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단정했다.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으며, 유디스(Judith)와 토빗(Tobit)같은 외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였다. 게다가 혼의 환생설과 윤회설을 믿은 오리겐을 진실하고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칭송하고 있다.
이러한 오리겐이 최초의 “대역 성경”인 헥사플라(6란 성경)를 만들었다. 바로 현대의 신학자들이 신뢰하는 “70인역”을 헥사플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70인역의 유일한 사본은 오리겐이 사망한 지 125년 만에 복사되었으며, “70인역”(바티칸사본)은 유세비우스와 팜필루스가 직접 헥사플라의 제 5란을 복사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5란은 오리겐이 직접 쓴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주석서를 통해 알려진 소위 “70인역”의 실상이다. 70인역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지 100년 뒤에야 만들어 졌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 5란을 70인역의 개정본이라고 하며 70인역을 인용할 때 헥사플라 제 5란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인용하는 제 5란 조차도 220-254년 사이에 기록된 오리겐의 헥사플라가 아니라 벨과 용(Bel and Dragon), 토빗(Tobit), 유디스(Judith) 등이 포함된 바티칸사본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영어 개역본(RV)과 미국표준역본(ASV), 개역표준역본(RSV) 등의 20세기 “성경”을 만드는데 사용된 사본이다. 또한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 킹 제임스 성경을 수정하는데 사용된 사본으로서 C.I.스코필드나 그밖의 근본주의자들도 사용하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다 주의 깊게 인본주의의 결집이며 진리를 오도하고 있는 오리겐의 헥사플라를 살펴보자. “헥사플라”는 단순히 구약성경의 6개 역본(Version)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 6개의 역본은 세로로 된 6개의 란(column)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에 작자 미상의 저서 3개 이상이 제 6란 다음에 놓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 1란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자리잡고 있다.
제 2란에는 히브리성경을 재생하기 위하여 헬라어의 특성을 살려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헬라어 음역본:Greek Transliteration)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의 “베레쉬트”(bereshith)를 헬라어 “베레쉬트”(βερεσιθ)로 옮기는 것이다.
제 3란은 아퀼라(Aquillar,95-135 A.D.)의 역본이며, 제 4란은 심마쿠스(Symmachus,160-211 A.D.)의 역본이 차지하였고, 제 5란은 오리겐 자신의 역본을 실었으며, 마지막 6란은 데오도티안(Theodotian,140-190 A.D.)의 역본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제 5란을 이제까지 사용해 온 전설적인 70인역의 개정본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필로가 날조한 “아리스테아스의 서신”에 적합한 헬라어역 구약성경을 만드는 작업에 오리겐이 착수했다는 것과 그 이전에는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일단의 학자들은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학자들이 “바티칸 사본”인 “70인역”을 언급할 때마다 진리는 왜곡되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제 3란의 저자는 에비온파였던 아퀼라였다. 에비온파는 “산상수훈”과 같은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을 따랐으나 성령의 역사로 사도 바울에게 계시된 구원의 교리는 배척하였다(갈1:8-14). 아퀼라는 오리겐이나 칼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일찌기 그가 중생을 경험했다거나 적어도 중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점성술을 포기하라는 권고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파문되었고 그 후로 그는 구약성경의 개정과 번역에 전념하였다는 것이다.
아퀼라가 “여호와”(Johovah)를 번역한 표현은 “아버지”(Pipa 와 Papa)였다. 따라서 “양부”(養父)라는 의미의 “팝스”(paps:아버지)라는 단어에서 “폽”(pope:교황)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아퀼라는 이사야 7:14의 “알마”(Alma:처녀)를 “네아니스”(νεανιs)로 번역하였다. 이는 “젊은 여인”이라는 의미로 고치려는 의도이다. 만일 아퀼라가 마태복음 1:23을 보았다면 (마태복음은 적어도 아퀼라가 자신의 역본을 완성하기 50년 전에 기록되었다), 성령님께서 “알마”를 “파르테노스”(παρθενοs:처녀)로 기록하셨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녀”를 “젊은 여인”으로 변개시켜 동정녀 탄생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그가 교회로부터 축출된 후에 유대교로 다시 개종했으며 티투스 황제가 통치할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우상들을 재건하였다.
다음으로 헥사플라의 제 4란인 심마쿠스의 역본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심마쿠스는 신약성경이 완성되고 나서 수년이 지난 후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인용부분과 비교, 검토되며 자리를 잡은 시기였다. 그는 아퀼라와 마찬가지로 에비온파였으며, 영지주의자였고 동시에 유대교도이
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해 바울의 서신들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포함해서 바울 서신을 배척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다고 약속하신 구약의 말씀을 삭제하였다.
