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작사자들의 신앙 분류
찬송으로 믿음을 고백한 로버트 로우리
컨텐츠 정보
- 152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3월호>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 그 찬란했던 복음과 진리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황혼이 짙게 드리우던 19세기 말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로, 1826년 3월 1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는 장차 자라서 설교자와 찬송가 작사자, 작곡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보였던 그는, 17세가 되던 1843년에 필라델피아의 제일침례교회에서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했다. 1848년에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펜실베이니아 루이스버그 대학교(현재 버크넬 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28세가 되던 1854년에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아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체스터에서 1858년까지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이후 다양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서 목회를 하며 찬송가 작사와 작곡을 병행하다가 1899년 11월 25일 74세의 나이로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주님 곁으로 떠났다.사실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찬송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말해 찬송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찬송가 가사의 내용을 믿지도 않고 그저 따라만 부르며 입술의 고백으로 자신의 믿음을 포장하는, 그마저도 세상 리듬에 맞춰서 세상 노래 부르듯이 부르는 현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교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로버트 로우리도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찬송가 작사자요 작곡가로서 구원과 구원의 확신, 재림의 소망 등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자신이 믿는 바를 가사와 곡조로 만들었다. 이런 그의 찬송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있으며, 동일한 믿음을 지닌 수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찬송가집 <영광을 주께>에는 그와 같은 로우리의 찬송가가 11곡이나 실려 있다.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들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531장 「훗날 우리 다시 만나」와 관련된 일화가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준다.
로우리는 브루클린에서 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1864년 7월 어느 무더운 날 그 531장의 찬송가 가사를 썼다. 당시 브루클린에서는 매우 심각한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고, 하루에도 수백 명씩 운명을 달리했다. 로우리는 주변의 참담한 광경을 목도하던 중 “비록 죽음의 강을 건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의 강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이 흘러나오는 요한계시록 22장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붙잡고서 거실에 있는 오르간 앞에 앉아 가사와 곡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바로 「훗날 우리 다시 만나」이다. 로우리의 이 찬송은 많은 성도들에게 비록 우리가 죽어 이별하더라도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 이러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는 1882년에 발발한 영국과 이집트 간의 전쟁에서 한 미국인 간호사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편지로 쓴 것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녀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날도 많은 부상자들이 병동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영국의 전통적인 보병 부대인 하이랜드 연대의 한 병사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고열 가운데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 병사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여 살펴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병사가 갑자기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마음이 애틋해지는 가운데 물에 적신 수건을 그의 머리에 얹어 주었고, 또한 그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는 눈을 뜨면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어머니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를 위해 대신 편지를 써 줄 수 있다고 했더니, 편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노라고 말하면서 그 대신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나는 잠시 주저했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침 서쪽의 햇살이 기울면서 나일강 위를 반짝이는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잔물결이 반짝이는 강을 바라보자 「훗날 우리 다시 만나」(Shall We Gather at the River?)라는 찬송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그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부상자들도 내가 부르는 찬송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 보였습니다. 찬송을 모두 부른 후, 나는 채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그 병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수가 흐르는 그 강변에 설 확신이 있느냐고, 거기에 있을 거냐고 물었고, 그 부상병은 “네, 저는 거기에 있을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을 통해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던 빛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 땅에서 이제 곧 죽음을 앞둔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병사는 내일도 다시 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다음 날 찾아갔지만, 그 병사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그 강변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을 거냐는 물음에,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답하는 찬송가 531장에 담긴 위의 예화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찬송가가 가진 위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의 고백이 되지 못한 채 부르는 찬송은, 개인의 믿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의 감정만을 고양시키는 일종의 “마취제”가 될 뿐이다. 그래서 이 땅의 많은 교인들이 소위 찬양 집회에 참석해서 스스로 마취된 감정 속에 구원받은 것 같은, 구원의 보장에 관한 확신이 생긴 것 같은, 믿음과 소망이 더욱 굳건해진 것 같은 “느낌”과 “착각” 속에서 허우적대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공허하고 불안한 마음을 움켜잡고 방황하는 것이다. 결국 그와 같은 영적 피폐함을 해소하기 위해 또다시 찬양 집회를 찾아 “마취제”를 맞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찬양 집회 자체에 중독되고 만다. 그들은 찬양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먼저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다. 『오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찬양은 정직한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니라』(시 33:1).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되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또 말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 3:16,17). 찬양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합당한 것으로, 시(시편에서 발견되는 실제적인 시들)와 찬송(찬송가집 <영광을 주께>에 있는 회중 찬송용으로 사용되는 노래들)과 영적인 노래(합창곡 등을 위한 특별한 음악들)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인간이 자기만족을 위해 부르는 노래일 뿐이다.
특히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로우리 목사는 주의 보혈과 재림의 소망에 관한 찬송을 많이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찬송을 부르며 변화를 받았고, 변화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감사의 희생제(시 107:21,22)로서 찬양의 희생제물(렘 33:11)을 드렸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히 13:15,16)로서의 온전한 찬양을 올려 드렸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적어도 로우리의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은 자신이 그 찬송가의 가사를 믿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를 반드시 돌이켜봐야 한다.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칼빈주의자들과, 자신이 받은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두 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 또 재림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자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찬송가의 내용이 그들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자신이 믿지도 않는 가사를 하나님께 불러 드린다면 과연 그 찬양이 받아들여지겠는가? 당신은 정말로 그 강변에 서 있을 확신이 있는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도록 하라. BB