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분류
목사는 아무나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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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2월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약 2,000년이 흘렀다. 그 동안 2,000년이라는 교회사 속에서 신실한 주의 종들이 많이 나와서 고난 가운데 피를 흘려가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켜왔고 그 양들을 먹여왔다. 주님의 진리를 사수하고, 그 진리로 양무리를 돌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주의 종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필자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목회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사실 그 때는 거듭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장로교 계통의 교회에서 자란 연고로 당연히 사당동에 있는 모 신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그 옆에 있는 숭실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알고 보니 이 학교는 그 재단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로 이곳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는 “목사 지망생”이 꽤 많았다. 필자가 지원한 영문과와 특히 철학과에는 더 많았는데, 철학과의 절반 정도는 신학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한 “코스”로 들어온 경우이다. 이유인즉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과학을 공부하면 신학을 공부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중세적인 관념으로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 이 허울 좋은 넋두리 같은 미명 하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신학을 철학의 틀 안에 가두고 만다. 신학이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발견되기 위하여, 그리고 양들을 건전한 교리로 가르치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딤후2:15) 일이다.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다(고전2:14). 그러나 신앙과 학문을 혼동하면 안된다고 말하며 철학으로 신학을 하려는 이들은 인간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며, 또 철학이 카톨릭 신앙으로 뒤범벅이 되었던 중세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신학대학원 진학 시험에 철학 시험을 치뤄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목회자의 뜻을 계속 품고 신학대학원을 위한 준비를계속 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신학”대학원의 시험이 일반 입시와 별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물론 성경과목도 시험을 본다. 하지만 변개된 성경으로 그 기록된 단어들에 대해서 철저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책의 주제는 무엇이고, 어떤 비유는 어떤 책들에서 나오며, 몇 장 몇 절의 말씀은 무엇이고, 중요한 단어에는 괄호문제 등, 성경 속에서 받아야 할 영감과 진리의 깊이는 제쳐두고 구절과 단어암기식 입시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변개된 성경과 변개된 신학의 체계 속에서 나온 해답을 정답으로 알고 써야만 “합격”할 수 있다. 필자를 우습게 한 것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사사기 17:6이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개역성경)』라는 구절을 내놓고 어떤 말씀인지를 쓰라고 하면 사사기 17:6을 써야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1:25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는데 그 문제에 21:25를 쓰면 틀린 답이 된다. 21:25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ing James 성경에는 분명히 둘 다 『In those days there was no king in Israel: every man did that which was right in his own eyes.』로 되어있다. 이 외에도 King James 성경으로 보면 맞는 답이 개역성경으로 공부(암기)하기에 틀리고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며, 잘못된 성경으로 잘못되면 잘못된대로 오로지 “합격”을 위해서는 틀린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도 정성으로 새벽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밤을 새워 암기해도 떨어지는 것이 신대원 입시이다. 날이 갈수록 “헌신”(소명이 아니다)된 자는 증가하기 때문에 각 학교에서는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것은 소속 교단의 교인 외에는 그 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소속 교단 내의 노회장의 추천을 받아야 신대원의 입학 자격이 생긴다. 이로 인해 유명 신학원을 가기 위해서 교회를 옮기는 젊은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적 성별(biblical separation)이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노회고시라는 시험을 쳐서 그것에 통과해야 추천을 받을 수 있다. 학위를 따기 위한 발버둥이다. 언제부터 하나님이 세우시는 목자가 시험을 통과해서 자격증을 받아야 했는가?
이렇게 해서 입학한 사람들은 그 신학교의 복제 인간이 되어서 나오기 마련이다. 자유주의 신학교에 간 사람은 자유주의 목사로, 후천년, 무천년주의 신학교에 간 사람은 후천년, 무천년주의 목사로, 칼빈주의 신학교에 간 사람은 칼빈주의 목사로, 은사주의 신학교에 간 사람은 은사주의 목사로 복제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일수록 더욱 그렇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학교에 입학해서 변질되어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 또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학위를 보고 입학하여, 인간 이성과 철학으로 신학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필자가 대학 1학년 때 경건주의를 자랑하던 한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니는 친구는 자기 대학에는 잔디밭에 담배꽁초가 보이지 않는다고 자랑했고, 필자는 그것을 확인하고 부러워한 일이 있다. 3년 후 군에서 제대하여 그 학교에 가보니 잔디밭에 담배꽁초, 담배갑등이 너저분하여 일반대학과 똑같아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혼들의 목자와 감독이시며(벧전2:25), 선한 목자이신(요10:10)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로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여(딤후2:15)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딤후3:5)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며(딤후4:2) 양육하고, 성도들에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케 하는 자이다(딤후4:8). 하지만 오늘날의 “목사 지망생”들에게서 이러한 목자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 근거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오염된(골2:8) 진리없는 사람들 밑에서 똑같은 학문을 배우며, 영과 진리로 행하지 않고(요4:24), 잘못된 행위들을 단지 “신령과 진정으로(요4:24, 개역성경)” “헌신”하여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자신들의 정성을 바치고 있으나, 주님께서 언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정성을 받으시겠다고 하셨는가? 진리를 배제한 정성을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그들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개역성경)는 말은 잘 기억하면서도,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노력하라』(딤후2:15)는 말씀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평생을 헌신한 자들이 감사하게도 구원받아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된다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되었던 그들의 공적이 불에 타버리는 것을 허무하게 바라보며 불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고전3:12-15).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