헥사플라의 제 5란에 관해 미국표준역본(ASV)의 구약성경 개정 위원장이었던 필립 샤프(Phillip Schaff)는 그의 교회사에서 아퀼라와 심마쿠스와 데오토티안을 언급하면서 제 5란이 오리겐의 저작으로서 “70인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라 프라이스(Ira Price)도 그의 저서에서, 글리슨 아쳐(Gleason Archer)도 그의 저서 , pp.39-40>에서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으며, 헤클로트(H.G.G. Herklotts)도 역시 헥사플라의 제 5란이 오리겐의 저작인 70인역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성경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헬라철학에 심취한 편파적인 오리겐과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부터 “중립적인 원문”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70인역과 같이 변개된 알렉산드리아의 원문에서 나온 새로운 현대의 성경들의 누가복음 2:33, 사도행전 8:37, 디모데전서 3:16은 분명히 중립적인 구절이 아니다. 그것은 오리겐의 “70인 역”(바티칸사본)을 복사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볼테르(Voltaire,1694-1778)나 톰 페인(Tom Paine,1737-1809)의 저서 못지않게 중립적이지 않은 구절이다. 이모든 것의 시작은 오리겐이다. 그는 “중립적인 접근방식”을 사용했는데 그의 방법은 호머의 작품을 편집했던 문법학자 아리스타커스(Aristarchus)의 방식대로 신약성경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변개된 알렉산드리안의 원문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말하는 “중립적 접근 방식”의 실상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전설적인 70인역은 헥사플라가 나타나기 전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현대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저기서 발견된 조각들의 단편들이 다소 있을 뿐이다. 그 중 8%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1714년에 발견된 것이며, 1875년 필드 박사와 옥슨 박사가 발행한 것이다. 현재 오리겐의 70인역은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바티칸사본”(B)으로 재현되었으며, 웨스트코트와 홀트는 이 사본을 기초로해서 그들의 헬라어 성경을 제작하였고 네슬-알란드 원문과 연합성서공회(UBS) 원문 역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영어 개역본(RV), 미국표준역본(ASV), 개역표준역본(RSV), 그밖의 영어 성경들, 한글 개역성경과 기존의 한글성경들은 오리겐을 충실히 반영한 현대적 유물들이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 5란은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성경이 기록된 일상적이고 평범한 헬라어)가 아니라 헬라 고전어(Classical Greek)로서 구약을 번역한 것이었으며, 바티칸사본에서처럼 오리겐은 B.C.400-200년(플라톤, 에우리페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의 정자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헬라 고전어(문어체 헬라어)로 기록된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330-350 A.D.)의 정자법이 1세기 경에 사도들이 파피루스에 기록할 때 사용했던 코이네 헬라어로 변조되었으며, 에버하트 네슬(Eberhard Nestle)은 이 필사본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와 같은 언어라고 독자들이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반면에 11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 에라스무스(Erasmus)가 사용했던 필사본들(전통원문; 표준원문) 안에 코이네 헬라어가 보존되었다. 사실 오리겐으로부터 변개된 70인역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제 3란의 아퀼라까지는 구약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제 5란인 70인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B.C.160-60년 경에 기록된 토빗(Tobit)으로 구약성경이 완성된 후에 나온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이 완성된 후에 나온 것이 히브리어로 된 유디스(Jodith, B.C. 175-132)나 벨과 용(Bel and Dragon)으로 300년 이후 헥사플라를 복사한 변개된 사본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더 살펴 보면 마카비서(Maccabees), 에스드라서(Esdras), 지혜서(Wisdom of Sirach) 등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성경이다.
헥사플라의 마지막 6란은 데오토티안의 역본이다. 그는 아퀼라, 심마쿠스,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에비온파였으며, 침례를 받고 교회에 나가고 성례를 치르고 “황금율”을 준수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마태복음 1:16에서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들과 그들의 역본을 모으고 자신의 역본을 함께 편수하여 만든 오리겐의 작품 헥사플라 - 70인역 - 에 와서 초기 변개는 극에 달했고, 그 변개의 씨는 현대의 변개된 성경들을 열매로 맺었다(마12:33 - “이는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기 때문이라”).
우리는 이제 70인역의 실상을 인식해야 하며,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때 비로서 전설적인 70인역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변개된 70인역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실제적인 변개의 용례와 70인역을 인용하는 학자들의 오류를 고찰해 볼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